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14화
갈지혁을 바라보던 후개의 얼굴 표정이 진지하다. 갈지혁의 일장에 걸왕이 물러났다. 무인으로서 호기가 이는 건 당연하다.
독을 쓰는 자와 이렇게 직접 싸우는 것 또한 처음이다. 독이라는 걸 제대로 접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그리 우습지만도 않다. 독이라고 해서 내공만으로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갈지혁의 것은 그렇지만도 않다.
지금 쓰러진 오결제자가 내공이 약해서 쓰러졌겠는가.
단순히 호흡을 멈춘다 해서 모든 독이 막아지고, 내공이 높다 해서 모든 독이 무용지물이 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재미있어.”
뭐가 그리 재미있단 말인가. 걸왕은 입에 미소를 걸었다.
이제야 싸울 맛이 나는 듯했다. 쉽사리 제압할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자가 예상보다 날뛰니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
잘은 모른다. 이 사내가 어떠한 입장이고, 어떠한 자인지는. 독황독립문의 간자인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이만한 실력이라면 중원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청년고수라는 것이다.
타구봉에 내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 사방에 퍼졌다. 진검백은 꿀꺽 침을 삼켰다. 막으려면 기회는 지금뿐이다. 그렇지만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는 것이 진검백의 입장이다.
‘망할…….’
화산파를 버렸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진검백의 뒤에는 화산파가 있다. 화산파에 미련이 있기 때문에 진검백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낙화검이라는 별호를 얻는 그 순간부터 화산은 그를 버렸고, 그 또한 화산을 버렸다.
그렇지만 은혜라는 게 있다. 화산파에서 입었던 은혜는 진검백에게는 결코 작지 않다. 비록 버렸다 하지만 그 이름에 먹칠을 하거나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입술을 꽉 깨문 진검백은 눈을 감았다.
확신이 서지 않으니 마음이 답답하다. 그런데 갈지혁은 너무나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언제든지 독을 하독할 태세다.
분명 걸왕에게 쓰는 독이라면 극독임은 분명하다. 잘못하다가는 오늘 갈지혁은 중원에 나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걸왕이라면 문제는 커지게 될 게 분명하다.
걸왕은 내기가 집중되는 타구봉을 들어 올렸다. 싸움이 길어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다.
타구봉의 끝에서 강력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갈지혁은 몸을 뒤로 젖혀 피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걸왕의 몸이 그 먼 거리를 단숨에 제압하며 다가왔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다. 타구봉은 갈지혁의 귀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위력이 있었는지 갈지혁의 귀 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갈지혁은 그에 당황하지 않고 주먹을 내질렀다.
너무나 가까웠던 탓에 걸왕 또한 피해 내지 못하고 그대로 주먹을 받았다. 손바닥으로 막아 냈지만 팔목까지 시큰거린다. 이어 떨어지는 갈지혁의 다리는 걸왕의 퇴로를 막았다.
걸왕은 그대로 몸을 데굴데굴 굴리며 공격을 피해 냈다.
나려타곤이다.
무인이라면 수치스럽다고 여겨 꺼리는 방법이지만 개방의 방주인 걸왕은 그러한 짓을 서슴지 않고 행했다.
무인이지만 거지라는 걸 잊지 않는 탓이다.
퇴로를 막았다고 생각했거늘 나려타곤의 수법까지는 쓸 줄은 몰랐는지 갈지혁의 몸이 기우뚱했다. 그 틈을 이용해 걸왕의 손바닥이 갈지혁의 가슴을 세게 후려쳤다.
전에 당한 공격 탓에 다리가 성하지 못한 갈지혁은 그대로 그 공격을 받아야 했다.
갈지혁은 다리에 천근추의 공력을 실었다. 그것은 미친 짓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일이다. 몸을 고정시켰지만 걸왕의 장법의 힘을 모두 받아야 한다.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지만 갈지혁은 목표한 대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날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걸왕은 그대로 갈지혁이 버티고 서 있자 급히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분명 공격이 있을 것이다!’
걸왕은 급히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빠르기로 신법을 펼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갈지혁이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리를 벌리고 숨을 돌릴 때까지 갈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살짝 드러난 눈동자가 핏물로 가득하다.
충격을 입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뭐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온몸을 덮쳤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런 순간에 천근추의 공력을 이용해 하체를 무겁게 할 리가 없다. 힘을 흘려야 할 마당에 오히려 모두 받다니. 그렇지만 그것도 버틴다면 나름대로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상대를 쓰러트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갈지혁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오라! 힘이 없었던 모양이구나!’
손을 들 힘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강룡십팔장 같은 위력적인 장법은 아니지만 지금 걸왕이 급하게 휘두른 일장의 위력은 집채만 한 바위도 두 동강 낼 정도다.
예상보다 강한 충격을 받고 움직이지 못한 게 분명하다.
걸왕은 싸움을 끝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타구봉을 들어 올렸다. 지금 갈지혁은 미동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갈지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녹색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걸왕은 갈지혁이 아직은 공격을 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아 버렸다.
그렇다면……
녹색의 기운이 천천히 공기 중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기운이 걸왕의 주변을 에워싸는 순간 그의 얼굴이 변해 버렸다.
‘다, 당했다!’
갑작스럽게 온몸의 힘이 쭈욱 빠져 버렸다.
그리고 온몸이 타는 듯한 고통과 더불어 엄청난 간지러움이 몰려왔다. 그것은 얼굴 부분에서부터 시작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걸왕은 멍청하지 않다.
‘피, 피다!’
갈지혁에게 정확하게 일장을 날렸을 때 그의 입에서는 분수처럼 피가 쏟아졌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러한 경우는 흔했으니까.
문제는 갈지혁은 독인이었다는 것이다. 걸왕은 몰랐다. 갈지혁의 피가 당문의 무형지독에 못지않은 극독이라는 것을!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몸에 벌레가 가득하고, 그 벌레들이 살점을 모두 떼어 먹는 듯한 느낌이다.
기분이 더럽다. 썩어 들어가는 듯한 고통도 엄청나다.
‘이놈은 지금 날 죽이지 않은 것이다.’
만약 갈지혁이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걸왕은 생각했다.
걸왕은 잘 모른다. 지금 갈지혁의 행동이 어떠한 것인지. 만약 독을 아는 누군가가 봤다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피를 뿌리고, 그 후에 몸 안에 있는 내공의 내기를 이용해 중독시켰다. 그건 그 내기의 성질을 달리하면 다른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독(火毒)이 될 수도 있다. 수독(水毒)이 될 수도 있다. 동물독이 될 수도 있고, 식물독이 될 수도 있다.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대로 간다면 믿을 수 없지만 패배다.
후개가 있고 칠결제자가 하나 오결제자가 하나 있다.
그렇지만 독이라는 것을 사용하는 생소한 자와의 싸움에서는 승리를 자신 할 수 없다. 지금 자신도 이러한 처지에 빠지지 않았는가.
걸왕은 타구봉에 모든 내력을 집중했다.
한 번이다. 단 한 번으로 승부를 지어야 한다. 더 끌었다가는 승산이 없다.
“간…….”
막 달려들려던 걸왕이 멈칫했다.
동시에 이곳에 있는 모든 인물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갈지혁의 등 뒤로 오십에 달하는 인원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검은색 무복. 독기가 일렁이는 눈.
사천당문이다.
당문의 무인들을 보는 순간 걸왕의 표정이 변했다.
그중에 몇 명은 낯이 익다. 당문의 문주인 당려환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 언제나 있다는 네 명의 노인도 있다.
이들이 괜히 당문을 나섰을 리가 없다. 아마도 지금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일 게다.
걸왕은 가슴을 움켜쥔 채로 다가오는 그들을 노려봤다. 독기가 점점 퍼져 이제는 억누르고 있는 것조차 고역이다. 그렇지만 그의 눈동자는 청명했고,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기다.
당려환이 모습을 드러내자 멀쩡한 세 명의 개방도들이 걸왕의 앞을 가로막았다.
후개가 말없이 손짓으로 양쪽을 가리켰다. 알겠다는 듯 구명과 오결제자는 양쪽에 섰다. 언제든지 싸울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만든 것이다.
당려환이 걸왕의 앞에 멈춰 섰다.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클클.”
낮게 웃은 걸왕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날 막겠다는 것인가?”
“죄송합니다만 저 사내는 제 손님입니다. 그것도 당문의 영역 안에서 제 손님에게 손을 휘두르다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난 저놈한테서 반드시 들어야 할 것이 있다.”
“그건 개방의 입장이지요.”
그 말에 걸왕은 푸들푸들 떨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요절을 내 버리고 싶다. 갈지혁은 당문에서 꽤나 오랫동안을 머물렀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으로는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애초부터 갈지혁과 사천당문이 모종의 계약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던 터다. 그런 때에 이렇게 당려환이 나오니 걸왕으로서는 다시금 화가 솟구쳤다.
당문이 독황독립문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문은 억압됐다. 무림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지 못했고 언제나 하대를 받아왔다.
그런 자들의 한을 개방의 방주인 걸왕이 모를 리가 없다.
거지들의 왕인 그이니까 말이다.
‘뭐든지 하게 되지. 영혼을 팔기라도 해서 당문을 일으켜 세우고 싶겠지.’
그런 가정이라면 독황독립문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다. 갈지혁을 잡아서 심문하다가 조금의 단서라도 발견되면 당장에 당문에 손을 내밀 생각이었다.
“당려환…… 물러서게. 끝끝내 우리 개방을 막아서려고 한다면 결코 그 끝이 좋지 않을 게야.”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르신. 아무리 걸왕 어르신이라고 해도 이건 억집니다.”
“무엇이 말이냐!”
“어르신의 말대로 하면 저희 당문은 웃음거리가 됩니다. 바로 앞에서 이뤄진 일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막지 못했다면서 말이지요.”
걸왕은 자신만 입을 다물면 되지 않겠냐고 말하려다 멈췄다.
소문이라는 것이 어떠한지 가장 잘 아는 것이 바로 그가 아니던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지금 본 눈의 수만 해도 열 개가 넘어선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때려죽인다 해도 며칠도 안 돼 중원을 시끄럽게 할 수 있는 것이 소문이라는 것이다.
어떻게든 묻으려 하지만 그럴수록 언젠가 밝혀지는 것이 소문이다.
‘하필이면…….’
당문이 이렇게 빨리 나설 줄 몰랐다. 은밀하게 한다고 움직였는데 용케 뒤를 잡은 모양이다. 아마도 그만큼 갈지혁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소리가 될 게다.
상황을 보고 있던 진검백은 가슴을 쓸었다.
자신이 나서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에 당문이 나타났다.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갈지혁에게 분명 지금의 상황은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걸왕이다. 한눈에 봐도 물러날 것 같지 않다. 원래 이 정도라면 의당 물러서기 마련이거늘 그는 전혀 뒤로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