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23화
그 한 번의 움직임과 동시에 내지른 갈지혁의 발과 주먹이 동시에 두 명을 넘어트렸다. 그들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길 수 없는 상대다. 애초부터 이들은 시켜서 온 것뿐이기에 위에 대한 충성심 같은 것도 없는 자들이다.
막 검을 움직이려던 진검백이 멈췄다.
그러곤,
“하음, 졸렵군. 너희들은 그만 가라. 척 보아하니…… 싸울 맘들도 없는 듯한데. 도망치는 놈 뒤까지 쫓으면서 죽일 생각은 없어. 시간을 줄 테니까 가라.”
진검백은 갈지혁을 힐끔 바라봤다.
괜찮냐고 묻는 것이다. 갈지혁 또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지혁 또한 이들이 아무런 것도 알지 못하는 수하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탓이다.
그리고 진검백이 보내온 전음을 듣고 놔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괴한들은 서로를 보다가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나와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개방의 인물들의 얼굴 표정이 좋지 않다. 비록 수하들이라고는 하나 족치다 보면 무엇인가 하나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냥 놔준 탓이다.
그때 진검백이 말했다.
“개방도 중 한 분이 쫓아가시지요. 어차피 그냥 물으면 말도 안 해 줄 것 같던데. 오결제자 중 당신이 무풍개 아닙니까? 경공이라면 자신 있을 텐데요.”
“그 목적이었군. 그래서 놔준 거야!”
무풍개라고 불린 오결제자는 소리 친 걸왕을 바라봤다. 걸왕이 말했다.
“쫓아가고 위험하다 싶으면 당장 빠져나와.”
무풍개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진 자들의 뒤를 쫓았다.
진검백은 태연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갈지혁 또한 사내를 들쳐 업은 채로 따랐다.
걸왕은 부축을 받은 채로 안으로 들어와 다시금 침상에 걸터앉았다. 바로 앞에 있는 상에는 두 명의 사내가 앉아서 마주하고 있다.
갈지혁과 진검백이다.
‘이 둘은…….’
갈지혁은 구석에 잡아온 사내를 처박아 두고 주변을 휘휘 살펴보고 있었다. 진검백은 그냥 졸리다는 듯 마냥 하품을 하고 있다.
둘 모두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둘이 함께 한다면 무림이 시끄러울 거라는 것이다.
독황독립문에서 파문당했다는 갈지혁, 화산의 문제아이자 수치라고 불리는 진검백.
비슷하다. 둘 모두 문파에서 내둔 자인 것이다. 그런데 두 곳 모두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분명 이 둘이라면 무림을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무림에 잠룡이 있었어.’
개방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 한다.
무림에 두 명의 새로운 신성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 * *
개방의 분타는 중원 전체로 퍼져 있다.
사천에 있는 개방 분타에 오늘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개방에서 최고의 직위를 지니고 있는 방주와 후개가 나타난 것이다.
미리 그들이 오고 있음을 다른 거지들을 통해 알았기에 분타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분타주인 구개(求鎧) 지대평은 옆에 있는 거지를 보며 말했다.
“어디까지 오셨다고 하더냐?”
“바로 코앞이랍니다.”
“……젠장, 말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야.”
지대평은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원래 걸왕이라는 인간 자체가 워낙 깐깐하여 잘못한 일이 있으면 꼬투리를 잡혀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다. 그런 경험을 수도 없이 당해 본 지대평으로서는 껄끄러운 게 당연했다.
지대평은 손을 맞잡은 채로 입맛을 다셨다.
점심에 먹었던 요리가 꽤나 맛깔스러워 입맛이 돌았는데 이제는 오히려 밥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지대평은 인상을 찌푸리며 상념에 잠겼다. 그때 문을 지키던 걸인이 말했다.
“분타주님! 오십니다!”
“그래? 문을 열거라.”
개방의 사천 분타의 문이 열렸고, 그곳으로 몇 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대평은 생전 처음 보는 자들이 많음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걸왕과 후개의 모습에 급히 아래로 내려섰다.
“아이코! 방주님 오셨습니까?”
지대평이 웃음을 지으며 다가가자 걸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또 잘못한 거 있는가? 왜 이렇게 들이대?”
‘자식이 말하는 거 하고는…….’
발끈했지만 지대평은 그저 싹싹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방주님도 섭섭한 말씀하시긴……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그렇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고. 사고만 치던 자네라 혹시나 해서 물었네. 아니라면 그만이지.”
“그런데 어인 일로 이 먼 곳까지 아무런 서신도 없이…….”
걸왕이 손을 휘휘 저었다.
이야기해 줄 의향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지대평은 멍청한 자가 아니다. 비록 사고를 많이 내긴 했지만 개방에서 분타주라는 지위까지 오른 그다. 개방에 있는 그 많은 수의 사람 중 분타주를 맡았다는 건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소리다.
“음 다른 분들은 다 누구신지…….”
지대평은 걸왕과 후개를 비롯한 개방도를 제한 사람들을 쳐다봤다.
젊은 사내가 둘, 여인이 하나, 그리고 중년에 접어든 사내가 하나 있다. 문제는 이 무리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공통점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리려고 골머리를 썩였을 게다. 그런데 이들에겐 그런 게 없다.
두 젊은 사내만 해도 그렇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온통 검은색 옷으로 치장을 한 자와 밝은 색 계통의 옷을 입고 명문정파의 인물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내.
그리고 중원인이긴 한데 다소 이질적인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여인과 삼류 무사와 같아 보이는 중년의 무인.
어울리려야 어울릴 수가 없다.
“내 손님들이야. 그나저나 좀 쉬러 왔는데 자리 좀 마련해 주지 그러는가?
내가 부상도 좀 입어서 긴히 쉬고 싶은데.”
“부상을 당하셨습니까?”
지대평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제야 그는 걸왕의 안색이 예전에 비해 좋지 않음을 느꼈다. 아마도 꽤나 많은 내상을 입은 듯하다.
지대평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투덜거리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날카로운 기세만이 가득하다.
“어떤 놈입니까? 감히 어떤 놈이…… 개방의 방주를 건드린단 말입니까?”
“또 흥분하긴. 날 건드린 놈이 어떻게 됐겠는가? 이미 피떡이 됐지.”
“아무리 그래도 감히 개방의 방주를 건드릴 생각을 한 놈을…….”
“그만. 쉬고 싶으니 방이나 안내하게.”
지대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걸왕은 앞장서서 걸으며 갈지혁을 슬쩍 쳐다봤다. 지금의 걸왕을 이렇게 만든 건 갈지혁이다. 만약 그 사실을 알면 지대평은 물불 가리지 않고 갈지혁에게 달려들 게다.
지대평이 그런 인물이라는 걸 걸왕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개방의 거지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들에게 걸왕은 하늘이자 신이다.
무릎을 꿇은 개방도 사이를 걸으며 진검백은 입으로 소리를 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무엇인가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
개방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자 진검백이 갈지혁에게 말했다.
“역시 개방이군.”
“그래.”
“그리고 넌 이런 개방과 싸우려 했고.”
진검백의 말에 갈지혁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눈이 살짝 드러났다. 갈지혁이 피식 웃었다.
“어? 웃어? 자신이 있다는 거냐?”
“왜? 못 할 것 같아?”
개방의 사천 분타 안에서 이런 말을 나눈다는 걸 누군가가 본다면 기겁을 할 게다.
그 누가 개방의 분타 안에서 다른 곳도 아닌 개방을 무시하는 발언을 내뱉겠는가. 그렇지만 갈지혁은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어느 정도 갈지혁이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 알만큼 시간이 지났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지대평만은 달랐다.
둘의 중얼거림이었지만 고수급의 무인의 귀에 그 정도가 그냥 지나갈 리가 없다.
지대평은 고개를 돌려 갈지혁과 진검백을 바라봤다.
전혀 처음 보는 햇병아리들이 개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소 다혈질인 지대평으로서는 피가 거꾸로 솟구칠 일이다.
“너희들 뭐 하는…….”
“그만.”
“방주님!”
“그만하래도.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그렇게 하려던 놈이니까. 물론 그렇게 했다면 결과야 뻔하지만.”
걸왕의 말에 지대평은 갈지혁을 다시금 살폈다.
전혀 생면부지의 인물이다. 그렇지만 걸왕의 말을 듣고 추측하면 개방을 상대로 싸우려고 했던 자다.
어떠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지녔던 자를 왜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 걸왕의 행동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걸왕의 등장부터 해서 전혀 알 수 없는 인물들.
뭔가 혼란스러운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걸왕은 쉽게 움직이는 인물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니까.
“누굽니까? 그것만 말해 주십시오.”
“갈지혁이라고 자네도 알 게야.”
“갈지혁? 그 미친놈?”
“그래.”
미친놈이라는 말에도 갈지혁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흥분도 하련만 너무나 태연하다.
오히려 옆에 있는 진검백이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걸왕은 쉽게 대답했지만 지대평은 그렇지 않았다. 갈지혁이라면 요주의 대상이다. 무림에서 신경 써서 살피고 있는 그런 자를 굳이 개방과 연을 만들어 무엇 하냐는 말이다.
“방주님…… 무슨 생각이십니까?”
“뭐가?”
갑자기 지대평이 멈추어 서며 말하자 걸왕이 되물었다.
물론 말은 그랬지만 걸왕 또한 지대평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지대평이 말했다.
“저놈은 독을 씁니다. 무림을 시끄럽게 할 놈이죠. 굳이 이렇게 연관 되셨다가는 좋을 것 하나 없을 게 분명합니다.”
“알아. 아는데…… 이유가 있어서 그러네. 자네의 생각은 알지만 이번엔 이해해 주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저 사내를 데리고 온 거니까.”
걸왕의 말에 지대평은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다. 걸왕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분명 무엇인가 생각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걸왕이 그런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갈지혁이라는 존재를 개방의 분타에까지 데리고 왔을 리가 없다.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죽여 버리겠다. 알아들었나?”
갈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사천의 개방 분타 주변에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자와 그와 전혀 반대 되어 보이는 옷차림을 한 사내가 서성이고 있다.
검은색 옷에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주변에 다가가기만 해도 다칠 것만 같은 위험함을 풀풀 풍긴다. 반면 다른 사내는 전혀 다르다.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고 장난기가 가득해 보인다.
검을 허리에 차고는 있지만 마치 여행을 나온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령 같은 느낌이다.
팔짱을 낀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검은 색 사내가 말했다.
“뭐 이렇게 꼬리가 많아.”
“네가 아무렇게나 떠들었으니까 그렇지.”
입가에 미소가 달린 사내가 답했다. 실제로 그 둘의 곁에는 알게 모르게 수많은 자들이 둘러 싼 채로 감시를 하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둘은 너무나 태연했다.
갈지혁과 진검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