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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93화 (93/200)

# 93

18화

“화산파는 화산파. 진검백은 진검백. 내 자체가 화산파가 아니네. 그러니 그런 서투른 도발은 그만두는 게 어떤가?”

“자신에게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힘들 게야. 자넨 이제 예전처럼 강하지 않아.”

“킥킥.”

진검백이 웃었다.

후개가 도발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물론 후개의 말이 전부 거짓은 아니다. 후개 또한 진검백이 예전보다 훨씬 약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다.

검을 잡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당연하다. 마음속에 오히려 하나의 잘 다듬어진 검을 만들기 위해 그토록 노력한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끽 해야 화산파의 장문인 정도에 불과하다.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 또한 자네의 신경을 건드릴 수밖에 없네.

예를 들어 지금 자네 몸에서 썩은 악취가 난다는 거 같은 걸로 말이야.”

“내 말을 그리 들었다면 그만하지. 어차피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니까.”

말을 마친 후개와 진검백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차피 걸왕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가 깨어난 후에야 앞으로의 모든 것이 정해진다.

후개와 진검백의 말이 끝나자 방안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싸한 분위기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당려환과 사노뿐이다. 그 다섯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걸왕을 바라보던 후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가볍게 꿈틀거리던 걸왕의 눈자위가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눈이 떠지며 걸왕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주님!”

후개의 외침에 막 정신을 차린 걸왕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모두를 훑어본 후 걸왕은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참의 침묵을 지키던 그의 입이 열렸다.

“내가 졌군…….”

믿어지지 않지만 걸왕은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되어 갈지혁에게 패하긴 했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 물고 늘어질 수는 없다. 실력 면에서 갈지혁이 자신보다 위였기에 패한 것이다.

“기대고 싶다.”

걸왕의 말에 후개는 급히 그를 부축해 침상에 일으켜 앉혔다. 인상을 찡그렸던 그는 당려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문의 가주에게 신세를 지는 듯하군.”

“별것도 아닌데 신세라고 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르신.”

걸왕은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여 봤다. 제대로 움직이지가 않는다. 아직도 독성이 몸에서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몸이 자기 것 같지가 않다.

“낄낄. 인정하지, 내가졌어. 네가 맘먹었다면 분명 난 지금쯤 죽었겠지. 그 정도의 독기가 저절로 빠져나가지는 않았을 테고.”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와중에서도 갈지혁의 힘이 몸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던 것은 알고 있다. 그 힘은 몸 안에서 터지고 있던 두 개의 독기를 한 번에 몰아냈다.

만약 그 힘이 없었다면 지금 걸왕은 죽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물을 수가 없군.”

패배한 자가 무엇을 묻는단 말인가. 목숨을 살려 줘서 감사하다고나 해야 할까?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걸왕이 눈을 감았다.

그때 갈지혁이 말했다.

“간단한 것 정도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음?”

예상외의 반응에 걸왕은 놀란 듯했다. 갈지혁이 걸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독황독립문에서 독공을 배웠다는 것을. 그것 때문에 중원에서 이 같은 일을 당하지 않고 싶어 숨겼던 것뿐입니다. 제가 숨기려고 했던 건 그것입니다.”

“……몇 가지만 물어도 되겠는가?”

“물어보십시오.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해 드리죠.”

강제로 물어보려고만 했지 이렇게 대화를 하게 될 거라고 걸왕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거짓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모든 말을 다 믿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 짧은 시간 안에 여러 가지를 알아낼 수도 있다.

“정말 독왕이 되려고 온 것인가?”

“예.”

“독황독립문의 문도라면…… 중원에 좋은 감정을 지니지 않았을 텐데.”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몸을 뒤로 돌리더니 옷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걸왕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었다.

“엇!”

파문.

찍혀 있는 두 글자는 흉측했지만 그 모양만큼은 확실했다.

파문이라는 두 글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독황독립문에게 아무 미련도 없습니다. 한 번도 그곳이 제 사문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저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분은 완전히 다른 분이십니다.”

물론 간자를 내보내면서 만약의 일을 대비해 이같이 파문의 낙인을 찍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건 지금 알 수 없다.

잠시 침묵하던 걸왕이 말했다.

“자네의 스승이…….”

“죄송하지만 그건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독왕이 되기 전까지는 함구할 생각입니다.”

“그런가?”

걸왕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갈지혁은 독황독립문에서 파문당한 자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라도 만약 갈지혁의 말이 진실이라면 오히려 든든한 조력자가 하나 생긴 게 아닌가. 적어도 그는 독황독립문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일 테니까.

독황독립문이 두려운 건 그들의 독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것이 베일에 감쳐져 있는 탓이다.

독도 그것의 일부다. 독에 대해서도 알려져 있지 않으니 해독약도 제대로 만들 수가 없다. 지금 당장에 독황독립문이 움직인다 해도 무림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갈지혁은 걸왕을 쓰러트릴 정도의 독의 고수다. 그리고 더불어 독황독립문의 독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일 게다.

갈지혁에 대한 걸왕의 생각이 변했다.

* * *

모든 게 변한다.

사람에 대한 생각도, 그리고 자연의 모습도.

쏴아아!

미칠 듯한 비다. 이 비가 끝나면 아마도 가을에 접어들 게다. 갈지혁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쌀쌀한 날씨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갈지혁보다 사황이 걱정이다. 갈지혁은 그나마 추운 날씨에 버티기도 하지 사황은 아마 옷 안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남만의 더위에 너무 익숙한 탓이다. 사황은 슬슬 쌀쌀해지는 날씨가 맘에 들지 않는 듯하다. 애꿎게 먹을 거에 심술을 부리는가 하면 진검백에게도 연신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곤 한다.

당문의 무인들은 모두 거처로 돌아갔다. 이곳에 남아 있는 건 갈지혁과 진검백, 그리고 당문 사노 중 삼노 한 명, 개방의 인물들뿐이다.

삼노는 의술에 뛰어났기에 감시 겸 겸사겸사 이곳에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아직 걸왕이 낫지 않아 이곳에 머물고 있다.

창가 주변에 있는 갈지혁에게 개방의 칠결제자인 구명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는 헛기침을 해서 그의 시선을 끌더니 말했다.

“흠흠, 식사는…….”

“곧 가져다준 겁니다.”

갈지혁은 대충 대답했다. 며칠 간 이곳에서 지내며 이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개방의 인물은 총 다섯 명. 갈지혁에게 당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도 실상은 큰 부상이 아니었다. 가벼운 독에 중독되어 그 같은 모습을 보였던 것뿐이다.

걸왕은 제하고는 모두 거동에 불편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개방의 인물들의 행동이 크게 변한 게 사실이다. 걸왕의 명령 때문에 그들은 갈지혁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후개는 침묵했다. 갈지혁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면서 수상한 행동을 하지 않는지 감시하고 있다.

“질리게도 내리는군.”

오결제자 중 하나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며칠 동안 비가 계속해서 내린다. 이런 날씨에는 뭔가 기분이 좋지 않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날이다.

걸왕은 침상에 앉은 채로 무엇인가 상념에 잠겨 있는 듯하다.

갈지혁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이 많다. 그가 어떠한 속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탓이다. 모두 믿기에는 다소 위험이 따른다.

고민했지만 걸왕은 결심을 내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 좀 하지.”

“저와 말입니까?”

“그래. 할 말이 있어. 며칠 고민했지만 해야 될 것 같군.”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곁으로 다가오자 잠시 뜸을 들이던 걸왕이 말했다.

“자네를 만나러 오는 길에 수상한 감시자들이 붙었지. 아마 자네와 만나는 걸 꺼리는 듯하더군.”

“누가 말입니까?”

“내가 묻고 싶었지. 뭐 생각나는 것 있나?”

걸왕의 질문에 갈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무림이 갈지혁을 주목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토록 뒤를 쫓을 만한 자들은 없다. 갈지혁의 대답을 예상이라도 한 듯 걸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에 수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

“내가 보기엔 독황독립문의 속셈이야.”

“지대익이 움직인다는 소리입니까?”

“확실한 건 아니야. 천산 마교(魔敎)나 서역에 있는 포탈랍궁(布達拉宮)의 움직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내 추측은 그래.”

개방의 방주나 되는 인물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개방에서 나온 정보를 규합해서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일 게다.

열에 여덟, 아홉은 맞는다.

독황독립문이라고 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간다.

그곳에 홀로 두고 온 어머니. 살아 계신지도 모르지만 독왕이 되기 전까지는 찾아 뵐 수도 없다. 그리고 지운경. 유일한 지기라고 생각했거늘 단숨에 그런 믿음을 부숴 버렸던 놈이다.

마지막으로 스승인 일악천.

그는 잘 지내고 있을까? 못난 제자 놈 하나 때문에 많은 걸 희생했다. 아무것도 주지 못할 놈인데 모든 걸 줬다.

“벌써부터 무림에 수상한 세력들이 움직이고 있어. 그런데 무림은 그걸 몰라. 내가 이야기를 해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고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보자고만 하지.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그곳에 있을 때 무엇인가 들은 것 없는가?”

“전 그곳에서 오래전에 감옥 같은 곳에 갇혀서 최근 일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정식으로 제자로 있을 때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대익은 야망이 있는 잡니다. 그건 확실하죠.”

“지대익을 아는가?”

걸왕은 다소 놀란 듯했다.

갈지혁의 실력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라면 어린 나이였을 게다.

그런 그가 마치 지대익을 아는 듯이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야욕이 있는 자더군요.”

“실력은?”

“저보다 위였습니다. 당시엔.”

“당시라…… 그렇다면 지금은 다르단 소린가?”

“지지는 않습니다. 잘하면 양패구상(兩敗俱傷).”

“둘이 같이 죽는다는 건가…….”

잘하면 양패구상이라는 소리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소리다. 문제는 지대익 하나가 아니다. 독황독립문 전체가 움직일 텐데 그 독을 막아 낼 만한 고수가 무림에는 너무 부족하다. 이대로 당한다면 무림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지금 독황독립문의 독을 막기 위해서는 두 군데의 힘이 필요하다.

무림의 멸시를 받는 사천당문. 그리고 독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 문파.

약선문!

약선문의 문주 약선이 사라졌다. 지금 그곳에서 최고의 힘을 지닌 자는 약선의 손녀인 운하연이다.

그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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