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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94화 (94/200)

# 94

19화

‘약선문에 연락을 취해야겠군. 그녀가 도와준다면 많은 힘이 될 게야.’

약선문은 독에 대해 잘 안다. 오랫동안 독과 싸워온 가문이 아니던가.

약선이 있었다면 좋겠지만 그는 지금 개방에서도 찾지 못할 정도로 종적을 감췄다. 천하에 거지가 없는 곳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약선의 모습이 사라진 지 꽤 오래됐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고 걸왕은 생각하고 있다.

걸왕은 모른다. 운하연이 갈지혁을 만나기 위해 사천으로 향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사천에 도착했다는 것도.

그녀에 대해 알아본다면 금방 알아낼 일이지만 현재 걸왕은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 그녀는 갈지혁을 찾아 사천당문으로 향하고 있다.

* * *

운하연은 옆에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다소 나이가 든 사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지도를 편 그는 계속해서 갸우뚱거렸다. 그의 입에서 침체된 듯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아닌가?”

“풍 아저씨…….”

“하하하! …… 죄송합니다 아가씨.”

풍객이라고 불리는 그는 운하연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천이다. 그렇지만 둘은 계속해서 당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몇 번이나 길을 잃어버렸다. 풍객의 안내를 따라 움직이던 운하연이 길이 틀어졌다는 것을 안 건 얼마 전이었다. 그때부터 풍객을 닦달했고 지금에야 어느 정도 맞는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에휴.”

“이상하다 분명 이곳이 맞을 텐데…….”

한숨짓는 운하연을 보며 풍객은 지도를 다시 한 번 살폈다. 분명 이 근방에 사천당문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길을 어디선가부터 벗어났는지 사천당문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해서 주변에 몇 개의 집들이 보일 뿐이다.

“아가씨, 가서 물어볼까요?”

“그게 낫겠어요. 아저씨를 믿을 바엔.”

운하연의 말에는 가시가 있다. 그렇지만 지은 죄가 있는 탓에 풍객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운하연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집에 찾아가 사천당문의 위치를 물으려는 게다. 막 집에 도착한 그는 조용히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계십니까?”

대답이 없다.

풍객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로 옆에 있는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마찬가지다. 그리고 안에 누군가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새 다가온 운하연이 그의 옆에 섰다.

“왜 그래요?”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주변에 흔적들이 있는 걸 보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것 같은데…….”

“혹시?”

풍객의 얼굴 표정이 변하는 순간 운하연의 머릿속에도 번개 같이 생각 하나가 스쳐 갔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 많은 흔적에 어울리지 않게 주변이 너무 고요하다.

땅바닥에 밟혀져 있는 발자국 수는 셀 수도 없다. 그것도 대부분의 것이 다른 것을 보아 몇십에 달하는 자들이 오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역병이 이곳까지 왔을 리는…….’

생각은 그랬지만 몸은 이미 반응했다. 그녀는 풍객에게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요.”

“이미 돌려봤습니다. 잠겼습니다.”

“부숴요.”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운하연의 명에 그대로 풍객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쓰러졌다. 그렇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선 운하연은 침상에 다가가 살폈다.

무엇인가 흔적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나 깨끗하다. 마치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방 안을 살폈지만 병의 흔적은 없다.

“역병의 흔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이상합니다.”

“살펴보죠.”

운하연은 걸어 나와 옆집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그곳의 문을 부수고 또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그 집 또한 아무런 흔적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게 문을 부수며 안을 뒤졌지만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자 풍객이 말했다.

“아가씨,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만 가는 게…….”

“아직 세 군데나 남았어요. 다 뒤져보고 가죠.”

풍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하연의 마음을 아는 탓이다. 이곳까지 지금 역병이 퍼졌다면 큰일이다.

벌써 사천까지 병이 퍼진다면 이미 중원은 끝이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이러는 게다.

막 다음 집 앞에 선 풍객은 숨을 크게 쉬었다.

이번 집에도 아무런 것도 없을 것이다. 역병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 일이 있어 사람들이 대피한 것이 분명하다.

풍객은 발로 그대로 문을 걷어찼다.

방문이 날아갔다. 그리고 순간,

“어, 얼래?”

풍객의 눈에 누군가가 보였고, 그때 이미 그의 목에는 두 자루의 검이 닿아 있었다.

웬 노인이 침상에 누워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거지로 보이는 자들이 몇 보인다. 그리고 왠지 낯이 익은 자도 있다.

“너, 넌!”

풍객이 손을 들어 올리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를 가리켰다. 순간 검을 들고 있던 자 중 하나가 발로 풍객의 배를 걷어찼다.

“켁켁!”

“허튼 행동하지 마. 죽여 버린다.”

“이, 이봐 너흰 뭐야?”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누군데 갑자기 행패냐?”

구린내가 나는 걸 보니 거지인 게 분명하다. 아니, 그걸 떠나 행색만 봐도 딱 알 수 있다. 문제는 눈앞에 있는 낯이 익은 사내다.

“킥킥, 만났군 만났어.”

“자네 저자를 아는가?”

누워 있던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얼굴을 가린 사내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는 뜻이다.

“그 검들 치워요.”

그때 운하연이 풍객의 뒤에서 나타나며 말했다. 그녀의 손이 양쪽으로 향해 있다. 만약 풍객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한다면 당장이라도 손을 쓰겠다는 태세다.

운하연을 보자 이번엔 침상에 누워 있던 노인이 놀랐다.

“약선문의 소문주 아닌가?”

“어르신은…….”

운하연 또한 놀란 눈을 했다. 자신의 정체를 말하는 자를 바라본 그녀는 노인이 개방의 왕인 걸왕인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그 침상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내.

그토록 찾아다녔다. 운하연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을 지닌 사내.

“찾았네요.”

운하연이 미소를 지으며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운하연은 계속해서 미소를 지었다.

“매번 만날 때마다 인사가 같네요. 오랜……만이죠? 갈지혁.”

“아아. 그래. 오랜만이네.”

갈지혁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방에 두 명의 인원이 늘어 버렸다.

그렇지만 분위기는 좋지 않다. 둘 모두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인 탓이다. 개방의 입장에서 둘의 등장은 그리 나쁠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운하연의 등장은 그녀를 찾고 있던 개방의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방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갈지혁과 운하연이 마주 앉았다. 그렇지만 둘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다.

걸왕은 잔기침을 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흠흠, 아주 옛날에 본 듯한데 벌써 이렇게 나이를 먹었구나.”

“그게 벌써 오 년은 더 된 이야기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가 웃었다. 파란색 눈동자가 너무나 신비하다.

색목인의 피가 섞인 그녀의 외모는 뭔가 중원의 여인들과는 달리 이질적이다.

“마침 찾고 있었는데 잘 왔어. 약선 어르신의 소식은 아직 없을 테고…….”

“예. 아직도 찾을 것을 찾지 못하신 것 같아요.”

“걱정이겠군.”

“그렇지 않아요. 강하신 분이니까. 몸 건강히 잘 돌아오실 거예요.”

“물론이지. 약선 어르신이라면 분명 그럴 게지.”

걸왕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걸왕은 곧 표정을 거뒀다. 지금 이렇게 만난 김에 그녀에게 부탁을 하려는 것이다. 개방처럼 약선문 또한 중원의 안위를 걱정하는 문파다. 분명 도와줄 게다.

“부탁이 있어. 약선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내가 찾아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자네가 찾아왔군.”

“부탁이요? 걸왕께서요?”

“지금 중원을 향해 독황독립문이 움직이려는 것 같아. 무림은 너무 변했어. 독은 분명 위험한 것이거늘 너무 우습게 보고 있어. 독황독립문이 움직이면 약선문이 움직여 줬으면 하네. 독황독립문의 독을 막을 수 있는 곳은 당문과 약선문뿐이야.”

운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의 중원은 독에 대해 속수무책이다. 그저 강한 내성만 믿고 싸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평범한 독을 쓰는 자라면 어떻게 될지 몰라도 독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이 쓰는 독은 웬만한 자가 아니고는 스스로 해독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다. 그런 독을 쓰는 자들 몇 명만으로도 무림을 시끄럽게 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 자들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온다면?

무림의 앞날은 풍전등화가 되어 버린다.

후개는 말없이 걸왕의 옆에 서서 그 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운하연이 슬쩍 후개를 살폈다.

지금 개방의 삼십 년을 걸왕이 이끌었다면 앞으로의 삼십 년을 이끌 후개다. 한 번쯤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눈이 깊어. 어리석지 않을 것이고, 쉽게 흥분하는 성격도 아닐 거야. 개방…… 앞으로 삼십 년도 성세를 이루겠어.’

운하연은 걸왕의 말에 답했다.

“독황독립문이든 어디든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있으면 저희는 갈 겁니다. 걸왕 어르신이 부탁하지 않으셔도 그럴 것이었습니다. 병자가 있는 곳엔 저희가 있어요. 그게 저희 약선문이죠.”

“후후! 든든하군. 역시 약선문이야.”

걸왕은 예상했던 일이긴 해도 확답을 듣자 기분이 좋아 웃음을 터트렸다.

부탁하려고 했던 것이 끝나자 걸왕은 운하연이 이곳에 온 목적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갈지혁을 안다.

“흠…… 갈지혁과 아는 사이 같던데. 혹 예전에 약선문의 섬서 지부를 건드렸을 때 만난 건가?”

“그때 보기도 했지만 그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지요. 먼 곳에서요.”

말을 하면서 운하연은 갈지혁을 힐끔 바라봤다.

그녀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갈지혁이 남만에서 왔다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이렇게 애매하게 대답한 것이다.

“그럼 이곳에는 사천당문에 들리려고 온 것인가?”

“아뇨. 갈지혁을 만나러 왔는데 운이 좋았네요. 그대로 당문에 갔으면 만나지 못했겠어요. 풍 아저씨가 길을 잃은 게 오히려 복이 되어 버렸네요.”

화가 복이 된다고 했던가.

만약 바로 당문을 찾아갔다면 그 둘은 갈지혁을 만날 수 없었을 게다. 풍객이 길을 잃어 헤맨 탓에 오히려 그 둘은 갈지혁을 만나게 됐다.

기이한 우연이다.

“갈지혁을? 무슨 연유로?”

“개인적인 일이라서 다소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중원을 위해서 하는 거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역병이 퍼지고 있다는 건 걸왕 또한 안다.

그렇지만 운하연은 갈지혁의 입장을 생각해서 일부러 말끝을 흐린 게다. 어차피 떠들고 다닐 이야깃거리도 아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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