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22화
덩치 큰 사내가 이빨을 꽉 깨물었다.
“건방진 놈…….”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
막 옆으로 누군가가 튀어 들어왔지만 기다렸다는 듯 후개의 손바닥이 그자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한 구의 시신이 늘었다.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히…… 내 수하들을…….”
마음 같아서는 수하들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을 게다. 그런데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걸왕은 부상, 상대할 놈은 구명과 후개 정도라고 들었거늘…….’
애초에 예상대로라면 진검백은 없어야 한다. 아니, 있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의 실력을 지녀서는 안 된다.
구명과 후개, 둘 모두 고수다. 사내가 비록 강하다 하지만 그 둘과 동시에 싸울 생각은 없었다. 수하들을 이용해 시간을 끌며 하나하나씩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등장한 진검백이라는 존재는 그런 사내의 계획을 송두리째 망가트려 버렸다.
그때 진검백이 말했다.
“물었잖아? 그분이 누구지?”
“……알 것 없다! 놈!”
부웅!
몸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듯싶더니 어느새 쇠망치가 진검백의 옆구리를 노리고 다가왔다. 진검백은 검을 들어 올려 쇠망치를 막았지만 그 묵직한 힘에 옆으로 밀려나면서 벽에 부닥쳤다.
벽에 부닥치는 순간 진검백은 발의 반동을 이용했다.
되려 몸을 비튼 진검백이 그대로 검을 사내에게 찔러 넣었다.
한 번에 사혈을 노릴 수도 있지만 진검백의 검은 사내의 발을 노렸다.
그에게서 듣고 싶은 것이 있는 탓이다.
쇠망치는 거대한 무기다. 분명 위력적이고 위압감을 주기는 하지만 한번 휘두른 후 회수가 느리다. 그 정도의 무게를 지녔으니 당연한 것이다.
그런 약점을 진검백 정도 되는 자가 놓칠 리가 없다.
문제는 사내 또한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진검백처럼 그런 걸 노려서 공격해 들어온 자의 수는 적지 않다.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을 익혔다면 그 정도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오냐!’
사내는 주저하지 않고 회수하던 쇠망치를 놓아 버렸다. 그러곤 커다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곰이 먹이를 향해 후려치듯 손을 움직였다.
사내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렇지만 몸을 날려 검을 휘두르던 진검백의 몸 또한 요동치는 듯싶더니 방향이 비틀렸다.
“엇?”
너무나 기기묘묘한 변화였기에 사내는 당황했다.
그 짧은 틈에 진검백이 사내의 뒤에 가서 섰다.
‘……!’
사내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대로 허리를 비틀며 사내가 손을 움직였다.
“응룡십이수(鷹龍十二手)!”
손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진검백을 노렸다.
사내의 절초다. 위기의 순간이 이르자 그는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절초를 펼쳤다.
수많은 싸움을 경험한 자라는 소리다.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최고의 절초를 펼친다.
수준이 있는 무인이어야 하고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을 보아서 이 사내는 분명 무림에서 치자면 일류 이상의 고수인 것이다.
날카롭게 변한 손가락이 사방을 할퀴고 들어왔다.
뒤로 급히 물러났지만 옷이 찢기며 같이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진검백은 그대로 검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허공에 선이 마구 그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이 하나의 꽃을 만들었다.
매화다.
화산파의 매화가 너무나 아름답게 그려졌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다.
진검백의 입이 열리며 조그마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매화의 향기는 만 리까지 퍼진다.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마구 손을 휘두르던 사내는 순간 머리가 핑하고 도는 걸 느꼈다. 갑작스럽게 이상한 향기가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맡아보니 매화꽃 냄새다. 그 냄새가 지독하게 풍기기 시작한 것이다.
‘뭐지?’
앞에 그려진 매화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을 눈치챈 순간 그의 등골이 오싹했다.
화산파의 무공을 정말 절정으로 익힌다면 그려 낸 매화에서 향기까지 난다고 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 정도 경지에 올랐던 화산파의 무인은 지금까지 세 명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겨, 겨우 낙화검 따위의 검에서 매화 향기가……!’
생각을 이을 여력이 없다.
매화만리향이라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마지막 초식이 사내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으니까.
“으악!”
검이 움직이는 순간 이미 사내는 쓰러졌다.
진검백은 조용히 검을 회수했다.
사내는 쓰러진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
일부러 살려 준 것이다. 마음만 먹었다면 죽어도 아주 처참하게 죽었을 게다.
그렇지만 이유가 있어 손속에 사정을 뒀다.
그렇지만 방 안에 있는 모두는 사내가 죽었는지 아닌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모두의 눈이 진검백의 손으로 향했다. 비록 마주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 또한 맡았다.
지독하게 진한 매화 향기를.
매화만리향을 펼치는 순간 퍼지던 그 냄새는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인물이야…… 화산에…… 몇백 년 만에 인물이 나왔어…….’
걸왕은 진검백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몰랐다. 저런 기재가 있을 줄은. 무림에 저 같은 신진 고수가 있을 줄은.
칠천룡이라는 단체에 속해 있다는 건 알지만 나머지 여섯은 진검백에 비하면 햇병아리다. 아니, 애초부터 그들과 진검백을 같은 단체에 넣어서 판단했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진검백은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는 문을 통해 들어오려다가 삐죽거리는 자들을 보며 말했다.
“뭐해? 어서들 덤벼.”
진검백의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눈앞에 있는 사내의 무게감에 그 누구도 검을 빼 들 수도, 움직일 수도, 심지어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만큼 진검백의 몸에서 풍기는 위압감이 방안에 가득했다.
그분이 알려 준 갈지혁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그분이 말했던 것을 훨씬 웃도는 자다.
심지어는 그가 갈지혁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인다.
눈앞이 뿌옇게 변하면서 온몸에 힘이 쏙 빠져 버렸다. 지금 이대로라면 반드시 진다.
아니, 이미 졌다고 봐야 무방하다.
제대로 된 상태라고 해도 이길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상대다.
쓰러지려는 몸을 그는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적어도 안은 분명히 정리될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걸왕을 제하면 후개와 칠결제자 한 놈만 잡으면 된다.
운하연의 모습도 언뜻 보인다.
‘저 계집을 죽여야 하는데…….’
그분은 걸왕과 운하연을 같은 선에 놓았다. 둘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죽여야 한다면 시간은 끌어야 한다. 그 생각에 사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부들거리는 다리를 힐끔 본 갈지혁이 말했다.
“반 각이 다 되어 가는군.”
“……아직 안 끝났어.”
“그건 네 생각이고. 궁금한 게 있어서 아직 살려 준 거야. 마음먹으면 넌 지금 죽어.”
“뭔데?”
물론 대답해 줄 생각은 없다. 그리고 갈지혁이 무엇을 물을지도 대충 안다.
그렇지만 일부러 되물었다. 그의 눈이 힐끔 뒤편에 있는 건물로 향했다가 전방을 응시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서다.
“누구 명령이냐?”
“알면 넌 죽을걸. 그리고 네가 찾지 않아도 알아서 나타나실 테니 네가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예상과는 다르게 내가 졌지만…… 너도 반드시 죽을 운명이거든.”
“널 보낸 자가 나를 죽일 정도로 강한가?”
“물론이지.”
사내가 호탕하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다. 그만큼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리일 게다.
“척 보아하니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하군.”
“…….”
“너를 심문하고 있을 시간은 없으니 당문에 넘기지.”
“웃기지 마랏!”
들고 있던 검이 부서졌다. 모든 내력을 검에 쏟았다. 그리고 이 한 수를 펼쳐낸 것이다. 목표는 가까이 있는 갈지혁이 아니다. 뒤에 서서 가만히 이 상황을 바라보던 운하연을 향한 것이다.
방심하고 있고, 이 정도의 내력이 실린 공격이라면 죽일 수도 있다.
비장의 한 수인 것이다.
그런데 날아들던 검의 파편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운하연이 소매를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말이다.
“제, 젠장…….”
내심 성공할 거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너무나 허탈하게 무위로 돌아가자 사내는 할 말을 잃었다.
갈지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가라.”
퍽!
정확하게 손이 명치를 가격했다. 눈이 확 뒤집히고 입에는 게거품이 인다. 사내는 풀썩 쓰러져서 부들부들 떨었다. 정신을 잃어 가는 와중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 단리문…….’
독황독립문에서 알 수 없는 짓을 꾀하는 단리문의 이름이 사내의 입에서 나왔다.
갈지혁이 쓰러진 사내를 들쳐 업고 몸을 돌리자 운하연이 말했다.
“안에는요? 돕지 않을 생각인가요?”
“아아, 지금 가보지.”
갈지혁은 전혀 조급하지 않다는 듯이 걸었다.
운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안에 달려든 숫자는 자신들을 포위한 자들의 배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갈지혁이야 독을 쓰니 그렇다 쳐도 저곳에서는 그런 자들이 없다.
후개를 믿는 것일까? 아니면……
운하연의 눈에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이는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사색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당연스럽게 운하연의 눈이 그자에게 쏠렸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언제나 바보 같은 미소를 짓곤 하는 진검백이었다.
그가 검을 비스듬히 든 채로 걸어 나왔다.
“뭐야? 안으로 들어올 용기도 없는 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진검백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주변을 감싸고 있는 십여 명에 달하는 괴한들이 움찔했다.
운하연은 집 안에서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음을 느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가벼운 움직임 하나에 이 같은 고수들이 움츠러들 리가 없다.
그때 갈지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올 필요는 없었던가…….”
“무슨 말이죠?”
“저 녀석이 있잖아.”
갈지혁이 진검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검백 또한 갈지혁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진검백이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가리켰다.
갈지혁이 말했다.
“이놈들 우두머리 같은데.”
그 말에 진검백을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 고개를 돌려 갈지혁을 바라봤다.
그들의 안색은 이제 새파랗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두 명의 우두머리가 모두 쓰러졌다. 그것도 상대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아아, 빨리 좀 끝내자고. 난 잠이 좀 많은 편이라서.”
진검백의 몸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괴한들의 코앞에서 나타났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은밀하였기에 구경을 하던 운하연의 입에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호오, 암향표(暗香飄)?”
화산파의 신법 중 하나로 제대로 익히기 까다롭다는 암향표다. 그것을 진검백은 수월하게 펼쳐냄과 동시에 완벽하게 구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