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2화
농부들의 대표로 지주에게 덤빈 대가로 돌아온 것은 땅을 빼앗기고 쫓겨나는 것이었다. 집안은 급격하게 기울었고 돌아오는 건 빚뿐이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걸왕 또한 길거리에 나앉았다.
힘없는 아이에게 돌아오는 건 세상의 냉혹한 외면과 폭력뿐이었다.
강해지리라.
그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개방의 최고 위치에 있는 걸왕이 된 것이다.
약한 자들은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힘이 없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힘이 있는 자가 도와야 한다. 힘을 지닌 자가 조금만 돕는다면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운명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약자를 위해…….’
걸왕은 창밖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하나의 신념이다. 약자를 위해 싸우자고. 그러기 위해 아직도 그는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않고 편한 자리에서의 잠도 피한다. 고생을 하지 않으면 그런 마음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기척을 한 탓에 걸왕은 누군가가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걸왕이 말했다.
“말은 전했는가?”
“예.”
그는 걸왕이 갈지혁에게 보낸 사람이다. 얼굴은 내비치지 못했지만 송별 인사를 전달하기 위해 보낸 자다. 그 걸인은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냈다.
“이걸 드리랍니다.”
“음? 갈지혁이?”
“예, 필요하실 거라고 하면서…….”
걸왕은 말없이 깔끔하게 접힌 서찰을 한 겹씩 풀어냈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한 걸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핫! 이 친구, 몰랐는데 꽤 세심한 구석이 있군.”
오랜만에 유쾌해져 버렸다. 그냥 쉽게 생각하던 갈지혁이라는 사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된 것도 같다.
서찰 안에는 독에 대해 적혀 있다. 독황독립문에서 쓰는 독들로 그 증상과 해독하는 방법도 적혀 있다.
이 독은 분명 갈지혁이 쓰는 것이기도 할 게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분명 그에게도 불리할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세 가지로 답을 내릴 수 있다.
바보인 경우다. 그렇지만 걸왕이 보기에 그는 바보가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있다는 거다. 이것을 가르쳐 줘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가능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자신의 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가장 확률이 큰 것은 갈지혁이 쓰는 독이 다르다는 결론이다.
같은 남만의 인물이었지만 그는 파문당했다. 그리고 파문당한 시간으로 보면 분명 다른 누군가를 만나 독에 대해 배운 것이 분명하다. 아마 비슷하면서도 다른 많은 독들을 지니고 있을 게다.
거기다가 두 번째 답까지 합해진 것이 아마 갈지혁의 마음일 것이다.
“그 녀석, 재미있는 놈이야.”
걸왕이 피식 웃었다.
펄럭펄럭.
객잔 앞에 커다란 기가 하나 놓였다.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깃발이 꽂혔고, 주변은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내가 그곳에 서서 무심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내의 몸에선 위험한 냄새가 풍긴다.
주변에 다가서기만 해도 오싹한 느낌에 절로 뒤로 물러서게 된다.
그의 앞에 몇 명의 사내가 쓰러져 있다. 그자들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때 그 광경을 구경하던 구경꾼 중 하나가 외쳤다.
“갈지혁이다!”
그렇지만 굳이 사내가 외치지 않았어도 모두가 그 정도는 아는 듯했다.
독왕대로행이라는 깃발을 들고 이렇게 대낮에 돌아다니는 것은 갈지혁 빼고는 아무도 없다. 갈지혁은 힐끔 고함을 지른 사내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갈지혁은 다시금 깃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또 덤빌 놈 있나?”
음산하다. 마치 시체와도 같은 느낌이다.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갈지혁에게 방금 덤볐던 자들의 꼴을 보았다면 그 누가 쉽게 달려들겠는가.
갈지혁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오늘 오전이다. 그는 마을의 정 중앙에 있는 객잔 옆에 깃발을 세웠다.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근방에서 싸움깨나 한다는 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갈지혁을 보자마자 싸울 마음을 접었다. 갈지혁의 행색은 남루하다.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젊다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싸움꾼들조차 덤벼들지 못했다.
무인보다 목숨을 건 싸움을 더 많이 하는 낭인들조차 갈지혁에게는 싸움을 걸 수 없었던 것이다.
낭인은 죽음의 냄새를 잘 맡는다. 싸움에 임할 때 상대를 살피는 데 능숙한 이들이 낭인이다. 비록 삼류지만 그들은 언제나 죽음을 등지고 살아간다.
죽어서 시체 하나 건지면 다행이다. 그들은 그런 삶을 살아간다. 그랬기에 삶에 대한 집착도 더 남다르다.
지금 갈지혁의 앞에 쓰러져 있는 것도 낭인이 아닌 무인이다.
만약 낭인이었다면…… 미치지 않고서는 싸움을 피한다. 갈지혁의 몸에선 너무나 위험한 냄새가 난다.
“아무도 없나? 덤빌 자가?”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누구도 나설 리가 없다. 마을에서 돌아다니는 일정 수준 이하의 무인들이나 낭인들이 덤빌 정도로 갈지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걸 갈지혁이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그는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다.
이곳은 운남이다. 운남에서도 점창산(點蒼山)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그곳엔 점창파가 있다.
지금 갈지혁은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구파일방의 하나인 점창파에.
* * *
점창파 내부는 조용했다.
언제나와 같은 아침이다. 점창의 무인들은 검을 휘둘렀고, 각자의 무공 훈련에 바빴다.
구파일방의 하나로 도가(道家)의 무공(武功)과 보다 실전적(實戰的)인 무학(武學)을 합한 것이 바로 점창의 무공이다.
점창의 검은 가볍다. 그리고 초식들은 표홀하다.
빠른 쾌검으로 유명한 문파가 바로 점창파인 것이다.
정도를 걷는 구파일방 중 하나로 유명한 문파였지만 현재는 무림에서 그다지 좋지 않게 평가되고 있다. 아미파와의 잦은 다툼이 바로 그 이유다. 그리고 대부분의 다툼이 점창파에서 먼저 일을 크게 만든 경우라 무림에서 많은 질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창파가 크게 행동을 바꾸지 않는 건 현 장문인인 점창제일검(點蒼第一劍) 소절상이라는 인물 탓이다.
그는 건방지다. 스스로 자신의 입으로 그리 말하고 다닐 정도로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그 탓에 많은 원한을 사고 있지만 소절상이 점창파의 장문인이기에 누구도 쉽사리 그런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소절상은 욕심이 많다. 운남에 있는 다른 모든 문파를 점창의 아래에 두는 것이 그의 숙원이다. 아미파에게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도 그 탓이다.
점창파 내에서도 그런 소절상의 행동에 불만을 지닌 자는 많았지만 그들 또한 침묵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현재 점창의 주인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거처에서 소절상은 검을 닦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에 두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중년인이 앉아 있다.
노인 중 하나가 뒤로 몸을 돌린 채로 검을 닦는 소절상에게 말했다.
“장문인, 해결해야 될 일이 있소.”
“무슨 일인지 몰라도 웬만한 일이면 알아서 하시오. 괜히 귀찮게 하지 말고.”
귀찮다는 듯한 소절상의 말에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둘은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노인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산 아래에 갈지혁이 나타났소.”
“갈지혁?”
소절상이 몸을 빙글 돌리며 노인을 마주했다. 그제야 관심이 가는 듯하다.
“갈지혁이라면…… 일전에 내 친인척인 소우련을 건드렸던 그놈 아닌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보다는 현재 무림에서 일으킨 사건들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자신의 주변에 있었던 자잘한 일에나 연관시키는 소절상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잘됐군. 우리 점창을 우습게 본 대가를 치러줄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당연한 거 아닌가? 몇 명 보내서 혼쭐을 내줘야지.”
“그리 쉽게 판단할 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노인은 도대체 소절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갈지혁이 무림에서 어떠한 일을 벌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명령만 내린다.
“정파 무림에서 좋게 보지 않는 놈이야. 지금 손대도 크게 뭐라고 할 자도 없잖소.”
“알고 있소. 그렇지만 쉬운 상대가 아니오. 단신으로 장강수로채의 무인들을 막아 낸 자요. 그런 자를 그저 몇 명을 보내 혼쭐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장문인은?”
“강해 봤자 한 명이오. 장로는 너무 겁이 많아.”
“겁이 많다라…… 물론 나 또한 갈지혁이라는 자의 행동을 막는 건 동의하오. 지금 그를 그냥 둔다면 점창파의 위신에 금이 가는 건 분명하니까. 하지만…… 쉽게 판단해서 문도들이 패한다면 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야 할 거요.”
지금 갈지혁은 점창산 아래에 있는 가장 큰 객잔 앞에서 비무를 펼치고 있다.
주변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자들 모두 패했다. 지금 그가 누구를 부르고 있는지 이젠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알 정도다.
점창파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면 겁을 집어먹었다는 소리를 들을 게다. 분명 갈지혁의 행동에 제지를 가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하나 문제는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거다.
소절상은 갈지혁을 우습게 생각한다. 독에 대해 모르는 탓이다. 그리고 갈지혁이 최근 무림에서 벌인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에 반해 장로인 노인은 독의 무서움을 안다. 또한 갈지혁의 최근 행보에 대해서도 이래저래 주워들은 것이 많다.
물론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지만 점창파 무인들의 입에서 직접 들은 것만큼은 확실할 게다.
장강수로채의 총채주인 구백룡이 물러섰다. 그것도 엄청난 수하들을 이끌고. 그것은 모두 갈지혁이라는 자 하나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무림에 나선 후 벌인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보면 갈지혁은 엄청난 고수다. 무림에서도 갈지혁의 행보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면 말 다한 것 아닌가.
소절상은 자신의 실력을 너무 과신한다. 그랬기에 상대를 너무 얕보는 경향이 있다.
소절상이 점창파의 장문인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한 번쯤 당하라고 내버려뒀을 게다. 그런 경험은 오히려 득이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가 점창의 장문인인 이상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건 소절상 개인뿐만이 아니라 점창파의 이름에도 먹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애송이 하나요. 우리 점창의 무인 몇 명이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지.”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그는…….”
“아아! 그만 그만! 장문인은 나요, 당신이 아니라!”
그 한 마디에 노인은 침묵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자에게 더 말해 무엇하랴.
“내가 알아서 몇 명 보내지. 오늘 중으로 내려 보낼 테니 내일쯤이면 좋은 소식이 올라올 거요. 기다리고만 있으시오.”
소절상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노인을 비롯해 다른 두 명 또한 그다지 표정이 좋지 않다. 그 셋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탓이었다.
방금 전까지 소절상에게 말을 하던 노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점창파는 퇴보하고 있다. 잘못된 장문인 하나 때문에.
‘점창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니…….’
한심스럽다. 소절상의 장문인 추천을 반대해서 막기만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후회를 해도 변하는 건 없다.
자신 있는 미소를 짓는 소절상과는 달리 나머지 셋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객잔 주변은 한산하다.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깃발이 이곳에 꽂힌 이후로 사람들은 이 길을 애써 돌아갔다. 마을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가장 큰 객잔이다. 이 길을 피해서 가려면 빙 돌아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고생을 감수하고 있다.
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갈지혁이라는 존재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다.
갈지혁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다. 그저 땅에 꽂아 놓은 깃발 옆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처음엔 몇 명의 도전자라도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은 그 누구도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지만 그 압도적인 강함과 괴로워하며 쓰러지던 자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쉽사리 덤빌 엄두가 나지 않는 건 당연하다.
지금 객잔에서 손님은 진검백과 운하연, 그리고 풍객, 이렇게 세 명뿐이다.
주인이 발을 동동 구를 만도 하련만 오히려 대접은 최상이다. 전부 다 황금귀 이풍이 보내 준 금전 탓이다.
아예 객잔을 통째로 빌린 그들이 지불한 돈은 원래 객잔이 버는 매상의 세 배 이상이다.
처음엔 질색하던 주인도 이제는 오히려 이들을 환영하는 눈치다.
창가에 기대어 선 진검백은 아래에 앉아 있는 갈지혁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 거기 있어 봤자 아무도 안 덤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