# 86
11화
구명의 전음이 다시금 들려왔다.
[어떻게 합니까?]
[쥐새끼는 떼어 놔야지. 우리의 행보를 굳이 보여 줄 필요는 없으니까.]
[앞장서지요.]
구명은 애초에 가고자 했던 방향에서 약간 선회해서 걷기 시작했다.
간단한 전음이었지만 오랫동안 함께 한 사이답게 이미 생각은 통일됐다.
걸왕은 추적자들을 전부 죽이거나 잡아 버리고 움직일 생각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은밀한 곳이 필요하다.
구명의 발이 마을의 외곽으로 향했다.
이미 걸왕이 전음으로 나머지 셋에게도 상황을 알렸기에 그들 모두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다. 그렇지만 겉보기에 그들은 너무나 태연했다.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낄낄거리며 웃으며 다섯은 막 골목길에서 꺾였다.
그리고 그 장소에 낯선 그림자 세 개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갑자기 사라진 다섯의 행방 탓이다. 아니,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 맨 선두에 있던 사내가 자그맣게 말했다.
“피해…….”
“늦었어.”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뒤에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떨어져 내렸다.
비대한 몸, 그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몸을 지닌 구명이다.
그는 자신의 커다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손을 붕붕 돌리니 바람 가르는 소리까지 들린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걸왕이 말했다.
“죽이지는 마. 알아낼 게 있거든.”
“예, 그러죠.”
말을 마치자마자 구명의 손이 맨 앞에 있는 사내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크억!”
채 반응도 하기 전에 그의 발이 옆에서 잠시 넋을 잃었던 사내의 턱을 올려쳤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게거품을 물며 사내는 쓰러졌다.
“말할 놈은 하나만 있으면 되지.”
단번에 둘을 쓰러트린 구명은 하나 남은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사내는 인상을 구겼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외모다. 그렇지만 뒤따라올 때의 은밀함을 보면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자임이 틀림없다.
“뭐하는 놈인데 남의 뒤를 쫓아. 그것도 감히 나의!”
구명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렇지만 이미 뒤에는 걸왕이 다가온 상태였다.
그의 손이 빠르게 혈도를 쳤다.
“흐!”
몸의 힘이 쭉 빠지며 사내는 그대로 쓰러졌다. 몸은 움직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유독 입만은 움직인다.
“왜 우리의 뒤를 쫓았느냐.”
“…….”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냐?”
“이놈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구명이 발로 사내를 걷어찼다. 그렇지만 고통 어린 표정만 지을 뿐 사내는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걸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한 놈일 것이다. 누가 손을 쓴 건지 몰라도 지독한 놈을 보낸 듯하다. 이런 자라면 아무리 고문을 해도 아무런 것도 실토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것이다.
“구명.”
구명이 고개를 돌려 걸왕을 바라봤다.
“끝내. 말할 놈 아니다.”
“젠장.”
구명 또한 알고 있다. 한두 번 사람을 겪어 본 것이 아니다. 특히 거지라는 것이 아래 인생부터 권력층까지 두루두루 겪게 되기 마련이다. 그랬기에 사람에 대해 잘 안다.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도 그가 어떠한 됨됨이를 지닌 인물인지 안다는 것이다.
이런 놈은 아무런 것도 말하지 않는다.
죽는 한이 있어도 입을 함구할 놈이다.
눈을 보아하니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구명은 그대로 발을 들어 올려 사내의 사혈을 때렸다. 단발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사내는 눈을 감았다.
걸왕은 눈을 감은 사내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서둘러야겠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감시가 붙었고, 그 감시는 지금 자신과 갈지혁의 만남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어. 정말로…… 사달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군.’
* * *
갈지혁은 당문에서 보름가량의 시간을 보냈다.
눈에 띄는 행동은 아무런 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갈지혁과 진검백은 그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갈지혁은 당문과 많은 부분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됐다.
당문은 갈지혁에게 많은 것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독왕이 되든, 실패하든…… 어떻게 보면 손해를 보는 장사를 당문은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려환은 떠나려는 갈지혁의 방문을 받았다. 애초부터 곧 떠난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다. 갈지혁의 짐은 변한 게 없다. 당문에서 갈지혁이 받아서 나가는 건 현재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는 당문에서 많은 것을 받았다.
“흠. 떠나려고?”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그런가? 앞으로 행보는 어찌할 생각인가?”
“강해질 겁니다.”
“흠…….”
행보를 물었거늘 강해질 거라고 답했다. 전혀 맞지 않는 답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이 전부이기도 했다.
강해질 수 있는 길을 가겠다는 말일 게다. 그것이 어떠한 길일지 당려환은 모른다. 당려환은 더 이상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다. 그건 갈지혁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판단한 탓이다.
옆에 서 있는 진검백을 바라보는 당려환의 눈빛은 애매했다. 진검백이 물론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알아서 안 될 것을 많이 알고 있다. 화산파의 인물이다. 언제든 화산파에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런 당려환의 마음을 알았을까.
“걱정 마십시오. 이곳에서 알게 된 일을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런가? 고맙군그래.”
당려환은 가볍게 대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 놓여 있는 서류들이 꽤 된다. 오늘 하루 쉬지 않고 일해야 간신히 해결할 수 있을 정도다.
“종종 연락하지.”
“알겠습니다.”
“배웅은 않겠네. 자넨 자네의 길을 가게. 그리고…… 성공하길 빌지.”
갈지혁은 고개를 꾸벅했다.
그 이상의 예의는 갈지혁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당려환의 호의를 진심에서 감사하고 있다.
갈지혁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당문에서 보름이라는 시간을 보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거처에서 보냈기에 다소 낯선 길이다. 그렇지만 갈지혁과 진검백은 헤매지 않고 문을 찾아냈다. 처음 당문에 들어왔을 때부터 모든 신경을 집중했던 탓이다.
만약에 일이 생긴다면 도망을 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퇴로를 알아야 한다.
둘 모두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갈지혁과 진검백은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 주변에서 그 둘을 보는 눈빛이 그다지 곱지 않다.
그 둘이 어떠한 이유로 이곳에 온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명은 화산파의 무인이요, 나머지 하나는 무림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독인이다.
그리고 둘은 이곳 당문에서 사고를 일으킨 적도 있다. 그들의 눈빛이 곱지 않은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냐는 듯 둘은 그런 다른 사람들의 눈빛을 무시했다.
눈앞에 당문의 문이 있다.
잘못했다면 쉽게 넘지 못했을 문이지만 이제는 당문 문주의 환영아래 이곳을 벗어나게 됐다.
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이 고개를 돌렸다.
당문은 다른 문파에 비해서도 특히 아무나 들어오게 하지 않고, 나가게 하지 않는다. 갈지혁이 앞에 있는 문지기에게 종이 하나를 던졌다.
당문 문주의 친서다.
종이를 확인한 무인이 말했다.
“나가셔도 됩니다.”
문이 열렸다.
당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거지 패거리가 있다. 나이가 꽤나 많아 보이는 거지들이 네 명이요 젊은 거지가 하나다.
걸왕 일행이다.
걸왕과 칠결제자인 구명은 누워서 잠에 빠진 지 오래다. 이곳 사천당문에 도착한 지도 어언 이틀째다. 이곳에서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거늘 아직도 갈지혁이 나오지 않는다.
후개는 조용히 책을 꺼내서 읽고 있고, 나머지들은 대부분 졸고 있거나 무엇인가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당문을 보던 육결제자 중 하나인 웅개가 말했다.
“지독해. 이틀 동안 단 한 번도 문이 안 열리다니.”
오대세가라고까지 칭해지는 곳에서 이토록 사람을 받지 않는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물론 쪽문을 통해 생필품이나 약재를 제공하는 사람이 오가기는 했지만 정문을 통해서 오가는 이는 아무도 없다.
책을 읽고 있던 후개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당문은 비밀로 가득하죠. 아무래도 많은 사람의 출입을 허용하게 되면 비밀이 새어 나갈 테니까요.”
“젠장, 어쨌든 방주께서 찾으시는 그놈이 나와야 우리도 돌아갈 수 있는데 말이야.”
어떻게 부를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무슨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주인 걸왕은 이곳에 자신들이 왔음을 당문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정식으로 말해서 들어갈 수도 있거늘 굳이 걸왕은 이곳에서 만나러 온 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웅개는 길게 하품을 했다. 슬슬 점심시간이 되어 가는 게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쉽사리 자리를 뜰 수도 없는 탓에 이틀 동안 먹은 것은 변변치 않은 것들이 고작이다. 짜증이 난다. 어떤 놈인지도 모르는 자 하나 때문에 개방의 고위급들이 이런 신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때였다.
굳게 닫혔던 당문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 둘 중 하나가 바로 걸왕이 말했던 자와 인상착의가 아주 흡사했다.
가려진 얼굴, 그리고 온통 검은색으로 치장한 옷매무새.
웅개는 급히 후개에게 눈짓을 했고 그걸 놓치지 않은 그는 옆에서 잠에 빠져 있던 나머지 인원들을 깨웠다.
걸왕이 눈을 뜨며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자 후개가 가볍게 손가락으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던 걸왕의 눈이 커졌다.
실제로 그가 갈지혁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렇지만 한눈에 그는 사내가 갈지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걸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개는 말없이 갈지혁을 쳐다봤다. 처음 보는 사내다. 갈지혁을 바라보던 후개는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착각이겠지.’
그럴 리가 없다. 거리도 거리거니와 완전히 몸을 숨긴 상태다.
걸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둘은 퇴로를 막아. 나머진 나를 따라와. 놈을 생포한다.”
육결제자 둘이 먼저 움직였고, 나머지 셋은 재빠르게 발을 놀렸다.
이곳은 당문의 지역이다. 당장 갈지혁을 잡아가는 건 문제가 있다. 당문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진 후에 일을 개시할 것이다.
몸을 감춘 걸왕은 건너편에 몸을 감추고 있는 둘을 바라봤다.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한 자들이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같은 판단을 하고 있을 게다.
걸왕은 숨을 죽인 채로 몸을 감췄다.
몸에서 나는 냄새도 이때만큼은 무취로 변해 버린다.
약 반 각 정도가 흐르자 갈지혁과 진검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둘은 가벼이 담소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었다.
걸왕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번개처럼 솟구쳤다.
갑작스럽게 앞을 가로막은 것은 걸왕과 칠결제자인 구명, 그리고 후개였다.
놀라야 당연하거늘 둘은 태연해 보였다. 오히려 퇴로를 막은 두 명의 거지들까지 확인하는 여유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