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12화
옆에 있던 자들이 나가자는 듯이 의원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의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짐을 챙겨 방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나가자 잠시간 침묵했던 소절상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
“그래, 상아.”
남들이 있을 때는 서로에게 엄격했지만 둘만이 있을 때는 서로에게 허물이 없는 둘이다.
소절상이 점창에서 가장 믿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부터 소절상을 옆에서 돌보았던 인물인 곽과는 벌써 팔십을 훌쩍 넘어선 노인이다. 인자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검법은 빠르기도 하지만 괴력을 담고 있다.
그에게 소절상은 아들이요 제자였다.
소절상이 무공에 재능이 있고 전대 장문인에게 총애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랬기에 장문인 후보가 되기는 했지만 반대하는 인물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소절상을 장문인의 자리에 올린 것이 바로 이 곽과라 불리는 노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앞에 나서지 않고 소절상의 옆을 지키는 노인이었다.
“점창파는 어찌 되겠습니까?”
“……봉문을 하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그게 낫다.
봉문을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욱 큰 수모를 당하게 될 것이다. 무림에 나간 점창의 무인들은 놀림거리가 될 게다. 웬 시답잖은 놈들도 점창에 도전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무림에 있는 삼류 문파들이나 당할 짓을 점창도 당하게 된다.
그에 반해 봉문을 하면 그런 일들은 피할 수 있을 게다. 물론 점창의 위세가 작아질 것이고, 복구하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오히려 봉문이 나은 선택이다.
“봉문은 아니 됩니다, 아저씨! 점창의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야. 봉문하지 않으면 더욱 큰일을 겪어야 할 게야. 차라리 봉문을 하는 것이…….”
“방법이 있습니다. 봉문을 하지 않고도 수모를 겪지 않을 방법이.”
“그런 방법이 있다는 말이냐?”
방법이라는 말에 곽과는 자신의 귀가 솔깃해짐을 느꼈다.
만약 소절상의 말대로만 된다면 그건 최상의 방책이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방책인지 곽과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갈지혁 그놈을 이용하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구나.”
“아저씨, 부탁이 있습니다. 아저씨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부탁이기도 합니다.”
“부탁 말이더냐?”
곽과가 무엇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자 잠시 입술을 깨물었던 소절상이 말했다.
“두 명…… 두 명만 죽여 주시면 됩니다.”
“사람을 죽이라고? 누구를 말이냐?”
“점창의 사장로 중 이 인.”
“뭐, 뭣이?”
다른 자들도 아니다.
적이 아닌 아군을 죽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것도 네 명의 장로 중 두 명을 죽이라니. 다른 자도 아니고 점창의 기둥인 장로들이다. 그들을 죽이라는 것이다.
“놀라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그 두 명의 희생으로 우리 점창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갈지혁을 무림 공적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설마……?”
그제야 이해가 간다. 지금 소절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분명 그렇게만 된다면 둘의 희생만으로 점창은 피해자가 되어 무림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독입니다. 갈지혁은 독을 씁니다. 그 독에 저희 장로 둘이 죽은 겁니다. 그것도 비겁한 술수로.”
“…….”
독을 배척하는 무림에서 갈지혁이 그러한 행동을 했다고 하면 분명 중원 무림은 그를 공적으로 몰 것이다.
사실상 무림 고수들 대부분이 갈지혁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지 않은가.
건수가 생긴다면 분명 갈지혁을 죽이려고 들 게다. 점창파가 적당하게 꾸미기만 한다면 옳다구나 하고 갈지혁을 공적으로 만들 게 분명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 그것도 쉽게 넘어가지 못할 정도의 중요한 인물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하다.
검으로 공격을 해도 되지만 사인은 독이어야 한다. 그리고 주변에 점창의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꽤나 어려운 일이다.
분명 성공한다면 소절상의 말대로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인 건 사실이다. 그들 또한 점창파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위인들이 아닌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밖에 없어서 제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겁니다. 아저씨…….”
“……알겠다.”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곽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소절상은 자식이었다. 자식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것이 또 부모가 아니던가. 곽과는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가자 침상에 누워 있던 소절상이 씨익 웃었다.
“감히…… 날 건드려?”
혼쭐을 내줄 것이다. 감히 자신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고야 말 게다.
곽과가 성공할 것이라고 소절상은 자신했다. 그는 대단한 인물이다. 하고자 하는 건 어떻게든 한다.
갈지혁은 무림의 공적이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는 무림에서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진검백과 허영천의 싸움은 끝났다.
하지만 남은 것이 있다. 운곽이라는 인물의 등장이 바로 그러하다. 그는 무림사괴라 불릴 정도로 기괴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남아도는 자는 아니다.
이곳까지 갈지혁을 보러 왔다는 것을 쉽사리 믿을 수가 없다.
운곽은 시선이 자신에게 쏠림을 느끼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분명 이유가 있어 이곳에 왔다. 갈지혁이 점창파에 도전한 것이 흥미가 있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 받은 부탁이 있어서 온 것이다.
“이야기 좀 하지.”
운곽의 말에 풍객을 내려놓은 나머지 삼 인은 그에게 다가갔다.
운곽의 옆에 허영천이 와서 섰다. 패했지만 그의 표정은 태평해 보인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황금귀에게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
황금귀 이풍과 운곽은 분명 잘 아는 사이일 게다.
같은 무림사괴이고 연배도 비슷하니 당연한 일이다. 둘이 어떠한 사이인지 갈지혁은 잘 모른다. 친밀한 사이인지 아니면 원수처럼 이를 가는 사이인지는.
“그가 너에게 줬으면 하고 부탁한 것이 있어서 말이야.”
“저에게 말입니까?”
갈지혁이 반문했다.
이상한 일이다. 얼마 전 그와 연락을 취했고, 또 그의 수하가 말했던 여러 가지 재료도 가지고 왔다. 아예 그자의 손으로 보내지 굳이 운곽을 보낸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얼마 전 이풍 어르신이 보낸 물건을 받았습니다. 왜 그의 손에 맡기지 않고…….”
“그놈이 전한 것과 차원이 다른 물건이니까.”
운곽은 대번에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갈지혁은 궁금증이 치밀었다. 그토록 믿는 듯한 수하에게조차 맡기지 못할 물건이라니.
운곽은 소매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빠져나왔을 때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운하연이 놀란 듯이 외쳤다.
“인면지주(人面蜘蛛)!”
인면지주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인면지주란 거미다. 문제는 그것이 보통 거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치명적인 독기를 품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을 오싹 돋게 하는 이유가 있다.
얼굴이다.
그것은 거미의 얼굴이 아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혐오스러운 벌레에 인간의 얼굴이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하는 건 당연하다.
인면지주는 내단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천 년을 넘게 사는 영물이라고도 한다. 그것의 크기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 이 인면지주의 크기는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정도다.
“보아라. 네게 물건을 가져다준 자가 쉽사리 관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 않는가.”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물건이라면 가지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고역일 게다.
물리면 죽는다. 그런 물건을 품속에 지니고 당당하게 다닐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된단 말인가.
“이놈을 너에게 주라고 하더군.”
“…….”
갈지혁은 말없이 인면지주를 건네받았다.
손에 올라오자마자 인면지주는 살기를 띠었다. 과연 영물이라는 말이 믿어진다. 그때 갈지혁의 품 안에서 사황이 튀어 나왔다.
캬아!
사황이 날카롭게 이를 들이밀었다. 인면지주의 살기를 느낀 것이다.
사황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이빨까지 내밀었다.
인면지주 또한 질세라 사황을 마주 봤다.
그 모습을 운곽은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봤다. 신기한 뱀이다. 인면지주의 살기라면 어떠한 맹수라도 놀라 도망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살기를 느끼고 소매에서 뛰쳐나왔다.
마치 갈지혁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재미있는 놈이군. 하지만 말리는 게 좋아. 인면지주의 독이라면…… 저놈 죽어.”
“그럴까요?”
갈지혁이 피식 웃었다.
그 미소의 정체를 운곽은 알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뭐가 그리 우습다고 웃는 건지…….
사황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면서 은연중에 살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
키륵키륵.
인면지주가 서서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갈지혁의 소매 속으로 쑥하고 들어갔다.
놀란 건 운곽이다.
‘인면지주가 도망을 쳐? 그것도 뱀에게?’
왜 인면지주가 물러났는지 모를 운곽이 아니다. 인면지주는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했기에 물러선 게다.
“이곳까지 가져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차피 이 근처도 올 겸 해서 가져다준 걸세. 그나저나 조심하게. 인면지주에게 물리지 않도록 말이야.”
“이 정도 독이야 저에게 피해를 못 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이 인면지주의 독을 파헤친다면…… 다섯 배 이상 강한 독을 만들 순 있겠죠.”
아마도 황금귀 이풍은 그걸 보고 인면지주를 보낸 것일 게다.
인면지주의 독은 여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것임은 틀림없다. 어떠한 의미로 독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뱀…….”
운곽은 사황을 쳐다봤다.
사황은 인면지주가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태평하게 땅바닥을 슬슬 기어 다녔다.
“사황 말씀이십니까?”
갈지혁이 되묻자 운곽이 말을 이었다.
“뭐 하는 뱀인가? 인면지주가 물러설 정도라면…….”
“하하! 저놈한테는 저도 두 손 들 정돕니다.”
진검백이 끼어들면서 말했다.
진검백이 접근하자 사황은 이빨을 내밀었다. 물지는 않지만 여전히 진검백만 보면 이를 드러내는 사황이다.
“어이쿠!”
진검백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재빨리 물러났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놈입니다. 진다는 걸 모르죠. 자기 주인을 꼭 닮았습니다.”
갈지혁을 보면서 진검백이 내뱉은 말이다.
운곽은 웃고 있었지만 내심 그 뱀의 정체가 궁금했다. 갈지혁을 지키려는 듯한 뱀의 행동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영물이라는 것일 텐데 저런 뱀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도 없다.
갈지혁도 그렇고 저 뱀도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일을 마쳤으니 난 이만 가볼까.”
운곽은 걸터앉았던 바위에서 일어났다.
운하연과 진검백이 막 포권을 취하려 하자 그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우린 다시 만날 게야. 느낌이 그렇군. 인사는 그때 하자고.”
말을 마친 운곽은 자신의 제자인 허영천과 함께 산 아래로 휘적거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걸음 걸어가던 그가 갑자기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조심하게. 점창파 장문인 소절상이라는 자, 결코 당한 걸 잊는 자가 아니거든.”
“제 상대가 아닙니다.”
“그래. 네 말대로야. 하지만 무력으로 이겼다 해서 다가 아니지. 그자…… 야비하거든.”
말을 마친 운곽이 피식 웃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갈지혁이 모를 리가 없다.
“조심하지요. 물건 잘 건네받았습니다.”
“그럼.”
운곽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미련 없다는 듯이 산 아래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질 때도 너무나 태평스러운 그다.
곽과가 무릎을 꿇은 채로 영정(影幀)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 영정의 주인은 전대 점창파의 장문인이다.
얼마나 그림이 정교했는지 당장에라도 그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곽과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노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패기가 그의 몸에서 꿈틀거린다.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얼굴이 두 개라도 볼 낯이 없다.
자신에게 소절상을 맡긴 것은 장문인이지만 결국 그를 그만한 그릇이 되게 한 것은 곽과 본인이라고 생각하는 탓이다.
“큰 놈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소인이 모자란 듯합니다.”
중얼거리듯이 말을 내뱉은 곽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영정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호통을 치면서 장문인이 자신을 말려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