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7화
친절한 설명이 고맙다는 건지 그를 죽이지 않아 고맙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했을 수도 있고 오히려 반대일지도 모른다.
갈지혁은 나머지 노인들을 바라봤다. 세 노인이 애매한 표정으로 갈지혁을 바라보고 있다.
갈지혁이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한 번에 덤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뭐, 뭐야?”
덩치가 좋은 노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들이 이런 대우를 받을 위치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모두 상대를 얕봐 패배한 막내 때문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런 그와는 달리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은 반대였다. 그는 독에 대해 나름대로 알고 있다. 이 네 노인은 독황독립문과의 싸움에 끼지 않았다.
그 시대를 살아온 자들이긴 하지만 이 넷은 그 당시 문파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우두머리 노인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그는 이것저것 들은 것이 많았다. 일수만독의 무위부터 해서 독에 대한 무서움까지.
잠시 잊고 지냈다. 그렇지만 갈지혁을 보니 다시금 상기하게 됐다.
자신이었다고 해도 방금 전 막내가 했던 것처럼 공격을 가했을 게다. 살을 주고 뼈를 친다고 생각하고 검을 날렸을 테고, 결과는 오히려 뼈를 주는 꼴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가 흥분하는 덩치 큰 노인을 가볍게 저지하며 말했다.
“우리가 독을 얕봤군. 사과하지.”
“형님!”
“조용히 햇!”
뭐라 말하려는 노인을 호통으로 잠재운 그가 말했다.
“비겁하다는 건 알지만 자네가 독을 쓰니 합공을 하지. 이해하는가?”
“오히려 바라던 바입니다.”
노인은 갈지혁에게 합공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주변에서 구경하던 자들이 다소 소란스럽게 중얼거렸다. 점창파가 합공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건 갈지혁을 일대일로는 싸워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나머지 두 노인은 대형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겁을 먹은 것처럼 뒤로 빼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록 막내가 졌다 하지만 결코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슨 수에 당한지는 모르지만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표정이 좋지 않은 건 당연하다.
그때 두 노인의 귀에 전음이 흘러들었다.
[방심하면 진다. 최선을 다해라.]
덩치의 노인도 전음을 보냈다.
[형님, 지금 저들이 비웃는 것을 보십시오. 지금 합공을 하면 웃음거리밖에…….]
[지는 것보다는 낫지.]
[지다니요? 저희가 말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가 있는 노인은 네 명 중 셋째로 맨주먹으로 소의 두개골을 깬 적도 있는 괴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렇지만 대형이 그리 말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게다. 그들은 모두 대형을 믿는다.
[독은 일수에 여러 명을 제압할 수 있다. 방심하면 온몸이 마비될 게야. 하나씩 싸우다가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다소 손가락질 받을지 모르지만 합공으로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다소 부끄럽지만…… 내 말을 따랐으면 한다.]
당시엔 믿기 어려웠지만 말로만 들었던 독에 대한 무서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비록 소문이라는 것이 과장되기 마련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개중에 이 할 이상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두 노인은 그를 따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창피하지만 확실하게 끝낸다. 명예를 버리는 대신 확실한 실리를 챙기려는 것이다.
세 노인이 모두 검을 꺼내 들었다. 검이 유명한 점창파답게 셋 모두 검법에 일가견이 있다. 셋의 검은 모두 다르다.
극쾌를 추구하는 첫째, 빠름과 무거움 모두를 섞으려는 둘째, 그리고 무식하다고 봐도 될 정도의 괴력을 지닌 무거운 검의 달인 셋째.
셋은 마치 진법을 펼치려는 것처럼 갈지혁을 둘러쌌다.
갈지혁은 겉보기엔 태연했지만 속으론 내심 긴장했다. 방심할 수 없는 상대들이다. 이들은 점창파의 실질적인 힘이라고 봐도 된다. 이들을 제압하고 장문인과 싸울 생각이다. 그때쯤이면 많은 것이 변해 있을 게다.
‘독으로 제압한다.’
검법이나 장법 등을 펼칠 생각은 없다.
오직 독이다. 독으로 제압하지 않으면 셋의 합공에 부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갈지혁은 질 거라는 생각을 눈곱만치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무공에, 그리고 스승인 일악천이 만들어준 이 독공과 독에.
세 명의 검이 동시에 움직였다.
엄청난 쾌검, 그리고 빠른 듯해 보이지만 무거운 검. 오로지 힘만으로 단숨에 갈지혁을 뭉갤 듯이 다가오는 검.
세 개의 속도는 모두 다르다. 그리고 방향도 다르다. 아마도 상당히 오래 손을 맞추어온 듯하다. 방금 막 쓰러진 노인까지 해서 넷이었다면 이보다 더욱 완벽한 검진을 만들어 냈을 게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쓰러졌다.
갈지혁은 셋이 달려들기 직전부터 손가락을 꼬물거리고 있었다.
셋이 동시에 합공해 들어왔고 그것을 피하며 갈지혁의 눈이 사방을 살폈다. 기회라면 지금이다.
그대로 셋과 싸운다면 제아무리 갈지혁이라고 해도 쉽지 않다. 이들은 합공에 능숙하다.
갈지혁은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마찰과 동시에 독분이 퍼져 나갔다. 보통의 독으로는 제압할 수 없다.
갈지혁은 다소 강도가 센 독을 사용하려고 애초부터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 경험이 풍부한 자들이다. 그렇게 쉽게 당할 것이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이 외쳤다.
“호흡을 멈춰!”
기다렸다는 듯 나머지 둘도 호흡을 멈추며 그대로 갈지혁을 향해 쇄도해 들었다.
그들 딴에는 독에 대한 방비를 한다고 한 것이지만 그건 상대를 몰라서 한 행동이다. 독이라면 비단 호흡을 통해서만 흡수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갈지혁이 마음먹고 사용한 독이라면 더했다.
갈지혁은 몸을 가볍게 뒤로 몇 걸음 옮겼다. 검이 허공을 가른 뒤 재차 날아들려고 했다. 그런데 검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이긴 했는데 위력이 실리지 않았다고 해야 옳다.
그건 옆에 있는 노인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유독 뒤에 처져 있는 가장 나이 든 노인만이 멀쩡한 상태였다.
“내공이 끊깁니다.”
검을 축 늘어뜨린 덩치 큰 노인이 말했다.
옆에 있는 다른 노인 또한 말은 하지 않지만 마찬가지 상황인 듯했다.
노인은 그것이 갈지혁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소 놀랐다. 호흡을 완전하게 멈췄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독이 위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호흡이 아닌 다른 경로로도 중독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다행인 것은 심한 독성은 없는 듯했다. 그저 내공의 흐름을 끊어 놓는 독인 모양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이긴 하다. 싸움에서 갑자기 내공을 쓸 수 없다면 그건 이미 죽었다고 봐야 옳다.
노인은 가볍게 손짓했다. 뒤로 물러서라는 신호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들이 귀에 거슬린다. 구경꾼들이라면 조용히 구경이나 할 것이지 뭐가 이리도 말이 많단 말인가.
가뜩이나 합공을 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그다. 무인답게 일대일로 정정당당하게 대결을 펼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입장이다. 점창파라는 이름 탓이다.
그러던 와중에 둘이 갑작스럽게 내공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됐다.
일부러 물러나라고 했다.
어차피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걸 알아서이기도 했지만 지금이라면 일대일로 싸우는 것이 당연하게 된 상황이다. 왠지 모르게 이러고 싶었다.
“일대일이군.”
“당신은 절 못 이깁니다.”
“너야말로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군.”
“당신이 아니라 상대가 누구든 마찬가집니다. 저의 스승님을 빼곤 아무도 날 이길 수 없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그리고 그럴 만한 실력도 있다. 저만한 나이에 이 같은 일을 벌인 것을 보면 분명 대단한 놈인 건 사실이다.
“너무 시간 끄는 거 아닌가?”
장문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노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애송이 놈이…….’
장문인인 소절상은 너무 생각이 짧다.
무공에는 분명 뛰어난 기재이다. 그랬기에 전대 장문인은 그에게 자리를 넘겨주었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고 한 문파의 수좌로 지내다 보면 나름대로 생각이 생길 거라고 믿은 탓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그를 부탁했다.
그랬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함께했다.
언젠가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 하나만 믿고 버텨 왔다.
십 년이 지났다.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은 점점 그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거의 포기 단계에 이르렀다고 봐야 했다.
노인은 검을 들었다.
이 검은 장문인을 위해 든 것이 아니다. 오로지 점창, 그것 하나만을 위한 검이다.
“기다리시오. 곧 끝낼 테니.”
“그래줬음 고맙겠군.”
말을 마친 노인은 갈지혁을 향해 검끝을 겨누었다.
단 한 번이다. 그걸로 승부를 짓지 못하면 노인은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
“구경꾼들도 많이 모였는데 빨리 끝내지.”
갈지혁은 노인의 검끝을 노려봤다.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갈지혁은 노인이 이번 한 수에 모든 것을 걸었음을 알아차렸다.
극쾌의 검일 것이다. 피하지 못하면 베인다.
사일검법(射日劍法)이 노인의 손에서 펼쳐졌다. 점창의 검 중에서 가장 빠르고 거기에 강맹함까지 갖춘 검법이다.
갈지혁 또한 두 손에 내공을 집중했다. 독으로 상대한다고 해도 몇 수 정도는 받은 후에야 가능할 것 같다.
그만큼 노인의 검은 빨랐다.
팍! 팍!
갈지혁의 눈이 검을 잡아냈고 아슬아슬하게 세 차례 손바닥으로 검을 밀어냈다. 그렇지만 검날은 집요했다. 끝까지 갈지혁의 가슴을 갈라놓으려는 듯이 쫓아왔다.
갈지혁의 손에 내공이 몰렸다. 결을 파악해 냈다.
‘지금이다!’
갈지혁의 손바닥이 검의 어느 면과 부딪치는 순간 쇠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검날이 퉁겨 나갔다.
노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일었다.
갈지혁은 검날을 밀어내고 공격을 가하려 했지만 이미 노인의 검이 아래로 향한 후다. 막 움직이던 갈지혁이 멈추어 섰다.
노인이 찬찬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내가 졌네.”
분명 더 싸울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갑작스럽게 검을 내린 것이다. 구경꾼들 또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노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소절상은 표정을 구겼다. 그가 물러섰다. 그것도 제대로 싸운 것 같지도 않은데 물러선 것이다.
그가 물러서니 뒤에 있던 자들도 쓰러져 있던 막내를 부축하고 따라가기 시작했다.
장문인은 그다. 그런데 저 노인네들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돌아섰다. 점창의 무인이라면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
싸우라고 했으니 싸워야 했고 죽기 전에 검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이번 일이 끝나면 그 죄를 물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장문인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 아무리 그 네 명이 점창파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 해도 이 정도의 일이라면 벌을 내리기에 충분하다.
‘고맙군그래.’
소절상은 갈지혁을 바라봤다.
저자 덕분에 눈에 가시 같던 네 명을 단죄할 명분이 생겼다.
남은 건 이제 저놈을 처리하는 것뿐.
소절상이 검을 꺼내 들었다. 자신까지 나서게 될 줄은 몰랐다. 네 명의 노인이 나타난 순간 자신은 검을 뽑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보다 갈지혁의 무위가 높다고는 느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소절상의 애검(愛劍)이 밝은 빛을 토해 냈다.
“너 같은 놈에게 내 검을 휘두르게 될 줄은 몰랐군.”
갈지혁은 몸을 돌려 소절상을 마주했다. 사실 맘 같아서는 다른 자들을 불러 갈지혁을 상대하게끔 하고 싶다.
장문인이라는 신분으로 이런 자와 싸운다는 것이 그는 못내 짜증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더 시간을 끌 수도 없는 입장이고, 설령 누군가를 부른다 해도 갈지혁의 실력이라면 시간만 길어질지 모른다고 판단해서다.
소절상이 검을 뽑아 들자 갈지혁의 표정 또한 진지해졌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상대의 실력을 잘 아는 탓이다.
소절상은 속이 좁다. 그리고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을 잘 하다 보니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그가 장문인이 된 건 오로지 하나 때문이다.
무공에 대한 재능.
그것 하나만큼은 점창 제일이었다. 그랬기에 전대 장문인은 소절상의 성격을 알면서도 그에게 장문인이라는 위치를 넘겨준 것이다.
가볍게 검을 툭툭 흔들고 있지만 허점이 없다.
“꽤 재미있게 싸우더군.”
“…….”
“독? 그거 나한테도 통하나 해 보지그래.”
갈지혁은 말없이 소매를 흔들었다. 바람을 타고 가루가 소절상의 코 주변을 맴돌았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가 이내 다시금 생기를 머금었다.
이번엔 갈지혁의 표정이 굳었다.
비록 절대 극독은 아니라 하지만 이토록 쉽게 해독할 줄은 몰랐다.
“꽤나 텁텁한 맛인데?”
담담한 어투로 내뱉는 말은 더욱 가관이다.
독의 맛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당문의 문주도 그러했지만 점창파라는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다. 그 실력이 낮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