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5화
위험한 순간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독을 제대로 흡입했을 게다. 피해 내긴 했지만 완벽하게 막아 낸 건 아니다. 곽현은 머리가 핑 도는 걸 느꼈다.
다행히 극히 미량의 독만 흡입한 탓에 금방 내공으로 내리누를 수 있었지만 그 위력을 실감하기에는 충분했다.
‘위험해. 제대로 당하면 질 게야.’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간격 밖에서만 싸운다면 승산이 있다.
물론 그것은 갈지혁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곽현의 착각이다.
곽현은 거리가 있다면 독을 뿌린다 해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지만 갈지혁이 사용하는 독의 수는 수백 가지를 훨씬 넘어선다.
거리를 준다면 유리한 것은 오히려 갈지혁이다.
조심스러워진 곽현이 주변을 돌며 기회를 노리자 갈지혁은 오히려 독을 쓸 여유가 생겼다.
갈지혁이 슬며시 웃었다.
끝이다.
곽현은 슬쩍 비틀어지는 갈지혁의 입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웃어?’
이 정도 거리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갈지혁이 다시금 독을 뿌린다 해도 피할 수 있고, 설혹 당한다고 해도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갈지혁의 손가락이 꿈틀하는 걸 본 곽현은 눈을 부릅떴다. 집중만 하면 피할 수 있다. 결국 독이라고 해도 몸에 들어가지 못하면…….
펑!
“크흑!”
뭔가가 다가온다고 생각하고 막 뒤로 몸을 빼려는 찰나 공중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했다. 그 파괴력이 엄청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가까이서 터져 버렸기에 곽현은 가슴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공중에서 터진 건 쏘아보낸 내기가 아니다. 그런 것이었다면 애초에 눈치채고 피했을 게다.
‘독?’
가장 먼저 생각해 낸 것은 독이다. 그리고 그것은 답이기도 했다. 곽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독이라는 건 전부 몸으로 스며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듯하다.
그리고 그 흡수되는 독의 위력 또한 천차만별이라는 걸 곽현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
갑자기 손의 힘이 쫙 풀리면서 들고 있던 검을 뚝 떨어뜨렸다. 곽현의 표정이 싹 변했다. 지금 갈지혁을 앞에 두고 검을 떨어뜨렸다.
‘위험해!’
검을 잡기 위해 곽현은 허리를 숙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마음은 분명 움직이라고 외쳤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몸은 멀쩡하게 땅 위에 꼿꼿이 서 있다.
이상하다. 자신의 몸 같지가 않다. 몸의 감각이 모두 마비됐다.
“꼭두각시가 된 기분은?”
“꼬, 꼭두각시?”
갈지혁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곽현은 갑자기 뒤로 확하고 날아가 쓰러졌다. 벽에 세게 틀어박힌 탓에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현의 몸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독을 쓰는 사람에게 거리를 주다니…… 당신, 어지간히도 무지한 사람이군요.”
“뭐얏! 크아악!”
으득!
곽현은 억지로 손을 움직이기 위해 모든 신경을 쏟아 부었다. 그러자 팔이 뒤로 비틀렸고, 곽현은 비명을 질렀다. 숨조차 쉬기 힘든 고통이 전신을 감싼다.
그제야 곽현은 독이라는 걸 자신이 너무 얕봤다는 것을 느꼈다. 내공을 움직이자 혈도 곳곳을 막고 있는 이상한 이물질이 느껴진다.
곽현은 그것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분명 이것이 지금 자신의 몸을 이상하게 만든 요인일 것이지만, 문제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이것들을 모두 없앨 수 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갈지혁이 기다려 줄 리 없다.
‘당했군…….’
씁쓸하다. 상대를 너무 얕봤다. 그래서 이런 우스운 꼴이 되어 버렸다.
……핑계다. 상대를 얕봤든 아니든 당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그런 걸 주입시켜 봤자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한 손이라도 순간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아직 승패는 모른다. 그것이면 족하다.
모든 내공을 오른손 하나에 집중했다.
손가락 하나가 꿈틀했다.
‘좋아. 가능해.’
이번 한 수에 모든 걸 걸었다. 마지막인만큼 곽현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갈지혁이 다가오고 있다. 곽현은 천룡무상신공(天龍無上神功)을 최대한으로 끌어 모았다. 일순 그의 손에서 터질 듯한 고통이 일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찰나의 시간이지만 오른손이 자유를 찾았다는 거다.
‘지금이다!’
파악!
사일검법(射日劍法)이다. 점창파 최고의 검법이라는 사일검법을 곽현은 기습적으로 펼쳐낸 것이다.
움직이지 못한다고 방심하고 있다면 분명히 당한다. 아니, 긴장하고 있어도 사일검법의 빠르기는 피할 수 없다.
검은 정확하게 갈지혁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성공했다는 느낌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렇게까지 다가갔는데 사일검법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와아!”
구경꾼들 입에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막 갈지혁의 이마를 꿰뚫을 뻔했던 검이 갑작스럽게 멈췄다. 갈지혁의 이마와 검날의 사이는 손가락 반 마디도 되지 않았다.
“점창의 사일검법. 빠르다는 말은 들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빠르군.”
곽현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막 탄성을 질렀던 구경꾼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중에 곽현이 갑자기 이렇게 된 이유를 아는 건 단 둘뿐이었다.
무림사괴의 운곽과 그의 제자. 그 둘을 제하고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갈지혁은 사일검법을 펼치는 순간 독을 사용했다. 그 짧은 시간에 갈지혁은 독을 하독한 것이다.
이번에 사용한 독은 그 중독되는 속도가 엄청난 것이다. 코로 들어가는 순간 이미 당했다고 봐도 된다. 그랬기에 그토록 빠른 사일검법을 채 펼치지도 못하고 이렇게 쓰러져 버린 것이다.
구경꾼들의 얼굴에 흥미가 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다. 정말 이 사내가 점창파를 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저 장난이었다. 유희에 불과했다. 심심한 무림에 하나의 활력소라고만 생각했다. 점창파의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도 그랬고 그 많은 무인들을 손쉽게 쓰러뜨릴 때도 그랬다.
그런데 곽현을 쓰러뜨리는 순간 그 모든 게 변했다.
곽현이라면 점창파에서 손꼽는 고수다. 그가 채 무엇인가 해 보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독이라는 것의 위력도 알았다. 많은 무인들을 단 일 수에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야 독이라면 그런 것도 가능하다는 걸 뇌리에 심을 수 있게 됐다.
갈지혁은 쓰러진 곽현을 두고 그대로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구경꾼들 또한 그런 갈지혁의 뒤를 쫓았다.
곽현에게 쓴 건 마비독이다. 인체에 치명적이지 않으니 죽을 걱정은 없다.
갈지혁이 향하는 곳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점창파에 왔다. 점창이라는 이름 앞에 독왕이 있음을 보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사람을 꺾어야 한다.
어느 문파에나 그 문파를 대표하는 자가 있다. 그자를 꺾지 않고서는 그 문파를 꺾었다고 할 수 없다.
바로 장문인이다.
지금 갈지혁은 장문인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갈지혁의 뒤를 진검백과 운하연, 풍객이 뒤쫓았다. 그들은 싸움에는 끼어들고 있지 않지만 갈지혁이 가는 길을 함께하고 있다.
무림사괴의 하나인 운곽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옆에 있는 제자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사내는 옆구리를 손으로 감싸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운곽은 그런 그의 반응을 싹 무시했다.
“재미있어. 하독하는 걸 봐서는…… 당문의 놈은 결코 아니야.”
“그럼 어디란 말이죠?”
“모르지. 그런데 다소 낯이 익어.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데…….”
운곽은 머리를 긁적였다.
늙긴 늙은 모양이다. 분명 본 것은 확실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콧소리를 냈다.
“에잉! 신경 쓸 필요 없지. 따라다니다 보면 알 수 있는 일일 테니까.”
말을 마친 운곽은 갈지혁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놓칠 수는 없다. 점창파의 장문인과 갈지혁의 싸움.
만약 장문인이 진다면…… 그는 많은 걸 잃을 게다.
* * *
갈지혁과 그의 행보를 구경하러 온 자들이 점창파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점창파의 무인들은 갈지혁을 막으려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그들 또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입장이다.
애초에 점창파의 장문인인 소절상은 갈지혁이 이곳까지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단신으로 점창의 무인들을 꺾고 이곳까지 올 수는 없다.
막 여유 있게 차를 마시던 소절상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거처로 찾아와 건넨 수하의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래서…… 지금 그놈이 어디까지 왔다고?”
“문무관까지…….”
문무관이라면 거의 중앙까지 왔다고 봐야 옳다. 그곳에서 이곳까지는 걸어서도 일각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너희는 무얼 했기에 그깟 잡배 놈 하나를 막지 못했느냐!”
소절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보고를 하러 왔던 수하는 찔끔했다. 그렇지만 그 또한 할 말은 많았다.
‘그런 괴물 같은 놈을 어떤 수로 막으라고…….’
목구멍까지 반발심이 가득한 말이 튀어 올랐지만 그는 끝내 내뱉지 못했다. 비록 마음에 안 든다 해도 그는 점창파의 장문인이다.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하다고 될 일이야!”
“그게…… 그놈이 하도 괴물 같은 놈이라…….”
“괴물? 그렇다고 해서 점창파가 그런 놈 하나에게 흔들려?”
“백변검 곽현 어르신도 당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고함을 지르려던 소절상이 입을 닫았다.
백변검 곽현까지 당했다는 말을 들으니 순간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소절상이라면 점창파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다.
잠시 침묵하던 소절상이 말했다.
“어떻게 패했지?”
“몇 번 손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손 하나도 날리지 못했다고?”
“갈지혁은 멀쩡합니다.”
곽현이 패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상대했던 갈지혁은 멀쩡하단다. 적어도 손 하나쯤은 날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물었거늘 예상은 빗나갔다.
곽현이라면 소절상 또한 쉽게 상대하지 못한다.
“패배 요인은?”
“독에 당했습니다.”
“독? 멍청하긴.”
그랬다. 독이라서 당했을 게다. 정정당당한 싸움이었다면 곽현이 지지 않았을 게다.
“지금 갈지혁이 점창파를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딱히 명을 받은 자들도 없고 막을 만한 자들도 없는지라 장문인께서 나서주셔야…….”
소절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지혁이라는 인물을 상대하는 데 자신이 나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가 점창파를 시끄럽게 하는 걸 놔둘 생각은 없다.
그리고 굳이 자신이 싸울 필요도 없다. 자신이 움직이는 수하 몇 명이라면 갈지혁 정도를 제압하는 데 어렵지 않을 게다.
“가자.”
“예!”
사내의 뒤를 따라 소절상은 걷기 시작했다. 그는 문 밖을 나서며 하인에게 무엇인가 지시를 내렸다.
굳이 자신의 손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아주 만약의 일이 벌어질 것도 대비해서다.
‘내가 질 리는 없지. 그깟 독인 하나에게.’
당문의 문주인 당려환이 와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고 소절상은 확신했다.
독이라면 당문, 당문의 가주인 당려환도 문제가 되지 않는 이 마당에 제대로 된 사문조차 알지 못하는 갈지혁 정도야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절상은 허리에 찬 자신의 애검(愛劍)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갈지혁은 자신의 주변을 감싸고는 있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점창파의 무인들을 하나씩 살폈다.
모두 죽어 있다. 눈빛에서 투지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 중에서 갈지혁과 싸우려는 자는 없다. 모두가 시간을 끌려고 하는 듯했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됐겠지?’
장문인이 올 게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에 필적한 만한 고수들을 보낼 것이다. 이렇게 약한 자들이나 상대하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다.
시간을 끌어 봤자 좋지 않다는 건 갈지혁이나 점창파나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다.
주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구경꾼들의 눈을 갈지혁은 잘 알고 있다. 평소였다면 거치적거린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눈들이 필요하다. 이들의 입이 곧 무림에 많은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야 한다.
그 누구도 쉽사리 갈지혁에게 이 일을 추궁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승부도 내야 한다.
사람을 죽여서는 더 더욱 안 된다. 대낮에 갑자기 쳐들어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살인마라는 느낌만 가지게 하지 정당하다거나 대단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지는 않는다.
앞에서 갈지혁을 막고 서 있는 점창파의 무인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다.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그들 중 아무도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나와 싸울 자는 아무도 없는가?”
갈지혁의 말에 점창파의 무인들 중 일부가 꿈틀했다.
비록 실력이 갈지혁보다 아래라는 걸 알아도 덤비려 드는 무골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갈지혁에게 덤비지 않고 있는 것은 위에서 내려온 지시 때문이다.
아직은 싸우지 말고 참고 있으라는.
그들로서는 입술을 꽉 깨물고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주변에 있는 자들의 눈도 쉽사리 무시할 수가 없다. 이들은 분명 밖으로 나가 점창파에 대해서 떠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