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25화
갈지혁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여러 가지의 재료들을 섞기도 하고 또 살펴보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갈지혁은 품 안에서 이상한 물건 하나를 꺼냈다.
대나무 통처럼 되어 있는데 끝이 약간 가늘다. 그리고 온통 검은색이라 대나무 같지도 않다. 갈지혁은 그것을 들어 올리더니 약간의 내공을 주입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터져 나왔다.
벽이 녹아내렸다. 그것을 본 갈지혁이 그 수상한 물건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이풍이 물건 하나는 제대로 만들었군.”
이풍에게 부탁했던 것 중에서 하나다. 독을 하독하는 물건인데 신기한 것은 독단 같은 것을 넣고 쏠 수도 있지만 내공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갈지혁은 수라독공의 기운을 이곳에 담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엄청난 독이 마구 쏟아진다는 소리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방에는 그간 재료가 없어 만들지 못한 수많은 독들이 있다. 중원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재료들도 이풍이 구해다가 준 것이다.
과연 황금귀라는 이름에 걸맞은 힘을 지닌 듯하다.
‘이 정도면 싸워볼 만하겠군.’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이 정도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갈지혁의 머릿속에 한 명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중원에 나와 유일하게 갈지혁을 뒤로 물러나게 했던 인물이 있다.
복면을 쓰고 있었기에 얼굴도 모른다. 나이도 모른다. 이름은커녕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
거부 문우령의 거처에서 잠시 일을 할 때 나타나 무엇인가를 가지고 사라졌다.
그때 분명 그는 갈지혁을 죽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전 나타났던 놈들도 그것과 비슷한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은 죽이지만 갈지혁만은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같은 자들의 소행이다.
진검백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갈지혁은 그리 생각하고 있다.
도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는 세력이 갈지혁의 뒤를 쫓고,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물론 단화초다.
갈지혁은 통을 어루만졌다. 이것만 있으면 그때의 복면인과도 싸워볼 만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전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다.
전혀 알 수 없는 자들을 두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니 찜찜하다. 차라리 확실하게 정체라도 안다면 후의 행동을 정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알아내려고 한다.
‘독황독립문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들과는 뭔가 방식이 다소 틀리다는 생각에 갈지혁은 확신을 내리지 못했다.
갈지혁은 통을 품속에 넣고는 다시금 독초들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개방에 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이곳까지 왔을 리도 없다. 그때 사라진 자들을 쫓은 개방의 거지가 돌아온다면 어느 정도 단서를 구할 수도 있으리라.
갈지혁의 손에서 녹색 기운이 흘러 나왔다.
* * *
어둑한 밤이다.
사방의 모든 사물들이 점점 어둠에 묻히고 있다.
누군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 물…….”
푸시식.
들어 올렸던 자의 손이 마치 모래처럼 흐트러져 버렸다.
바람이 불었다. 미친 듯한 바람과 함께 사방에 가득한 먼지들이 허공을 채웠다. 음산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피 냄새는 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비릿한 냄새가 나는 듯하다.
주변의 광경이 뭔가 이상하다.
분명 사람의 흔적은 있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기다가 집으로 보이는 것들도 모두 엉망이다. 반쯤 부서지고 기둥만 남은 것이 허다하다. 우물로 보이던 것도 있는데 그곳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한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을 단숨에 날아오는 모습을 보아하니 고수다. 그는 땅에 발을 대자마자 눈을 찌푸렸다.
“큭…….”
그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지만 이내 혈색을 되찾았다.
사내는 숨을 고르게 쉬기 시작했다.
단리문이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단리문의 눈은 무엇인가를 쫓고 있다. 아마도 어떠한 것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무엇을 찾으려는지 알 수가 없다.
"킥!”
단리문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가 찾던 것은 특별난 게 아니다. 바로 이렇게 아무것도 없게 되어 버린 지금의 상황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기대 이상이야. 이 정도라니.”
그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가 허리를 굽히더니 땅에 있는 흙을 한 움큼 쥐었다.
주변의 흙과는 다소 색깔이 다르다. 그것을 단리문은 코에 가져다 댔다.
“지독하군.”
엄청난 독기다. 이 흙은 독 자체라고 봐도 된다.
도대체 이 흙이 무엇이기에……
“좋아.”
단리문은 한 웅큼 쥔 흙을 가지고 온 병에 넣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사람이다. 아니,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사람이 녹아 버린 것이다.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 독황독립문이 중원을 향해 쓰려는 독인 것이다. 이미 퍼지기 시작했고 막을 수도 없다.
다소 진행이 더딘 것이 흠이긴 하지만 중독된 그 날부터 천천히 몸 안에 있는 생명이 깎여 나간다. 해독약은 없다. 그 독이 발작하지 않도록 할 수는 있지만 완전한 해독은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 단화초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단리문이 단화초를 찾는 것은 단지 그 병에 대한 약초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하찮은 곳에 쓸 정도로 단화초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운하연이나 그런 목적으로 단화초를 찾고 있지 나머지의 인물들은 모두 그 독성을 노리고 있다.
‘이젠 그놈만 움직이면 되는데.’
갈지혁만이 남았다.
그가 단화초가 있는 곳에 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만 되면 무력으로 단화초를 빼앗을 생각이다. 그 날 이후론 천하에서 적수가 없게 된다.
‘우스워. 천하를 흔들 독이기도 하지만, 천하를 흔들 독을 해독할 약재이기도 하다는 것이.’
약초 따위는 관심 없다.
그저 지독한 극독이기에 관심이 갈 뿐이다.
훵하게 변해 버린 이곳이 바로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북적이던 꽤나 커다란 마을이었다는 것을 누가 믿을까.
집들도 모두 녹아 버렸고, 사람들은 가루가 되어서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독이 시작되었던 우물에서 썩은 악취가 나는 건 당연하다.
아마 우물 아래에 꽤나 많은 자들이 빠져서 죽어 있을 게다.
단리문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이제 이곳에 있을 목적은 없다. 모든 건 완벽하게 끝났다. 곧 싸움은 시작된다.
중원과 독황독립문의 싸움이.
승자는 이미 정해졌다. 자신이 독황독립문을 돕기 시작한 그때부터 이미 승부는 정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단리문이 바라는 것은 독황독립문의 승리가 아니다.
물론 중원의 승리도 아니다.
애초부터 그는 그런 사안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가시지요. 너무 오래 계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흠.”
단리문의 뒤에 나이가 지긋이 들어 보이는 노인 하나가 나타나 말했다.
단리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리문의 직속 수하 중 하나로 그가 믿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어렸을 적부터 옆에 있었고 지금의 단리문이 있기에 적지 않은 공언을 한 인물이다.
“공자님.”
“왜?”
“이풍이 귀찮은 부분을 자꾸 쑤시고 있는 듯합니다.”
“황금귀가?”
“예. 이대로 간다면 꼬리를 잡힐 것 같은데…….”
“잡으라고 해. 어차피 잡는다 해도 아무것도 알지 못할 테니까. 설령 안다고 해도 그놈은 우릴 막을 힘이 없어.”
황금귀 이풍이라면 알아주는 고수다.
그렇지만 그건 무림에서나다. 단리문에게 이풍은 죽이려고만 든다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 중 하나다. 다만 지금 괜히 건드릴 필요가 없는 인물이라는 거다.
괜히 무림이 경각심을 지니게 할 필요는 없다.
“조금 더 감시하다가 수상해 보이면 죽여. 하지만 아직은 아냐. 그리고 다시금 돌아가야겠다. 만날 사람이 생겼어.”
“알겠습니다. 수하들도 준비시켜 두지요.”
노인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다시금 몸을 감췄다.
단리문은 노인이 사라지자 상념에 잠겼다. 이풍이라면 갈지혁과 일전에 만난 적이 있다.
아마 모종의 무엇인가를 꾸민 듯하다. 물론 갈지혁이 자신들의 정체에 대해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갈지혁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그저 장단에 맞춰 춤을 추다가 결국 공연이 끝나면 버려지는 인형일 뿐이다.
‘주인공이라고 해도 인형은 인형.’
그 순간만큼은 화려해도 공연이 끝나면 결국 그 인형은 버려지게 된다. 갈지혁이 그런 존재다.
‘지금 타올라. 어차피 곧 꺼져야 할 불꽃이니까.’
단리문이 사라졌다.
하얗게 변해 버린 마을을 뒤로 하고.
진검백의 표정이 좋지 않다.
밥을 먹고는 있지만 먹는 것 같지 않다. 앞에 앉아 웃고 있는 여인을 보니 도대체 무시하고
밥을 넘기는 것이 고역이다.
마침내 진검백은 두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말해요 말.”
기다렸다는 듯이 앞에서 미소를 흘리고 있던 운하연이 말했다.
“갈지혁은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놈 뭘 할 때는 제가 말을 해도 대답조차 하지 않거든요.”
“언제쯤 끝나는지는 아세요?”
“모르죠. 그것도 그놈 맘이니까요.”
“도대체 왜 둘이 같이 다녀요? 이해가 안 가네요.”
운하연의 핀잔에 진검백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재밌으니까요.”
“당신답네요.”
운하연 또한 진검백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지는 않는 모양이다.
운하연의 옆에 서 있는 풍객은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일이 언제 끝날지는 몰라도 그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끝나면 나올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요.”
“그것도 그러네요. 그래도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군요.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뭐 그놈과 조금 더 안다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인데 싫다고 한번 말했으면 끝까지 한결같은 놈입니다. 이야기하셔도 소용없을 겁니다.”
“알아요. 그래도…… 그것뿐이거든요. 저에게 남은 희망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운하연이라는 여인이 그렇게 갈지혁에게 매달리는 이유를.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 둘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아니, 그렇기에 오히려 공통점이 있을 수도 있다. 모르지만 분명 그런 것이 있기에 운하연이 이토록 행동하는 걸 게다.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진검백이 반가운 듯이 인사했다.
“여어. 끝났나?”
“대충. 그나저나 배가 고픈데.”
“식사나 하지.”
진검백이 앞에 앉은 운하연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잘은 모른다. 그렇지만 진검백은 장담한다.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갈지혁은 강해졌을 게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토록 며칠 처박혀 있다가 나올 때마다 갈지혁은 진검백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던 자니까.
갈지혁의 손 색깔이 조금 검게 변했다는 것을 진검백은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