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21화
무슨 일인지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독이다. 독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이미 갈지혁의 독을 대비하고 왔다는 것이다.
그분이 이미 갈지혁의 독을 대비해 어떤 단환을 준비해서 수하들에게 나눠졌다. 그들은 고수들이지만 독에 대한 경험들이 거의 전무하다. 그랬기에 미리 단환까지 만들어서 나눠줬던 것이다.
그가 말했다. 이 단환만 먹는다면 갈지혁의 독은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그의 말이 거짓일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가 갈지혁의 실력을 너무 얕봤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운하연이 가볍게 말했다.
“고마워요.”
“천만에. 널 위해 싸운 거 아니니까 오해는 말고.”
“이유야 어쨌든요.”
“……요상한 재주를 지녔구나.”
수하들이 모두 쓰러졌지만 사내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머리가 식었다. 수하들은 독에 대한 내성이 약해 당했지만 그는 아니다.
이미 그분에게서 많은 독에 대한 것들을 배웠다. 독에 대한 내성이라면 자신 있다.
갈지혁에게서 독만 버텨 낸다면 그는 상대거리도 되지 않을 게다.
“예상보다 발악이 심하긴 하지만 결과가 변하지는 않을 게야.”
“빨리 끝내야겠군. 약속한 반 각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가.”
“건방진 놈!”
그의 검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검강이다.
검을 쓰는 자들이 원하는 경지인 검강인 것이다.
운하연이 눈을 찌푸렸다. 검강을 구현할 정도라면 무림에서 알아주는 고수다. 그런데 지금 이 사내는 생전 처음 보는 자다.
“죽이진 않겠지만…… 지옥을 보여 주지.”
“시간 없어.”
말을 마치고 갈지혁이 먼저 움직였다.
사내는 달려드는 갈지혁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하얀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온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들어 버렸다.
* * *
쏟아지는 빛은 하늘을 덮었다.
천지가 울고, 바람은 미칠 듯이 흔들렸다. 갈지혁을 향하고 있는 검강, 그렇지만 실제로 그것이 베려고 하는 건 그가 아닌 운하연이다.
사내가 받은 제거해야 할 자들의 목록이 있다.
그 안에서 운하연은 특급으로 분류된다.
약선문(藥仙門)의 소문주(小門主) 운하연. 필살(必殺).
반드시 죽이라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계집이 왜 특급으로 분류되었는지 말이다.
그렇지만 이유를 물을 생각은 없다. 그가 한 말이라면…… 그것이 결국 진실일 테니까.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갈지혁이라는 놈이 오히려 요주의 대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죽이지 말라 했다면 죽이지 않는다.
사내의 검이 갈지혁에게로 향했다.
검에서 무서운 기세가 쏟아졌다. 검강이라는 것은 검을 익히는 자 중 극히 일부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극한의 경지다.
쏟아지는 검강을 갈지혁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맞섰다.
손에 내공을 모은 갈지혁은 그대로 쌍수를 휘두른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자 되려 사내가 놀라 버렸다.
‘젠장!’
죽어선 안 된다. 큰 부상을 입게 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만 이 상태라면 손이 모두 날아가 버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멍청한 놈이다. 아니면 죽이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을 한 것인가.
이유가 어쨌든 우선 그는 검강이 갈지혁에게 최소한의 피해를 주도록 내공을 움직였다. 그리고 급히 방향을 선회했다.
막 방향을 비튼 검의 옆면을 갈지혁의 손바닥이 후려쳤다.
지잉!
“크윽!”
손이 아릿하다. 검강에 씌어 있는 검을 이렇게 무식하게 후려치는 놈도 처음이거니와, 그 상태로 검을 밀어낸 놈도 처음이다.
검강을 후려치고 손이 멀쩡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진 듯한 기분까지 든다.
분명 그에게서 조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분명 말했다. 너라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틀려. 그가 틀렸어.’
처음이다. 그의 판단이 틀린 것은.
언제나 그가 가르쳐 준 것만 믿고 하라는 대로만 해온 사내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분의 판단이 틀린 것이다.
‘저놈…… 쉽지 않아. 까딱 잘못하다간 내가 죽어.’
사내는 검을 세웠다.
운하연을 베려고 했다. 그녀만 베고 갈지혁은 가볍게 상대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버렸다.
우선은 갈지혁이다. 그를 제압하지 않으면 운하연에게 손을 대기가 어렵다.
정 안 된다면 운하연을 죽이는 것을 포기해도 된다. 걸왕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목적은 이룬 셈이니까.
사내는 힐끔 뒤에 건물을 바라봤다.
지금쯤이면 슬슬 정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 갈지혁이 말했다.
“슬슬 끝내지.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가.”
“큭큭. 강한 건 인정하지. 하지만 네 독은 나한테 통하지 않아.”
“그건 두고 볼 일이지. 과연 내 독이 네놈에게 통할지…… 아니면 통하지 않을지는 말야.”
사내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분명 갈지혁의 독은 미리 단환을 준비했던 수하들을 단번에 쓰러트렸을 정도로 예상을 웃돌았다. 하지만 그분을 모시며 독에 대한 내성이 상상을 불허하게 늘어 버렸다. 이제는 그 어떠한 독이라도 자신이 있다.
갈지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엄지가 하늘을 향해 세워졌다. 그리고 이어 검지가 뻗어졌다.
갈지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사내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하는 거냐?”
“네 놈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명을 닮은 네놈의 시간이.”
사내가 피식 웃었다.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는 행동이 우스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얼래? 왜 이렇게 어질어질하지?’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변한 듯하다. 사내는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런데 점점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서, 설마…….’
갈지혁이 다가오고 있다. 아니, 그건 갈지혁이 아니다.
사신(死神)이다.
사신이 말했다.
“자, 너한테 하늘이 준 시간은 이제 끝이다.”
방 안은 온통 난장판이다.
갑작스러운 괴한의 등장에 개방의 인물들은 주변에 있는 가구들로 길을 막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한들은 고수들이었다.
그들 모두 개방의 오결제자 이상의 실력들을 지녔던 것이다.
걸왕은 움직이지 못한다. 그리고 오결제자 둘은 그들 중 하나를 맡는 것도 버거웠다. 싸움은 이십 명에 달하는 그들에게로 쉽사리 넘어갈 듯했다.
그렇지만 정작 싸움은 그렇지 않았다.
칠결제자인 구명, 후개. 그리고 진검백 탓이다.
어차피 방은 좁다. 그렇다면 들어올 수 있는 숫자 또한 제한적이다. 적들의 숫자를 최소한으로 만들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외의 변수가 있었으니 바로 진검백이다.
걸왕은 침상에서 간신히 일어선 채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비록 싸우지는 못하지만 눈은 연신 전장을 훑었다.
빠르게 날아드는 검.
그 검을 향해 아름다운 매화가 수놓아졌다.
하늘하늘거리는 검은 나비를 쫓고, 검 끝은 매화를 그려 내며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향기를 쏟아 낸다.
화산파의 매화검법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경지다.
그런 경지가 화산파의 낙오자라고 불리는 진검백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매화검법을 이 정도 펼치는 것을 보니 걸왕은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막 안으로 들어서려던 자는 진검백의 검을 받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가슴이 찢겨져 나뒹군다.
‘저 놈…… 낙화(落花)라는 별호와 어울리지 않아.’
걸왕은 후개를 힐끔 바라봤다. 그 또한 고군분투하며 싸우고 있지만…… 걸왕은 지금 후개를 처음 보고 감탄을 했다. 진정한 천재라고 말이다. 이 정도라면 비슷한 연배에서 무림에 적수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갈지혁은 예외다. 그는 독이라는 것을 쓰기 때문에 그렇다 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화산파에서 인생 패배자라고까지 불리는 낙화검 진검백의 검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어째서 저 자가 그런 대우를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검백은 화산파의 비슷한 연배에서는 절대 적수가 없을 것이고, 전체를 통틀어도 상대가 될 만한 자가 열 명도 되지 않을 게다.
‘세상은 넓군. 후개가 제일일 거라 생각했거늘…….’
그렇게 생각하는 건 걸왕뿐만이 아니다.
정작 후개 또한 진검백과 어깨를 마주하면서 싸우며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듬직할 수가 없다. 겨우 등을 맞대고 있을 뿐인데 뒤에 대한 걱정이 일지 않는다.
진검백은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다. 제대로 싸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같이 상대들이 일방적으로 밀려 나가고 있다.
후개는 진정으로 감탄했다.
또 이런 자가 무림에 있음을 감사했다.
‘좋은 호적수가 될 거야.’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싸워가는 자가 더 강해지는 건 당연지사다. 후개는 그 답을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그것을 찾은 듯하다.
진검백이 가볍게 검으로 문을 들어오려는 자들을 밀어내는 중 갑작스럽게 덩치가 커다란 괴한 하나가 나타났다.
카앙!
진검백의 검이 그 무지막지하게 큰 쇠망치에 밀려나 버렸다.
진검백은 엄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팔목을 부여잡았다.
“이런…… 무식하게 큰 망치군.”
“네 놈이 진검백이냐? 듣던 것과는 다르군그래. 내 수하들이 쩔쩔 매는 걸 보니.”
“자신의 수하라고 하는 걸 보니 이들의 우두머리 같은데…… 뭐 하는 놈이야? 너희들?”
“알 필요 없어. 너흰 죽기만 하면 된다.”
“쉽지 않을걸.”
“그래도 답은 하나. 그분의 명령이 내려진 이상…… 너희들은 죽어.”
진검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분?”
덩치가 커다란 사내는 진검백의 중얼거림을 깨끗이 무시하고 그대로 거대한 쇠망치를 휘둘렀다. 그것은 진검백의 머리통을 깨 버릴 듯이 머리 위까지 다가왔다.
“그분이라…….”
그때까지도 진검백은 중얼거리고 있었다.
후개가 소리쳤다.
“위험해!”
진검백이 피식 웃었다. 그러곤 말했다.
“그럴 리가.”
거대한 쇠망치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진검백의 입에서는 실소만 흘러 나왔다.
쇠망치는 너무나 거대했다. 휘둘러진다기보다는 높이 들었기에 떨어져 내린다는 말이 적합할 정도로 쇠망치의 크기는 대단했다.
진검백은 검을 빠르게 움직였다.
캉!
검은 쇠망치의 옆면을 후려쳤다. 검날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어졌다. 누가 봐도 진검백이 위험하다고 생각할 만한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검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면서 되려 튕겨나간 건 쇠망치였다.
“크윽!”
덩치 큰 사내는 자신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가볍게 비틀렸을 뿐인데 손목에 온 충격은 보통을 넘어선다. 그의 손목이 시퍼렇게 변해 버렸다.
“그분이 누구지? 궁금하군그래.”
진검백이 손에 든 검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가볍게 손목을 풀면서 진검백이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