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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90화 (90/200)

# 90

15화

“이놈에게 꼭 들어야 할 것이 있다. 설령 당문과 피를 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

걸왕은 타구봉을 들어 올렸다. 내기에 쌓인 타구봉은 하얀색 빛무리를 토해 냈다.

“오너라.”

걸왕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실상은 개방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개방도의 숫자는 걸왕까지 해서 넷이다. 그렇지만 상대의 숫자는 오십에 달한다. 그것도 허접한 자들이 아닌 당문의 최정예들일 게다. 지금 상황에서 이긴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걸왕의 마음을 알았는지 세 명의 개방도들은 물러서지 않고 싸울 태세를 취했다.

당려환 또한 슬쩍 뒤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갈지혁을 지켜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이곳에서 당문까지는 걸어도 반 시진조차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앞마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고 당했다고 소문이 난다면 그 날로 웃음거리가 된다.

그럴 생각은 없다. 싸워야 한다면 정당히 싸우고, 깨끗하게 끝내는 것이 낫다.

내기를 운기하던 걸왕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독에 중독된 탓이다. 억지로 독기를 억누르던 내공이 조금 비어 버리면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갈지혁의 독이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통이 깨져 버릴 것만 같다.

온몸은 썩는 것 같은 기분이다. 역겹다. 마치 시체가 된 기분이다. 시체가 되어 온몸이 썩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는 듯하다.

몸은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지만 걸왕은 들어 올린 타구봉을 내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내기를 더욱 덧씌워 그 위력을 강하게 했다.

후개는 그런 걸왕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당장에 격돌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손에 각자 암기나 병기를 든 당문의 무인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넷을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포위를 한 후에 점점 그 포위망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물러서지 마라. 버티다 보면 방법이 있을…….”

걸왕은 다른 손으로 다리를 움켜쥐고 온몸을 마구 긁기 시작했다. 억지로 버티고 있었거늘 도저히 못 참겠다.

“으으…….”

걸왕이 그대로 땅에 드러누운 채로 온몸을 마구 땅에 비비기 시작했다.

“방주님!”

칠결제자인 구명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여태까지 걸왕의 이런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악!”

그런 구명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걸왕은 계속해서 몸을 긁고 비벼대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포위망을 좁혀 오던 당문의 무인들도 멈칫해 버렸다. 무슨 일인지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

‘갈지혁의 독에 중독 당했군. 그런데 저건 무슨 독이지?’

상황을 바라보던 당려환은 갈지혁과 걸왕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의문을 품었다.

독인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저런 위력을 지닌 독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남만의 독에 대해 꽤나 오래 연구했다.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것은 전혀 생소하다.

그때였다.

마구 땅을 나뒹굴던 걸왕이 타구봉으로 자신의 복부를 내려 친 것이다. 엄청난 고통과 함께 입에서는 게거품을 물었다. 그런데 그 고통을 기반으로 하여 걸왕이 일어났다.

“아직…… 아직 안 끝났다.”

혈도다. 혈도를 쳐서 독의 진행을 잠시 막은 듯하다. 그렇지만 문제는 혈관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혈관이 터져 버리면서 생명에까지 지장이 생긴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행동을 한 것은 그것 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

걸왕이 일어서자 다른 세 명의 개방도들 또한 그의 옆에 섰다.

암묵적으로 그들은 상대를 골랐다.

걸왕이 움직였다. 그의 목표는 정면에 의연하게 서 있는 갈지혁이었다.

쒜엑!

“받아라 이놈!”

타구봉이 날아드는 순간 갈지혁의 소매도 움직였다. 무엇인가가 움직이자 걸왕은 타구봉의 방향을 비틀며 날아드는 것을 쳐냈다.

너무나 정직한 공격이다. 잠시 다리를 멈추는 것이면 몰라도 그 이상의 효과는 없다.

그런데 막 날아들던 암기가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다. 타구봉이 애꿎은 허공을 갈랐다.

‘아차!’

무엇인지 모르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걸왕은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시야에 날아들었던 것이 뭔지 보인다. 웬 녹색의 것이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그건 그다지 크지 않은 뱀이다.

캬아!

막 뒤로 물러섰지만 정확하게 무릎을 물렸다.

“으으!”

걸왕의 몸이 무너져 버렸다.

버티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털썩.

걸왕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거지 생활을 하면서 구걸까지 서슴지 않던 그였지만 진심으로 걸왕이 무릎을 꿇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개방도 모두의 얼굴이 변해 버렸다.

패배다. 이건 이길 수가 없다.

평소였다면 이리 쉽게 당했을 걸왕이 아니다. 그렇지만 독에 중독돼 너무 서둘렀고, 갈지혁이 날리는 것을 암기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암기였다면 이렇게 방향을 바꾼다 해도 내기의 흐름을 알아차려 막아 냈을 게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뱀이었고, 그것도 스스로 걸왕의 움직임을 판단하는 영특함까지 보였다. 보통의 뱀이었다면 결코 가능할 리가 없는 행동이다.

갈지혁이 걸왕을 쓰러트렸지만 당려환은 오히려 조급해졌다.

“그를 죽여선 안 돼!”

다른 자도 아닌 구파일방의 하나의 수장을 죽여선 안 된다. 그건 본인을 오히려 위험에 빠트리는 꼴이다.

지금 구파일방이 갈지혁을 놔두는 이유는 하나다. 그가 크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 않는 탓이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구파일방의 이름에 심하게 먹칠도 칠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만약 걸왕이 죽는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중원은 갈지혁을 놔두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당문 또한 위험해진다.

그리고 그걸 갈지혁이 모를 리가 없다.

모든 게 끝났다는 듯이 서 있던 갈지혁이 말했다.

“죽이지 않습니다.”

“그럼 해독이라도 서둘러야 하지 않겠는가!”

당려환의 다급한 어조에 갈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해독은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해독할 시간을 벌었다고 봐야 옳다.

“저 녀석이 문 건 걸왕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제가 하독한 독을 중화시키기 위해서죠.”

“서, 설마…….”

독인인 당려환이다. 갈지혁의 말을 듣는 순간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 차렸다.

갈지혁의 독은 너무나 지독했다. 해독하지 않는다면 당장에 죽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을 만큼 말이다. 해독을 해야 했지만 걸왕은 오히려 독기를 억누르면서 싸움을 계속하려고 했다.

이대로 간다면 걸왕은 죽는다.

그렇게 된다면 아까 당려환이 생각했던 대로 최악의 일이 벌어질 것은 당연했다. 그걸 막기 위해 갈지혁은 사황을 사용했다.

물론 이것이 해독이 되는 건 아니다.

갈지혁의 독은 화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사황의 독은 수기가 가득하다.

서로 반대되는 힘을 가진 독이 한 몸에 있게 되니 몸 안에서 마구 충돌이 일게 된 것이다.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걸왕이 쓰러진 것이고.

오랫동안은 걸왕의 몸이 버티지 못한다. 그리고 곧 두 힘 중 하나가 결국 승기를 잡으며 남은 것을 밀어낼 것이다. 그럼 걸왕은 죽는다.

갈지혁은 걸왕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자 그런 갈지혁의 앞을 누군가가 막았다.

“멈추지그래.”

“비켜.”

“날 죽이고 지나가. 그 전엔 못 지나갈걸.”

후개다. 그가 갈지혁의 길을 막아선 것이다. 갈지혁은 상대가 후개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자들과의 큰 나이 차이가 있다. 그리고 방주의 옆에 붙어 있었다. 그건 거의 확신을 주는 단서들이다.

이 자가 다음 대 개방의 방주가 될 후개라는 걸.

“안 비키면 네가 아니라 개방의 방주가 죽어.”

“네놈이 저렇게 만들어 놓고 말도 많군.”

갈지혁은 이런 상황에서도 흥분을 하지 않고 태연히 말하는 후개의 모습에서 다소 놀라운 감정을 느꼈다.

분명 후개에게 방주는 특별한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태연하다.

아니, 태연하다기보다는 태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내 독에 당한 채로 싸웠다면 방주는 죽었어. 그래서 저 녀석에게 물게끔 했지.”

갈지혁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녹색 뱀이 있다. 사황은 혀를 길게 내민 채로 주변을 살폈다. 마치 무엇인가를 노리는 듯 보였다.

후개는 말없이 사황을 바라봤다.

‘요사스러운 놈!’

뱀인데 뭔가 느낌이 다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생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들게 할 정도다.

사황의 옆에 쓰러져 있는 걸왕을 바라보니 할 말이 없다.

거지의 참 모습을 잊지 말라며 구걸을 한 적도 많은 그이지만 저토록 초라해 보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차가운 땅바닥에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로 쓰러져 있는 걸왕의 모습은 후개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방주님을 죽게 할 수는 없다.’

개방의 인물 중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 자잘한 거라면 몰라도 저런 큰 독은 독인들이 아니면 해독이 불가능하다.

후개가 입술을 깨물었다.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 치료를 해 줘.”

“선심 쓰는 듯이 말하는군.”

“네 말대로야. 방주님이 죽으면 네놈도 죽을 테니까.”

“너한테? 아니면 다른 의미로?”

“두개 다.”

후개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갈지혁이 지금 걸왕을 죽게 한다면 그가 어떻게 될지를.

갈지혁이 피식 웃었다.

“후자는 맞지만 전자는 틀렸어. 넌 날 못 죽이거든.”

말을 마친 갈지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걸왕에게 다가갔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황이 갈지혁의 손을 타고 어깨로 올라갔다.

갈지혁의 손이 걸왕의 몸 이곳저곳을 만졌다.

그의 눈이 일그러졌다.

‘생각보다 심각해.’

혈도를 억지로 비틀어 버리니 독의 진행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 걸왕의 무공 경지가 이 정도가 아니었다면 바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내공심법이 아직 그의 목숨을 지켜 주고 있는 것이다.

갈지혁의 옆에 당려환이 와서 섰다.

“상태가 어떤가?”

“안 좋습니다. 독이 골수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최악이군.”

“방법은 있습니다.”

갈지혁의 말에 당려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갈지혁에게 무슨 방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탓에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아주십시오. 나머진 제가 하지요.”

“그러지.”

당려환은 걸왕을 일으켜 앉히더니 양쪽 어깨를 잡았다. 갈지혁이 뒤에 앉은 채로 조용히 손을 움직였다. 손에 녹색 기운이 모이는가 싶더니 그것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무형의 기운이 사라지면서 갈지혁의 주변에 녹색 기류가 꿈틀거렸다.

주변에 있는 생명을 가진 것들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당려환이 외쳤다.

“다들 물러나!”

당문의 무인들이라면 몰라도 개방도들에게는 버티기 힘든 위력일 거라고 판단해서다. 그렇지만 정작 물러선 것은 당문의 무인들이요, 개방도들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들로는 갈지혁에게 걸왕을 맡기고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공격을 하리라 마음먹고 있는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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