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20화
운하연은 갈지혁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을 피하고 있던 갈지혁은 계속해서 자신을 바라보자 짜증 난다는 투로 말했다.
“귀찮게 하는군. 몇 번이나 말했어? 모른다. 그리고 알아도 가르쳐 줄 의향도 없어. 그러니 제발 그만 좀 내 앞에 나타났으면 하는데?”
“이곳에서 말하는 건 조금 그렇지 않아요? 밖에 나가서 둘이 잠시 이야기 해 보죠.”
갈지혁은 걸왕을 힐끔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 그도 단화초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중원에서 금기시되는 말 중 하나니까.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지.”
운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따라 나왔다. 걸왕은 둘의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걸왕이 옆에 있는 후개와 걸인들에게 말했다.
“억지로 엿듣지 마라. 그건 정파인다운 행동이 아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검백만이 대충 상황을 알기에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잠을 청했다.
갈지혁은 건물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자 멈춰 섰다.
주변은 나무로 가득하다. 한들거리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린다. 이제는 완연한가을이다. 날씨도 쌀쌀하다.
갈지혁의 옆에 선 운하연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 제가 당신을 괴롭히는 것 같아 미안해요. 이건 진심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하는 절 조금만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전…… 누군가가 죽는 걸 눈 뜨고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몇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말이에요.”
역병이 돌면 그것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다.
그것이 어디까지 퍼질지 모른다. 중원 전체로 퍼져도 막을 수가 없다. 그럼 모두 죽는 것이다.
치료할 방법은 아는데 약재를 만들 수가 없어 죽는다면 더 억울하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운하연에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계속해서 갈지혁을 찾아오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만큼 그것에 모든 걸 걸었기에.
“당신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어요. 어머니가 죽을 것이고, 아버지가 죽을 거예요. 아이나 노인도 피해 가지 않죠. 운 좋게 살아난 사람들은 외톨이가 될 거고요. 그건…… 보고 싶지 않아요.”
진지하다.
그녀의 눈빛을 보면 그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갈지혁 또한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화초를 무작정 내줄 수도 없는 것이다.
아직 역병은 퍼지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생길 수도 있고, 퍼지지 않고 수그러들 수도 있다.
“……너에게 말하지 못하지만 나 또한 사정이 있다. 그래서 주지 못하는 거다.”
“역시 알고 있군요.”
“그래. 알지. 그건 너도 알고 있었을 테고. 미안하지만…… 아직은 못 준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줄 수 있는데요?
“내가…… 독왕이 된다면. 그땐 가능하겠지.”
“독왕…….”
운하연이 중얼거렸다.
갈지혁의 꿈을 그녀 또한 알고 있다. 독왕대로행이라는 말도 안 되는 깃발 하나로 섬서를 시끄럽게 했던 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가능하지 않다. 독왕은 결코 불가능하다. 차라리 지금부터 검을 잡고 검왕이 되겠다고 이야기하는 게 더 가능성 있는 말일 게다.
조용히 서서 운하연을 바라보던 갈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급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다. 바람이 끊긴다. 정말 미세한 느낌이지만 무엇인가가 갑자기 바람을 가로막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모른다.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운 고수들에게는 그런 사소한 것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다.
갈지혁의 표정이 변하자 운하연 또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 또한 변했다.
운하연은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엇인가 주변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은 확실하다.
천천히 나무들 틈에서 한 명씩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문은 아니다. 그들이었다면 손에 저 같이 병기를 들고 나타났을 리가 없다.
맨 처음 나타난 사내는 삼십 대 정도로 되어 보였다. 그는 검을 든 채로 빙긋 웃었다.
“킥킥, 걸왕에 약선문 소문주…… 죽일 놈들은 다 모였군.”
갈지혁은 뒤를 살폈다.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갈지혁과 운하연을 둘러쌌다. 문제는 이곳만이 아니다. 약간 떨어져 있는 거처에는 이곳보다 더 많은 인원이 둘러 싸고 있었다.
그곳에는 걸왕이 있다. 개방이 있으며 진검백이 있다.
이 많은 인원이 가까이 접근하는데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수들이다. 하나가 일류고수 이상의 수준이라는 소리다.
갈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흰…… 누구냐?”
“아아, 몰라도 돼. 갈지혁. 운이 좋아. 여기서 딱 하나 살아서 가게 됐는데 그게 네가 됐어. 축하해.”
사내는 능글맞게 대답했다.
그들은 모두 죽이려고 나타났다. 갈지혁만 빼고 말이다.
이들은 걸왕과 운하연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
갈지혁이 운하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다지 좋은 인연은 아니지만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빨리 끝내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안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건 세넷밖에 되지 않는다.
“덤벼.”
“넌 안 죽여. 그러니 물러나.”
“떠들지 말고 어서 덤벼. 안에도 도와줘야 하거든.”
그 말이 우두머리로 보이는 괴한의 신경을 건드렸다.
“지금 네 목숨이나 걱정해야지 남 걱정할 땐가?”
“아, 시끄럽다고. 반 각이야. 너희를 끝내는 건 그걸로 충분해.”
“미친놈…….”
우두머리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우두머리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가 옆에 있는 자들에게 가볍게 신호를 보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는 꽤나 호남형이다. 어딜 가나 여인들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말이다. 삼십 대로 보이지만 여인 꽤나 따를 법한 얼굴이다.
그는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갈지혁을 보는 사내의 눈빛이 곱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갈지혁이 자신을 반 각 안에 끝낸다고 했으니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분의 명이 없었다면 죽였을 놈이다. 다만 그분이 살려 두라고 해서 놔두는 것뿐이다. 그런 놈이 자신에게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으니 어찌 화나지 않겠는가.
무인이라면 호승심이 이는 건 당연하다. 마음 같아선 갈지혁 또한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의 명을 어긴다면……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한다.
뿌득!
사내가 이를 갈며 검을 들어 올렸다.
“운이 좋아. 네놈은. 내 앞에서 그렇게 나불거리고 살 놈은 몇 없는데 말이야. 그것도 약한 놈한테 들으니 어이가 없을 정도군.”
그는 조용히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십여 명의 무인이 움직였다.
모두가 운하연을 죽이기 위해서다.
갈지혁도 그렇지만 운하연의 표정 또한 태연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이 고수라는 것을 아는 건 분명한데 얼굴 표정 하나 변함없다.
갈지혁을 믿어서가 아니다. 그가 강하다는 걸 알지만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고 갈지혁의 본 실력도 알지 못한다. 그냥 그녀는 믿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갈지혁의 공격을 가볍게 흘렸던 전적이 있는 그녀는 약선을 제외하고는 약선문 최고의 고수다.
모두의 검이 갈지혁과 운하연이 있는 중앙으로 쏟아졌다.
그렇지만 살기가 짖은 것은 모두 운하연에게로 향했다.
운하연의 손이 움직이는 듯싶더니 손바닥에서 하얀 광채가 쏟아졌다.
정면에서 달려들던 자는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급히 몸을 비틀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나자빠져 버렸다.
우두머리 사내가 외쳤다.
“방심들 하지 마! 약선문의 소문주는 무공의 고수다.”
다시금 수하들이 움직이자 갈지혁 또한 움직였다. 지켜 줄 이유는 없지만
약속했다. 반 각 안에 모두 끝내겠다고.
그러자 사내가 갈지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쒜엑!
검이 막 등을 돌린 갈지혁의 어깨를 노렸다. 빙글 몸을 돌린 갈지혁의 손바닥이 검을 밀어냈다.
파앙!
뒤로 밀려나는가 싶던 사내의 공격이 이어졌다.
“원화이문(圓和離刎)!”
검 끝이 요동치는가 싶더니 하얀빛이 쏟아졌다. 둥근 고리 같은 것이 사방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땅에 닿는 순간 공중으로 삼장 이상 흙이 튀겨 올랐다.
엄청난 위력이다.
갈지혁은 급히 수라독공을 운기했다.
녹색으로 물드는 손바닥. 그리고 눈동자의 색도 점점 변했다.
이자들은 보통 놈들이 아니다. 이런 실력자들이 갑자기 어디서 떨어졌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뒤를 힐끔 보니 운하연 또한 검을 빼 든 상태다. 그녀는 용케 십여 명에 달하는 자들의 합공을 막아 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 손이 많은 수를 당해 낼 수는 없는 법. 그녀는 계속해서 뒤로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운하연은 침착했다.
놀랍게도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용케 버텨 내고 있는 것이다.
갈지혁은 앞에 있는 자를 응시했다. 이자를 그냥 두고 운하연을 돕기도 어려운 처지다. 그렇다고 해서 운하연을 그냥 두자니 언젠가 당할 것 같다.
갈지혁이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나머지 손을 뒤로 당겼다. 뒷짐을 지듯이 뒤로 향한 오른손가락의 검지와 중지를 천천히 비볐다.
그 누가 본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리고 몸으로 가리고 있어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덤벼. 반 각 안에 끝내준다면서?”
갈지혁은 사내를 힐끔 본 후 손을 들어 올렸다.
다리가 땅을 박찼다. 그리고 몸이 날아오르며 그대로 발이 사내의 가슴을 쪼갤 듯이 날아갔다.
원래 같았다면 검을 휘둘렀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고 피해 내야만 했다. 갈지혁은 죽어선 안 된다. 그리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부상을 입어서도 안 된다. 지금 그는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수하들이 운하연을 죽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정도라면 안에 들어간 자들도 모든 일을 해결했을 게다.
그런데 막 땅에 발이 닿는 순간 갈지혁의 몸이 뒤로 훌쩍 뛰어올랐다.
“헛!”
엄청난 경공이다.
그저 가볍게 도약한 것 같은데 어느새 뒤로 훌쩍 날아간 갈지혁의 발이 합공을 펼치고 있던 수하 중 하나에게 떨어졌다.
너무 우두머리를 믿었던가? 아니면 그만큼 갈지혁의 움직임이 재빨랐는가.
채 피하지도 못하고 공격을 당한 자는 뒷목을 강타당했다.
“켁!”
혈도를 점혈 당한 사내는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그러자 양옆에 있던 자들이 급히 갈지혁에게 자신들의 병기를 휘둘렀다.
그렇지만 그 공격은 채 갈지혁의 몸에 닿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두 명의 몸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땅으로 쓰러져 버렸다. 갈지혁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운하연과 대치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들 사이를.
“뭐 하는…….”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갈지혁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 옆에 있던 자들이 풀썩거리면서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내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갈지혁이 발걸음이 떨어질 때마다 쓰러지는 수하들을 보며 사내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