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12화
진검백이 말했다.
“내가 졌군. 여섯 명일 줄 알았는데.”
그 말은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던 걸왕의 표정을 변하게 만들었다. 옆에서 가만히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후개조차 놀란 듯하다.
“죄송하지만 누구십니까?”
“네가 진검백이냐?”
“그렇습니다. 저의 이름을 묻는 고인의 정체가 궁금하군요.”
“걸왕이다.”
걸왕이라는 말에 진검백은 포권을 취하며 공손히 예를 표시했다.
거지이긴 해도 걸왕이라면 자신의 사부와 비슷한 배분의 인물이다.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더군다나 화산파의 장문인인 진검백의 스승이 칭찬을 하던 자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장문인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어쨌든 이렇게 좋지 않은 일로 만나게 돼서 자네에게나 장문인에게나 미안한 마음뿐이군.”
“어쩐 일로 저희의 앞에 나타나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묻고는 있지만 갈지혁 때문이라는 것 정도를 진검백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이상하다.
갈지혁을 무림에서 좋게 보지 않는 것 정도는 진검백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게 다다. 갈지혁은 그 이상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개방이 움직일 일도 없거니와, 그런 개방의 방주인 걸왕이 갈지혁 하나를 만나러 이렇게 먼 길을 왔다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가 없다.
“갈지혁이라는 놈을 만나러 왔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진검백은 갈지혁을 한 번 보고는 주변을 살폈다.
다들 매듭을 숨기고 있지만 적지 않은 실력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걸왕의 뒤에 있는 젊은 거지는 후개인 것이 분명하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다.
개방 역사상 최고의 기재라고 하거늘 정작 무림에 알려진 건 별로 없다. 베일에 싸인 인물을 이렇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따라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 데려가겠다. 힘을 써서라도 말이야.”
걸왕의 목소리는 자신에 차 있었다.
갈지혁을 강제로 데리고 가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당연한 일이다. 개방의 방주가 왔다. 그리고 후개와 칠결제자, 육결제자가 둘이다. 무림에서 이 다섯이 움직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주목을 받게 될 만한 구성인 것이다. 그런 다섯 명의 무인이 젊은 독인 하나를 잡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걸왕…….”
갈지혁이 중얼거렸다.
걸왕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그의 별호만을 중얼거렸다. 왕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는 자다. 그만큼 실력이 있는 건 분명하다.
갈지혁은 걸왕을 바라봤다. 이렇게 조우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온지도 모른다. 말없이 상대를 응시하던 갈지혁은 등에 매고 있던 깃발을 뽑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섯은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그대로 깃발을 펼칠 뿐 수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펄럭!
펴진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며 허공을 흔들었다. 사방으로 깃발에 적혀 있는 글자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독왕대로행!
갈지혁은 깃발을 그대로 땅에 꽂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깃대의 사분지 일 정도가 땅에 틀어박혔다. 깃발에서 손을 놓은 갈지혁이 말했다.
“당신이 걸왕이라면 난 독왕입니다.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습니다.”
“당신? 독왕? 이유? 푸, 푸하핫!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느냐!”
호쾌하게 웃던 걸왕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변했다. 으르렁거리는 맹수와도 같은 표정으로 그는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라는 호칭보다 독왕이라는 그 한 마디가 더 눈에 거슬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독왕? 독황독립문의 개인 놈이 독왕!
웃기지 말라 이거다.
“네놈…… 시체라도 온전히 건지고 싶다면 지금 내 말을 들어라.”
“방주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진검백은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중재에 나섰다. 걸왕은 장난기가 있긴 하지만 생각이 깊은 자다. 그런 그가 겨우 그 정도의 언사에 이토록 불같이 노할 리가 없다. 무슨 이유가 있음을 진검백은 알아차렸다.
“네놈에 대해 알아봤다. 갈지혁! 네놈은 남만에서 왔다? 틀리느냐?”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 정확하게 볼 순 없지만 갈지혁조차 움찔한 듯했다.
진검백은 절로 머리를 감싸 안고 싶었다. 개방이 알아내 버린 것이다. 갈지혁이 남만에서 왔다는 것을.
그것을 알아냈다면 절로 갈지혁을 독황독립문과 연계시킬 것은 분명하다.
“독황독립문의 개! 네놈을 병신으로 만들어서라도 데려가겠다. 비밀을 부는 것에는 입만 있어도 충분하니까!”
말을 마친 걸왕은 자신의 품에서 막대기 하나를 꺼냈다.
개방의 신물인 타구봉이다.
타구봉을 꺼낸 것을 본 진검백은 기겁을 해 버렸다. 개방 방주가 타구봉을 꺼내 들었다는 소리는 이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의미했다.
걸왕이 싸울 의사를 보이니 자연스럽게 나머지 넷도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어느새 갈지혁은 사방으로 포위당해 버렸다.
걸왕이 말했다.
“진검백 자네는 물러나게. 장문인을 봐서라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
어떻게 해야 할지 진검백은 감을 잡지 못했다.
갈지혁을 도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입장이다.
갈지혁이 잘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거늘 그 또한 그럴 생각은 없는 듯하다.
“간다!”
타구봉이 최단 거리로 갈지혁의 명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빠르고 날카로웠지만 갈지혁은 소매로 타구봉을 밀어내며 오히려 일장을 휘둘렀다.
녹색으로 물들었던 손이 걸왕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치익!
단숨에 옷이 녹아내렸지만 걸왕은 전혀 위축됨이 없었다. 오히려 근접전을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움직였다.
빠른 발로 거리를 벌리는 듯싶더니 바로 가슴까지 다가온 걸왕의 손이 갈지혁의 복부를 노렸다. 그렇지만 갈지혁이 호락호락 당할 리가 없는 건 당연하다.
이번에도 손가락 마디 하나 차이로 피해 낸 갈지혁의 발이 단전을 노렸다.
걸왕의 몸이 공중에서 비틀리며 뒤로 움직였다.
발을 땅에 대는 순간 타구봉에서 빛이 흔들렸다.
퍽!
뻗어져 나온 빛에 명중당한 갈지혁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더니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가슴이 얼얼하다.
“대단하구나. 과연 독황독립문에서 간자로 보낼 만해. 지금 네놈의 무공이 독황독립문의 것인가 보군. 언제부터 독문의 무공이 이토록 강해졌단 말인가.”
그러자,
“독황독립문의 무공이 아닙니다. 나, 독왕 갈지혁의 무공입니다. 독황독립문에서 배운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강해지는 건 자신의 힘입니다.”
갈지혁은 자신을 계속해서 독황독립문과 연결시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독황독립문 하면 좋은 추억보다는 지우고 싶은 악몽들로 가득하다. 언젠가 오히려 복수를 해야 하는 곳이 바로 독황독립문이다.
친구라고 생각했거늘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지운경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음?’
갈지혁의 대답에서 걸왕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뭔가 갈지혁 자신이 독황독립문과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말하면서 이를 가는 모습이 오히려 원한이 있는 듯하기까지 하다.
물론 모르는 일이다.
갈지혁이 진심을 숨기기 위해 이 같은 행동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방심은 금물이지만 걸왕은 다른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이유야 어쨌든 저놈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간단히 입을 열 놈은 아니다. 죽이지 않더라도 몽둥이로 흠씬 패서 데리고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지금 이렇게 손에 들려 있는 타구봉이 있는 것이다.
‘시간을 끌 필요는 없지. 빨리 끝내야겠어.’
걸왕은 뒤에 있는 두 명의 육결제자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는 걸왕 하나가 갈지혁을 노렸지만 이제부터는 다섯이 움직일 것이다.
다섯 명은 하나의 자그마한 진을 만들 것이고, 그것인 마치 타구진과 흡사하다.
물론 엄청난 수의 거지들이 펼치는 타구진에 비해 위력은 월등히 약하지만 한 놈을 상대하는 데 그것은 과하다.
“개진(開陣)!”
자리를 잡아 놓았던 다섯의 거지가 움직였다.
다섯 명의 거지가 움직이는 순간 제아무리 갈지혁이라고 해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걸왕이라면 무림에서 엄청난 배분을 지닌 고수다. 무공 대 무공으로 싸우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더군다나 타구진이다. 비록 인원이 작아 그 위력이 엄청나게 줄었다고 하지만 개방의 자랑 중 하나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타구진의 중심에 선 인물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한다.
몸으로 체험해 본 적은 없지만 소문만으로도 타구진의 위력은 입증된 셈이다.
타구진을 펼치는 데 최소의 인원은 다섯 명이다. 그것은 바로 타구진이 오행을 근본으로 하는 탓이다.
다섯 명의 거지들의 행동이 제 각각으로 변했다.
한 자는 누워서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하나는 구걸을 하는 듯이 넙죽 엎드렸다. 헤헤거리면서 웃으며 다가온다. 술을 취한 듯 비틀거린다.
미치광이처럼 마구 웃으면서 온몸을 긁는다.
진검백은 마른침을 삼켰다.
걸왕이라면 갈지혁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갈지혁이 남만의 독황독립문의 출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니 그것에 대해 파고들려 할 것이다.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항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게 분명하다.
격돌하면 안 된다.
아무리 갈지혁이라고 해도 지금은 이길 수가 없다.
물론 무공이 아닌 독이라면 가능성이 있기도 하다. 무공 대 무공의 싸움이라면 필패지만 갈지혁의 독이라면 분명 승부의 결과를 바꿀 수 있다.
문제는 그게 확실하지 않다는 거다. 개방의 걸왕이라면 여태까지 갈지혁이 싸웠던 상대 중 최고다. 거기다가 옆에 있는 넷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지닌 자들임은 분명하다.
위험한 싸움이다. 이기든 지든 결코 갈지혁에게 좋을 일은 없다.
타구진이 꿈틀거리면서 갈지혁은 머리를 슬슬 움직였다. 주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헤헤거리며 웃던 걸왕의 몸이 움찔하는 순간 양옆에 있던 두 명의 손이 움직였다. 장법이 갈지혁의 위아래를 동시에 노렸다.
민첩했지만 이미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갈지혁에게 피하기 어려운 공격이 아니다. 몸을 비틀면서 공격을 피해 냈지만 문제는 그 후였다.
어느새 땅을 나뒹굴던 육결제자인 웅개가 갈지혁의 머리 위에 있었다.
그의 단련된 다리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퍽!
발이 정확하게 미간을 노렸지만 갈지혁은 손목으로 웅개의 공격을 막아 냈다. 가슴이 비어 버린 순간 구명이 움직였다.
구명은 파옥신장(破玉神掌)이라는 장법으로 갈지혁의 가슴을 노렸다.
이에 질세라 갈지혁 또한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파옥신장을 펼친 구명은 자신이 있었다. 내력이라면 내력, 그리고 갑작스럽게 펼친 장법이 준비했던 파옥신장만큼 위력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것도 일순 손이 녹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니 독장이 분명하다.
‘끝이야!’
손이 맞닿는 순간까지 구명은 자신의 승리를 예감했다.
그런데,
“욱!”
어깨가 떨어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손목이 비틀리며 뒤로 물러서고야 말았다. 아직도 손목이 마치 떨어져 나간 듯이 얼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