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4화
‘좀 천천히 가면 오죽 좋아…….’
속내는 그랬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할 수 없는 입장이다. 운하연은 눈을 감은 채로 길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진검백은 그대로 드러누웠고 갈지혁은 소매에 들어가 있는 사황을 빼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갈지혁이 유일하게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것이 바로 사황 앞에서다. 사황 앞에서 갈지혁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보이기도 한다.
사황은 갈지혁의 다리 주변을 빙빙 돌면서 무엇인가를 노리는 듯했다.
너무나 평화롭다. 풍객 또한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금 운하연이 무엇을 하고 있나 궁금했다.
“이만 가볼까?”
드러누워 있던 진검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
막 쉬기 시작한 풍객으로서는 절로 나올 만한 말이다. 그러자 진검백이 옷에 뭍은 풀들을 털며 대답했다.
“급하니까요.”
“그래도 좀 더 쉬면 좋을 텐데…….”
“어서 가죠. 점창파에 가면 쉴 수 있을 테니까요.”
진검백의 말에 풍객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과연 점창이 자신들을 쉬게 해 줄 것인가? 죽이려고 하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점창파의 입구를 막고 있는 다섯 무인의 얼굴은 땀투성이다. 갑자기 몰려든 손님들 탓이다. 평소엔 손님이 오면 신분과 목적을 파악하고 안으로 들이곤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몇백에 달하는 자들을 모두 받을 수도 없을뿐더러 전부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왔다. 어이없게도 그들은 갈지혁이라는 자 하나 때문에 점창파에 온 것이다.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막고는 있지만 인파가 워낙 많다 보니 절로 땀이 배어 나온다. 게다가 이 중에는 무림에서 꽤 알아주는 고수도 있다. 무조건 못 들어오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망할 놈!’
문을 지키던 무인 중 하나인 곽태문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평소처럼 한가한 하루였어야 했다. 갈지혁이라는 놈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아치기 전까지는. 지금 간신히 이들을 막고는 있지만 이 소란스러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 밀지 마요!”
구경꾼 중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자 뒤에서 연달아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시장에 온 것만 같았다. 구파일방의 하나인 점창파의 주변이 이렇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겨우 그깟 놈 하나가 뭐기에…….’
솔직히 말해 이해할 수가 없다. 갈지혁이라는 자가 무림을 시끄럽게 하는 놈인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만한 인원이 소란을 떨 건 아니라는 거다.
문파를 깨겠다고 나타나는 자들은 많다. 물론 점창파 같은 대문파에 그렇게 도전하는 자는 드문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드물다 뿐이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동안 이렇게 관심을 받았던 자가 없다는 거다.
“좀 진정들 하십시오! 이곳은 점창입니다!”
그의 고함도 구경꾼들의 웅성거림에 묻혀 작게만 들렸다.
그때였다.
“갈지혁이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옆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네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갈지혁 패거리다.
“정말 왔어?”
“흐흐흐, 재미있겠군.”
사방에서 각기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탄하는 자도 있었고 내심 안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미쳤다고 중얼거리는 자도 있다. 갈지혁은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망설임 없이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지키던 다섯 명의 무인이 앞을 가로막았다.
“용무는?”
“점창의 검.”
“단단히 미쳤군.”
옆에 있던 곽태문은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앞을 막고 있는 자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갈지혁의 손이 닿은 사내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뜨더니 뒤로 밀려났다.
“컥!”
비명 소리와 함께 그는 벽에 부딪쳤다.
“이놈이!”
양쪽에 서 있던 점창의 무인들이 검을 뽑았다. 그러자 갈지혁이 양손을 들어 올려 검로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내 상대가 아니야. 비켜.”
“웃기지…….”
퍽!
양쪽에 서 있던 자들을 갈지혁은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들은 혈도를 제압당했는지 공중에 들린 채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구경꾼들의 입에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개중에서는 눈을 빛내는 자도 있었다. 운곽과 그를 따르는 사내였다.
“손이 꽤나 빠른 친구군요.”
“봤느냐?”
“대충.”
“놈, 역시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
“제가 언제 노인장한테 배웠다고 그럽니까?”
운곽은 들고 있던 지팡이로 사내의 머리통을 때렸다.
그렇지만 전혀 악의가 실리지 않은 행동이다. 원래부터 이런 사내였고, 이자 또한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리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아는 탓이다.
서로 스승과 제자라 말하지는 않지만 분명 둘은 그런 사이다. 사내는 운곽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언제나 그의 옆을 따라다닌다.
꽤나 젊어 보인다. 얼굴은 평범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이지적인 느낌을 풍긴다.
“아, 왜 때리십니까? 그나저나 저놈들은 갈지혁의 상대가 안 될 겁니다. 막아봤자 몸만 다치는 꼴이죠.”
그의 말대로였다. 갈지혁은 앞을 막고 있던 다섯 무인을 어렵지 않게 모두 쓰러뜨렸다. 그들은 갈지혁의 몸에 손도 대지 못했다.
운곽은 씨익 웃었다.
“이풍 녀석이 당할 만도 해.”
“분명히 강하네요.”
“그래서? 싸우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어르신과 말입니까?”
사내의 말에 운곽은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너와 말이야.”
“물론…… 제가 지지요.”
말을 마친 사내가 싱긋 웃었다.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곽은 미소를 흘렸다.
막 다섯의 무인을 제압한 갈지혁이 안으로 들어섰다. 운곽이 사내를 툭 치며 말했다.
“들어가 보지.”
말을 마친 그 둘은 인파에 섞여 점창파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안에는 많은 무인들이 갈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창의 무인들로 숫자가 많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온 이들을 가로막았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이봐, 난 이 싸움을 보려고 며칠을 달려왔다고. 좀 비켜 주지그래?”
꽤 나이가 있어 보이고 실력도 있어 보이는 것이 쉽게 상대할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길을 막은 무인이 고개를 꾸벅하며 말했다.
“어차피 이자는 이곳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곳에서 구경을 하도록 하시지요. 저희 점창의 힘을 보여드릴 테니.”
무인들은 구경꾼들의 발걸음을 막고는 갈지혁을 둘러쌌다.
이렇게 둘러는 쌌지만 이들은 합공을 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상대는 하나다.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다.
갈지혁은 주변을 슬쩍 살폈다.
진검백을 비롯한 운하연과 풍객은 갈지혁과 다소 떨어져 있다. 이 싸움에 끼기는 셋 모두 난처하다. 그리고 싸울 이유도 없다.
갈지혁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을 살피다 손을 천천히 내렸다.
“당신들 중에 제 상대는 없습니다.”
“뭐, 뭐?”
모욕적인 말에 점창의 무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갈지혁은 메고 있던 깃발을 내려 옆에 틀어박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깃대가 땅에 틀어박혔다.
“장문인을 찾아왔습니다만.”
“건방진 놈!”
참다못해 가장 앞에 있던 무인이 검을 꺼내듦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가 펼친 신법은 유운신법이다. 어떻게 본다면 점창의 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신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채 뽑아 든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갈지혁의 발길질에 뒤로 물러서야 했다. 가슴을 가격당한 그는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며 뒤로 물러섰다.
가슴을 움켜쥔 무인의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갈지혁을 막아서고 있던 무인 모두가 검을 꺼내 들었다. 더 이상 갈지혁의 행패를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합공을 하려는 듯하다.
그때 갈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 전부 죽는다.”
“웃기지 마라. 이…….”
무슨 말인가 하려던 사내가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갈지혁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는 순간 그는 혼절해 버렸다.
“좋게 이야기할 때 들어야지. 다른 놈들은 필요 없고 장문인을 모셔와.”
존대를 하던 말은 어느새 하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언제라도 독을 쓸 수 있도록 갈지혁의 손은 아래로 축 늘어져 있다.
아무도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가볍게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뿐이다. 그런데 쓰러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의 실력은 비슷비슷하다. 달려든다면 저자와 마찬가지 상황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장문인을 부를 수도 없는 입장이다. 겨우 이런 자의 등장에 장문인까지 나선다면 점창파의 수치다. 두고두고 무림에서 놀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그랬기에 그들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러서지 못했다.
점창이라는 이름을 위하여.
“역시 물러서지 않는군.”
그들이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걸 갈지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을 아는 탓이다. 말은 그리했지만 물러설 수 없을 거라는 걸 갈지혁은 알고 있다.
어차피 좋은 이유로 찾아온 게 아니다. 점창이라는 이름을 꺾으려고 왔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독인이라 가능하다. 독이라는 건 일대일의 싸움이 아니다. 단 일 수에 몇십 명, 몇백 명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이 독이다.
갈지혁은 품속에 슬며시 손을 집어넣었다. 이 정도 되는 자들을 제압할 독은 수도 없이 많다.
갈지혁이 움직이려고 하자 그들은 움찔했다. 그들도 은연중에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갈지혁이 손을 쓰면 버틸 재간이 없다는 걸.
그때 누군가의 몸이 새처럼 하늘을 날며 갈지혁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갈지혁은 손을 쓰지 않았다. 갈지혁의 앞에 내려선 것은 중년을 갓 넘은 듯한 무인이었다.
“그만!”
그의 외침에 엉거주춤 검을 들고 있던 점창의 무인들은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쉬며 검을 내렸다. 사내는 검을 내리는 점창의 무인들을 바라보고 이내 갈지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깔끔해 보이는 외모에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자다. 몸에서는 살기가 풀풀 날리고 손은 허리춤으로 내려가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는 위치에 두었다.
“자네가 갈지혁?”
“당신은?”
여태까지 갈지혁과 상대했던 점창의 무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자는 고수다.
“백변검(百變劍) 곽현.”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순간 주변에서 이 싸움을 보려고 모인 구경꾼들 사이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백변검 곽현이라는 이름 탓이다.
갈지혁도 백변검이라는 별호를 들어 본 적이 있다. 점창파의 모든 검법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구사하는 인물이다.
가벼운 검이 어느새 무겁게 변하고 빨랐던 검이 갑작스럽게 변화를 보인다.
그랬기에 곽현의 검은 막기가 어렵다. 너무나 기기묘묘한 탓이다.
곽현이 앞에 서자 갈지혁 또한 진지하게 변했다. 여태까지처럼 장난스럽게 상대하다가는 다칠지도 모른다.
“싸울 생각인가?”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지도 않았으니까요.”
“건방지군.”
“그래도 그게 사실이니까요.”
“무기는?”
갈지혁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이 두 손, 그리고 독.”
“좋아.”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곽현은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차르릉 하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뭔가 모르게 온몸에 있는 모든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다.
이런 느낌. 강한 상대를 마주했을 때만 느끼는 감정이다.
“강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잘못 왔어.”
“여태까지 시시했는데 다행인 것 같군요.”
“곧 느낄 거야. 상대를 잘못 만났다고.”
말을 마친 곽현은 가볍게 검을 움직였다. 그러자,
사방이 빛으로 가득했다. 검날이 갈지혁의 앞을 휘저었다.
분광검법(分光劍法)이다.
갈지혁의 몸이 뒤로 훌쩍 물러서면서 장법을 휘둘렀다. 수라독공을 운기하면서 휘두른 일장이다. 위력은 어마어마하다.
퍼펑!
막 검과 닿으려는 순간 곽현은 놀라운 기지를 보였다.
검법이 급격히 바뀌면서 그 기질도 바뀌어 버렸다. 극쾌검인 분광검법에서 힘을 위주로 하는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으로 검법을 바꾼 것이다. 그것은 실로 찰나의 변화로 그 누가 봐도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완벽했다.
그렇지만 갈지혁의 장법은 그 와중에서도 결을 파악해 냈다.
“치잇!”
곽현은 버텨 냈지만 자신이 밀렸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급히 검을 움직였다.
다시금 펼쳐진 분광검법은 갈지혁을 노렸다. 갈지혁의 발이 급히 움직이면서 분광검법을 피해 냈다.
쉐엑!
검이 아슬아슬하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실처럼 얇은 상처가 생겨 버렸다. 검이 귓가를 스치는 순간 갈지혁 또한 무엇인가를 곽현에게 뿌렸다.
곽현은 다른 손으로 급히 입과 코를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