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106화 (106/200)

# 106

6화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런 자 하나에게 점창파가 시끄럽게 됐다는 것은. 지금 누군가가 나타나 갈지혁을 쓰러뜨린다고 해도 분명 한동안 무림에서 이 일이 회자될 것은 분명하다.

“아무도 없다면 점창파의 현판은 내가 가져가도 되는 건가?”

여기까지 나오자 아무리 참으라는 말을 들었어도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현판이라면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이 다가 아니다. 현판을 빼앗긴다는 것은 그 문파 자체가 무릎을 꿇었다는 소리가 된다.

만약 갈지혁이 현판을 떼려고 한다면 그들은 참았던 살검을 휘두를 게다.

갈지혁 또한 그런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오지 않으려고 했어도 지금 이 말을 듣게 된다면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게다.

막 갈지혁이 몸을 돌렸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멈추어라!”

“……?”

갈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고, 갈지혁을 에워싸고 있던 자들이 반으로 쫙 갈라졌다.

갈지혁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소절상 장문인입니까?”

“그래. 그것보다 지금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나 해서 되묻는 것인데…… 지금 뭐라고 했느냐? 우리 현판을 가져간다고 한 것 같은데?”

“틀리지 않습니다.”

갈지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 문파의 현판이 어떠한 의미를 지녔는지 모르는 것은 아닐 텐데?”

“물론이지요. 전 다만 점창파에서 아무도 덤벼들지 않기에 이미 발아래에 두었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지요.”

갈지혁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소절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소절상은 인내라는 걸 모른다. 그런 그가 참을 리가 없다.

“아무래도 네놈…… 죽어야겠구나.”

소절상의 협박 어린 말투에도 갈지혁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바라던 바다. 점창파를 꺾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장문인인 소절상을 꺾어야 한다.

점창제일검이라고 불리는 소절상이다. 비록 편협하고 생각이 짧은 인물일지는 모르나 그 실력만큼은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다.

쉽게 상대할 수 없다. 어떠한 의미로는 여태까지 만난 자 중에서 최고의 실력자다.

갈지혁 또한 그것을 알기에 소절상을 자세히 살폈다.

점창제일검답게 그의 허리에 차여져 있는 검은 범상치 않아 보인다. 아마도 무림에서 알아주는 명검일 게다.

갈지혁은 소절상이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미적거릴 뿐 검을 뽑거나 갈지혁을 도발하지 않았다.

‘뭐지?’

갈지혁이 먼저 손을 쓰기도 뭐한 상황이라 그 또한 소절상을 바라만 봤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갈지혁은 왜 소절상이 가만히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멀리서 네 명의 인물이 걸어온다.

그리고 그때 내뱉은 소절상의 한 마디는 갈지혁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뒷받침했다.

“왔군.”

소절상은 갈지혁과 싸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수하들로 갈지혁을 제압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점창파의 최정예들이라고 봐야 옳을 게다.

전에 갈지혁에게 왔던 자들은 꽤나 젊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 노인으로 환갑은 훨씬 넘은 듯했다. 이 정도라면 어떠한 무공을 익혔든 그 깊이가 보통이 아니리라.

“장문인, 무슨 일이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를 제압해야겠네.”

노인들은 고개를 돌려 갈지혁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갈지혁이 그다지 나이를 먹지 않았다는 것을 네 노인 모두 알아차렸다.

“혹시 갈지혁?”

소절상에게 말을 걸었던 노인은 갈지혁을 보자마자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소절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

노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갈지혁을 바라봤다. 재미있는 놈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 점창파를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을 보아 꽤나 많은 점창의 인물들을 쓰러뜨렸을 게다.

노인은 멀리에 있는 점창의 무인 중 하나에게 말했다.

“죽은 자의 수는?”

“어, 없습니다. 모두 부상만 당했을 뿐, 죽은 사람은 아무도…….”

“됐다.”

그것만 알면 됐다.

적어도 갈지혁에게 살수를 펼치지 않아도 된다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가 점창의 무인을 죽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쪽 또한 마찬가지로 답해 줄 것이다.

노인은 나머지 세 노인에게 각각 전음을 보냈다.

[살수를 펼치지 말게.]

세 노인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쉽사리 그의 제안에 수긍했다.

노인이 말했다.

“만나서 반갑네.”

“좋은 인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한창 무림을 시끄럽게 하는 자를 만나니 기분이 묘하군.”

싸워야 한다. 그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노인은 갈지혁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의 알 수 없는 비무행도 그렇고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묻고 싶다.

그건 비단 노인뿐만이 아니라 무림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다.

갈지혁이 천천히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질세.”

“전 장문인을 꺾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를 넘어야지.”

“대충 대화는 끝난 것 같군요.”

“나도 그리 생각하네.”

말을 마친 노인이 빙긋 웃었다.

어차피 둘 모두 목적이 있다. 갈지혁은 장문인을 제압하고 점창이라는 이름을 꺾으려는 것이고 노인들은 그걸 막아야 한다.

점창파의 장로들로서는 당연한 임무다. 비록 일선에서 물러난 자도 있긴 하지만 장문인을 나서게 할 수는 없다. 장문인이 만약 패한다면 그건 점창파의 몰락을 의미한다.

혹여나 있을 위험은 미리 제거한다. 그게 장로들의 임무이기도 했다.

노인은 가장 옆에 서 있던 반백의 노인을 불렀다. 이 중에서 가장 젊어 보이는 노인으로 네 명 중 막내였다.

실력을 알아보려고 그를 내보낸 것이다. 무작정 합공을 하기엔 그 네 명의 자존심은 너무나 강했다.

“난 쾌검을 사용하네.”

노인은 미리 말했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웬만한 자가 아니라면 이처럼 자신이 어떠한 검을 펼칠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자 갈지혁도 대꾸했다.

“오른손 하나.”

“……자신감이 과하군.”

“붙어 보면 알 겁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지.”

화가 났다. 자신을 얕보는 듯한 그 태도에 장로급의 노인이 분노하지 않을 리 없다. 그렇지만 그는 예정했던 대로 검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다쳐도 갈지혁이 자처한 일이다.

노인은 자신의 모든 내력을 검에 쏟았다.

하얗게 검이 하늘을 갈랐다.

점창의 검은 빠름에 가장 큰 무게를 둔다.

노인의 검이 과연 그러했다. 빠르기가 섬광과도 같았다. 왜 장문인인 소절상이 이들을 이곳에 부른지 이해가 간다. 이들이라면 능히 갈지혁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얕본 것이 아니다. 최고의 강수를 둔 것이다.

갈지혁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 애초부터 노인들을 얕보지 않았다. 그들은 갈지혁이 보기에도 강한 고수들이다.

점창의 실세라고 봐야 옳다.

분명 점창의 검은 빨랐지만 갈지혁의 몸 또한 민첩했다.

검이 아슬아슬하게 갈지혁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점창의 검이 빠른 건 비단 일수로 평가하는 게 아니다. 바로 이어지는 검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빨랐기에 점창의 검을 쾌검이라 부르는 게다.

바로 날아든 검은 갈지혁을 당장이라도 이등분해 버릴 것처럼 빨랐다. 막 갈지혁의 몸이 갈라지는 듯했다. 아니, 두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검을 휘두른 노인은 그대로 뒤로 검을 휘둘렀다.

그곳에는 몸이 반으로 갈라졌던 갈지혁이 있었다.

너무나 빨랐다. 그랬기에 환영이 잘려 버린 것이다.

뒤로 휘두른 검 또한 갈지혁이 어렵지 않게 피해 내자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형환위라…….”

실로 놀라운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약관의 사내가 이런 경지에 이른다는 건 믿기 어렵다. 그렇지만 눈으로 봤으니 믿을 수밖에 없는 건 당연했다.

노인은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시간을 끌었다가 독이라는 귀찮은 장난에 놀아날지도 모른다. 그 전에 끝낸다.

비록 갈지혁의 능력이 놀랍다고는 하지만 노인은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검을 든 지 어언 오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런 자신이 패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다.

길게 숨을 몰아쉰 노인의 검이 재차 움직였다. 이번에도 갈지혁은 어렵지 않게 피해 냈다.

분명 공격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갈지혁이 물러서자 노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몇 번 더 같은 일이 반복되자 노인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놀리는 것 같다. 공격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러서고 있다.

“날 놀리는 게냐? 왜 공격을 하지 않느냐!”

“오른손 하나. 약속을 지키려는 것뿐입니다.”

“……정말 날 오른손 하나로 끝내겠다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다. 왜 갈지혁이 공격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았다. 오른손으로 공격할 기회가 아니었다 생각해서 물러선 것이다.

농담인 줄 알았다. 그저 치기 어린 말인 줄 알았다.

그렇지만 아닌 모양이다. 처음부터 갈지혁은 노인을 오른손 하나로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대단한 배짱이라는 생각보다는 수치심이 먼저 인다. 노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가 난다. 태어나서 이런 모멸감을 느껴본 적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처음이다. 검을 든 이후로 이처럼 무시당해 본 적이 없다.

“죽여…… 버린다.”

이를 으드득 간 노인의 얼굴에 살기가 인다. 진짜 살검을 펼치려는 것이다.

갈지혁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노인의 화를 더욱 돋웠다.

“오냐! 네놈이 언제까지 그딴 장난을 칠지 두고 보자!”

파파팍!

노인의 발이 땅을 강하게 밟았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노인의 손에서 무자비하게 검기가 쏟아졌다. 갈지혁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콰쾅!

강한 소리와 함께 갈지혁의 몸 또한 공중으로 솟구쳤다. 설마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노인은 급하게 몸을 움츠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렇지만 검은 아슬아슬하게 갈지혁의 몸을 스쳤다.

갈지혁의 오른손이 정확하게 노인의 가슴을 후려쳤다.

노인 또한 상당한 고수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발로 갈지혁을 밀어내려 했다.

발이 갈지혁의 어깨를 밟았다.

‘성공이다!’

이 상태라면 공격할 수 없다.

노인은 우선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갈지혁의 소매에서 무엇인가가 튀어 나왔다.

펑!

“캑!”

노인은 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엇인가가 터지면서 노인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끈적거리는 무엇인가가 손에 묻어났다.

피다.

눈 부분이 찢어져 시야가 새빨갛게 보인다. 피 탓이리라.

“오, 오른손만 쓴다고 하더니…….”

“방금 전에는 얕본다고 뭐라 하고 이번에는 어겼다고 뭐라 하는 겁니까?”

“큭…….”

“미안하지만 방금 건 독입니다. 그것 또한 제 오른손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노인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갈지혁의 말에 뭐라고 한다는 것은 오른손만 쓰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꼴이 아닌가.

오른손만 쓰겠다는 갈지혁의 말에 분노한 자신의 꼴이 우스워질 게다.

화가 나지만 노인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분노를 검으로 돌렸다.

세운 검이 날카롭게 빛난다.

“이제 끝내죠.”

갈지혁의 말엔 확신이 서렸다.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오냐, 어디 한 번 와보거라.”

질 수 없다. 진다면 자신이 여태까지 해온 모든 것이 무너진다.

둘은 싸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승자는 오직 하나뿐이다.

쇄액!

상대를 벨 수 있다.

노인은 그리 생각했다. 그의 몸이 부웅 하고 허공을 날아올랐다. 세운 검이 날카롭게 요기를 내뿜는다.

갈지혁은 손을 휘둘렀다. 무엇인가 암기가 쏟아져 나온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기가 담긴 것이 공격해 온 것도 아니다. 노인은 직감적으로 갈지혁이 독을 사용했다고 느꼈다.

무엇인지 모른다. 그것이 어떠한 효력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갈지혁의 자세가 망가졌다. 지금이라면 벨 수 있다. 독이라고 해도 해독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싸움을 끝낼 이 기회를 노인은 놓치지 않았다.

막 검을 휘두르던 노인의 몸이 멈칫했다.

공중을 날아오르던 그 모습 그대로 땅에 쓰러져 버린 것이다. 갈지혁은 태연하게 그런 노인의 옆을 걸어갔다.

이제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다. 만약 노인이 일어나 기습이라도 한다면 그대로 등을 내줘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도 갈지혁은 노인을 완전히 무시했다.

끝냈다는 자신이 있는 게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행동할 수가 없다.

“무슨…….”

“삼절사의 독. 세 걸음을 걷는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온몸에 독이 퍼진다. 목숨은 앗아가지 않지만…… 정신을 잃는다.”

“고맙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