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92화 (92/200)

# 92

17화

‘내가 상대했어야 했거늘…….’

지금에서야 그냥 보낸 것이 후회가 된다. 단리문이라는 자는 바보가 아닐 것이다.

일악천과 싸울지도 모르면서 이곳에 왔다는 건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일악천은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늘이 지독하게 푸르다. 눈이 시리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싶다.

“중원…… 중원이라…….”

잊고 있었던 이름을 일악천은 되뇌고 있다.

* * *

단상에 앉은 지대익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건 오늘 말도 없이 사독문에 들어왔다가 나온 단리문 때문이다. 물론 단리문은 사독문을 들어가고 나갈 권한이 있다. 그렇지만 사독문에 들어가려고 했다면 미리 지대익에게 말했어야 옳다.

아무리 단리문이라고 해도 말이다.

“무슨 이유로 사독문에 들어갔다 온 것인가?”

“아아, 필요한 독초가 있어서 말입니다.”

이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쥐새끼 같은 놈…….’

독초를 구할 것이 있었다면 말을 해서 수하를 시켰을 게다. 아마 다른 일 때문에 사독문 안에 들어갔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일악천과 관계된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사독문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

문제는 단리문이 무슨 목적으로 그곳에 가서 일악천을 만났냐는 거다.

단리문이 도대체 왜…… 좋은 목적은 아닐 게다. 그는 야심이 있는 인물이다. 일악천에게 무엇인가 얻을 게 없었다면 그런 발걸음을 했을 리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단리문을 당장이라도 꿇어앉히고 그것에 대해 캐묻고 싶다.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다.

동맹 관계라고 해도 죽일 수 있는 상대라면 예전에 그렇게 했다.

문제는 독황독립문 모두가 이곳을 둘러싼다 해도 단리문이 도망칠 수 있는 사내인 탓이다. 이런 자를 적으로 둘 수 없다. 확실히 죽일 수 있을 때가 아니라면 이빨을 보여서는 안 된다.

‘오냐. 단화초를 구하면 가장 먼저 네놈을 죽여 주마.’

함께 하기에 단리문은 너무 위험하다.

지대익은 예전부터 단화초의 힘을 얻게 되면 단리문부터 죽이리라 마음먹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이번 일로 하여금 더욱 강해졌다.

속내는 그랬지만 지대익은 웃었다.

“그래, 원하던 독초는 구했는가?”

“없더군요. 헛수고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내게 말한다면 구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못 찾으실 겁니다. 그나저나 일 이야기를 시작하죠.”

단리문은 더 이상 이야기가 길어지는 걸 원치 않는 듯했다.

더욱 파고들고 싶었지만 지대익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곳에 모인 자들은 실질적인 이번 무림정벌에 주요한 임무를 띤 자들이다.

이렇게 모두가 모였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어서다.

지대익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많은 시간이 지났네.”

단리문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무림정벌을 준비한 것이 어언 몇 년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고비도 많이 있었다.

새로운 독들을 만들어 냈고, 많은 자들이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준비해 온 날들이다. 지금 그토록 그리던 그 날이 다가왔다.

“거사를 시작하겠다.”

“오오!”

자리에 앉아 있던 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지대익이 내뱉은 말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는 탓이다. 드디어 시작하려는 것이다.

중원 정벌을 말이다.

“섬서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소 시간이 걸릴 게야.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테니까. 모든 실험은 끝났어. 이제 움직이기만 하면 시작되는 게지.”

독을 퍼트릴 것이다.

사람들은 역병이라고 생각하고 치료법을 찾을 게다. 독이라는 걸 알아도 해독약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중원은 이것을 독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을 게 분명하다.

역병이라고 생각하고 약재를 뒤진다면 평생을 가도 해독약을 만들 수 없다.

“그동안 수고들 했어.”

지대익은 앉아 있는 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이제 이렇게 열악한 환경인 남만에서의 생활을 접어야 할 때가 왔다.

수많은 독이 있지만 사람 살 곳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원에는 좋은 날씨 덕분에 곡물들이 잘 자란다. 그곳을 먹게 된다면…… 식량 걱정 같은 건 사라진다.

“오래 참았으니 이제 자네들의 이빨을 보일 때도 됐지. 이미 독을 뿌릴 자들도 다 정해졌네. 아마 며칠 후부터 중원에 병이 퍼지기 시작할 게야.”

이미 이 자리에 오기 전에 중원 곳곳에 심어둔 간자들에게 명령을 내려놨다. 모든 실험을 마친 독이 중원의 곳곳에 뿌려질 것이다. 해독약도 만들 수 없으니 중원 무림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말 것이다.

해독약은 독황독립문에서만 만들 수 있다. 그러한 능력을 지닌 자가 독황독립문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해독약을 구하기 위해서 중원은 독황독립문에게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고생 많았네, 단리문. 자네 덕분에 이런 계획도 시작할 수 있었던 걸세.”

“천만에 말씀입니다. 다 지대익 당신의 능력 덕분이지요.”

단리문은 웃으며 대답했다.

둘은 서로를 보며 웃었지만 속내는 겉과 전혀 달랐다. 서로를 견제하고 언제든 죽일 수 있다면 죽이려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웃는다. 서로가 아직은 필요한 상황이니까.

“그럼…… 자네들의 노고를 위하는 겸해서 오늘 한 잔 하지.”

지대익의 손짓에 준비되었던 술과 안주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모두의 얼굴에는 자신이 가득했다. 결코 이 일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는 듯하다.

그만큼 확신이 있다는 소리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이 독은.

당장이라도 무림이 발아래에 들어온 것처럼 그들은 웃었다.

자리가 시끄러워지는 듯하자 단리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들과 함께하고는 있지만 이런 자리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모두가 단리문이 일어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독황독립문의 수뇌부들 또한 단리문은 어려웠던 것이다.

막 단리문이 걸어나가는데 누군가가 그의 뒤를 따라 걸어나왔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나와서도 뒤를 따라오자 단리문은 고개를 돌렸다.

지운경이다. 다음 대 독황독립문의 가주가 될 그가 단리문의 뒤에 있다.

“무슨 일입니까?”

“아아. 모처럼 할아버님께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셨는데 너무 건방져 보여서.”

“당신 할아버지도 절 건드리지 않는 건 잘 알 텐데요? 지금 당신이 저한테 시비를 거는 겁니까?”

말투는 공손하지만 얼굴 표정은 그렇지 않다.

단리문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지운경에게 존대를 하는 건 그의 할아버지인 지대익 탓이다.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이 다음 대 가주로 지운경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모두가 그에게는 공손한 말투를 사용했고, 귀찮은 게 싫었던 단리문 또한 그에게 반쯤 존대를 했던 것이다.

결코 지운경에게 굴복하거나 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너 눈 밖에 났어. 조심하는 게 좋아.”

“무섭군요. 그런데 당신들 중 누가 절 건드리겠다는 겁니까? 설마 당신이?”

우습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이다. 지운경이 강하긴 하지만 단리문에 비한다면 햇병아리에 불과하다.

문제는 지운경은 단리문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 지운경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리문이라는 자는 아무런 것도 가진 게 없다. 그의 뒤를 받쳐주는 배경도 없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조심해서 행동해. 그리고 갈지혁은 내가 죽여. 네가 끼어들지 마.”

“죽일 수 있다면 그리 해 보든지. 하지만 장담하건대 지금 싸우면 당신이 죽을걸.”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죽고 싶어?”

죽이겠다는 협박에도 단리문은 그저 웃음만 흘렸다.

애송이다. 할아버지는 그래도 사람 볼 줄은 알았다. 그랬기에 단리문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손자인 지운경은 그걸 모른다.

단리문은 몸을 돌려서 그대로 걸었다. 뒤에서 지운경이 더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깨끗이 무시했다.

어차피 지운경은 그에게 신경 쓸 대상이 아니다.

* * *

당려환이 안내한 곳은 그다지 크지 않은 곳이다. 사람의 흔적은 없었고, 주변에 인가도 없다. 그 건물 주변을 당문의 무인들이 둘러쌌다.

건물 안에는 몇 명의 인물만이 자리했다. 개방의 인물로는 지금 중독되어 버린 걸왕과 후개뿐이다. 당문에서는 사노와 당려환이 있고 갈지혁과 진검백 또한 자리했다.

도합 아홉에 달하는 인물들이 모두 안에 자리하자 방은 꽤나 찬 듯한 느낌을 줬다.

자리에 누워 있는 걸왕은 제하고는 모두 자리에 앉아 있다. 중앙에 있는 거대한 상, 그리고 침상 두 개가 이곳에 있는 전부다.

후개는 말없이 걸왕과 자리에 앉은 다른 인물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기분이 묘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상태다.

이곳에 이렇게 마주할 인연이 아닌 자들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갈지혁을 잡고 개방으로 돌아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누워 있는 것은 갈지혁이 아니라 걸왕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걸왕이 저런 햇병아리에게 당한 단 말인가.

다행인 것은 그토록 죽을 듯이 숨을 허덕이던 걸왕의 호흡이 고르게 변했다는 거다. 그 당시엔 막으려 했지만 갈지혁이 손을 쓴 것이 효용이 있었던 모양이다.

후개 또한 모르는 바가 아니다. 갈지혁은 걸왕을 죽일 수 없는 입장이다.

만약 죽였다면 갈지혁이 죽는다.

후개가 말없이 갈지혁을 노려봤다. 상태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기긴 했지만 갈지혁 또한 많은 피를 쏟았고, 걸왕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공력을 쏟았다.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다 하지만 핏기가 싹 가신 얼굴색까지 모두 가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방주께서는 언제쯤이나 일어날 수 있소?”

“이 친구한테 물어봐.”

당려환이 갈지혁을 가리키자 후개가 몸을 돌려 그와 마주하며 물었다.

“언제쯤 깨어나시나?”

“오래 안 걸려. 거동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곧 깨어날 거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신을 차리는 데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걸왕이라면 곧 깨어날 수 있을 게다. 지금부터 벌써 몸을 꿈틀거리는 걸 보니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는 듯했다.

“진검백. 자네가 왜 이런 자하고 함께 하고 있지? 비록 지금은 낙화검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만 평생 그 모양으로 살게냐?”

갑작스러운 후개의 질문에 진검백은 갈지혁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만난 지 얼마나 됐고, 알아도 뭘 안단 말인가. 그렇게 쉽게 남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후개의 모습에 진검백은 웃음이 나는 듯했다.

“난 지금 갈지혁이라는 사내를 감시하고 있는 거라네. 그리고 난 지금 내 삶에 만족한다네. 자네가 이래저래 이야기할 만큼 우습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낙화검이라는 별호를 받게 되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겐가? 화산파의 매화검수면서 장문인 후보까지 거론되었던 진검백이 말이야.”

후개는 진검백을 모른다.

그랬기에 그는 진검백을 은근히 떠보는 중이었던 것이다. 만약 진검백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안다면 이런 말을 할 턱이 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