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13화
꿈이다. 그저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곽과가 마음을 다잡은 듯이 말했다.
“장문인의 뜻대로 전 그를 따를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일이다. 그렇지만 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곽과는 마음을 먹었다. 오늘 두 명의 인물을 죽이기로. 그것도 점창파를 위해 일생을 바친 두 명을 말이다.
개인적인 친분도 상당한 그 둘을 죽여야 했기에 곽과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곽과는 건물을 벗어났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오늘 안에 끝낸다.’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네 명의 장로 중에 죽여야 할 자도 정했다.
첫째 장로와 막내인 넷째 장로다.
첫째인 학산화는 머리가 좋은 인물이다. 장로들이 죽는다면 그는 먼저 냉정해지려고 노력할 것이다. 흔적을 되짚으려고 발악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일이 틀어질 위험도 있다. 그리고 학산화라면 결코 전폭적으로 장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막내는 사람들의 동정을 끌기 위해서다.
그는 이미 갈지혁에게 크게 당해 자리에 누운 상태다. 그런 자를 죽인다…… 무인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것도 싸움이 끝난 후에.
학산화와는 꽤나 오랫동안 함께했다. 같이 점창을 위해 싸운 적도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지기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곽과를 괴롭게 했다.
마음은 그랬지만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다.
곽과의 발이 첫째 장로인 학산화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달이 중천에 걸렸을 즈음 그는 학산화의 거처에 도착했다. 평소였다면 대놓고 문을 열고 들어섰겠지만 몸을 감춘 곽과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선 후부터 곽과는 몸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학산화의 방까지 걸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는 탓이다. 이 일은 결코 누군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죽여야 할 당사자를 제외한다면.
문 앞에 선 그가 안을 향해 말했다.
“있는가?”
“곽과 자네인가?”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학산화의 것이다. 곽과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피로한 표정으로 상념에 잠겨 있는 학산화가 있다.
“어쩐 일로……?”
“후, 오늘 일 때문이네.”
“……미안하네.”
학산화는 바로 사과했다. 곽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알았던 탓이다.
“왜 물러섰는가? 자네의 검을 피해 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들었네.”
“내 모든 걸 담은 검이었어. 그리고 애초부터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 다른 세 장로의 몸 상태도 살피고 싶었네. 설마 장문인이 지게 될 줄은…… 나도 몰랐네. 나 때문에 점창이라는 이름이 이리 된 것 같아 너무 괴로워.”
학산화는 갈지혁과 싸웠다. 그리고 사일검법을 펼쳤다.
모든 힘을 담은 일격을 갈지혁은 어렵지 않게 쳐냈다. 그렇지만 상황은 딱히 누구에게 유리하다고 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학산화는 검을 꺾고 물러났다.
졌음을 시인하고 말이다.
“장문인을 볼 낯이 없군.”
‘진심이야. 정말…….’
곽과는 학산화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점창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되었다는 것 하나에 이토록 괴로워하는 자다. 죽이기에는 정말 아까운 자다.
“용서해 주실 걸세.”
“아니, 내가 볼 낯이 없어. 내 단전을 부숴서라도 무림에 점창의 이름을 우습게 보지 말아 달라 할 생각이네.”
점창파의 제일장로가 스스로의 단전을 부수면서 호소하려고 했다 한다.
무인으로서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곽과는 잘 안다.
단전이 부서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죽는 게 낫다. 무인의 자존심, 꿈 모두가 무너진다는 소리다.
곽과는 점점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이런 자를 죽여야 할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곽과는 지금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분명 그냥 싸운다 해도 이길 수 있다.
학산화는 강한 무인이기는 하지만 곽과에 비해서는 한 수 아래다. 문제는 그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거다.
일 수에 제압할 상대가 아니다. 적어도 몇백 합은 겨루어야 승부가 날 상대다.
그렇게 되면 주변에서 무인들이 몰려올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한 일 아닌가.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단 일 수에 심장을 뚫어 버릴 수 있는 기회를.
둘은 앉은 채로 말이 없다. 학산화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곽과는 그런 학산화를 살피며 벨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
상념에 잠겨 있는 학산화를 보다 곽과가 말했다.
“휴, 장문인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게 아닐 걸세. 자네가 단전을 부순다면 그건 오히려 점창의 큰 손실이야.”
“내가 그냥 있는다면 점창이 봉문하거나 무림의 놀림거리가 될 걸세. 내가 희생한다면…… 놀림거리는 면할 수 있을 게야.”
분명히 그럴 것이다.
제일장로의 희생이 있다면 그 누구라 해도 쉽사리 점창을 모욕하지 못할 게다.
“손님이 왔는데 차 한 잔 주지 않는 겐가?”
곽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제야 학산화는 그것을 깨달았는지 작게 웃었다.
“이런, 내 정신하곤.”
학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시비를 두지 않는 그이기에 차는 손수 타서 손님에게 대접하여 왔다.
그걸 아는 곽과였기에 일부러 원하지 않는 차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학산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도는 순간 곽과의 손이 미끄러지듯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안기듯 학산화의 등에 닿았다.
“컥! 이, 이게 무슨……?”
“……미안하네. 다 점창을 위해서일세.”
“자, 장문인 그의 뜻이로군…….”
손에 진득한 피가 느껴진다.
곽과는 도저히 학산화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는 단박에 지금 곽과의 행동이 장문인의 명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할 말이 없다.
“미안, 미안하이. 날 용서하지 말게. 이 못된 날…… 절대 용서하지 말게.”
말을 하는 곽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눈물이 맺힌다. 검을 잡은 손을 잘라 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혐오스럽다. 그렇지만 놓을 수가 없다.
“큭, 큭큭! 어려. 너무 어리석어. 장문인은…… 결코 큰 그릇이 못 돼.”
점점 학산화의 호흡이 가빠진다. 꺼지려는 생명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이다. 검은 정확하게 심장을 관통했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일 게다.
“알아. 나도 아네. 그래도…… 난 따를 수밖에.”
“어리석긴…… 자네가 이래선 아니 됐어. 자네만큼은…….”
학산화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곽과는 말없이 검을 뽑았다. 피가 울컥하고 상처에서 쏟아져 나왔다.
땅에 몸을 누인 학산화가 중얼거렸다.
“자네뿐이야…… 장문인을 막을 수 있는 건.”
곽과는 눈을 감고 품속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 피의 흔적이 방 안에 남아서는 안 된다.
학산화의 사인은 검상이 아닌 독살로 돼야 한다.
“편히 가게.”
“자네뿐이야…… 잊어서는…….”
곽과는 화골산을 학산화에게 뿌렸다.
화골산은 뼈조차 녹이는 독이다. 학산화의 몸이 한 줌의 가루로 변했다.
턱.
곽과는 벽에 몸을 기댔다. 서 있을 힘이 없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품속에서 꺼낸 천으로 검을 닦았다. 피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다.
그는 가루가 되어 버린 자신의 친우이자 동료였던 학산화가 누워 있던 곳을 바라봤다.
눈물이 핑 돌 것 같아 더 이상은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지워야 할 흔적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권을 취했다.
곽과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이제 한 명 남았다. 이번 상대는 어렵지 않다. 이미 정신을 놓고 있는 넷째 장로가 목표다.
쉬운 일이거늘 그의 마음은 그 어떠한 임무를 수행할 때보다 무겁고 힘들었다.
* * *
인면지주는 보통 사나운 것이 아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스럽거늘 지독한 독까지 품고 있으니 사람이라면 피하기 마련이다. 인면지주 또한 그러한 것에 익숙했다. 그런데 갈지혁과 진검백은 그런 자들이 아니었다.
갈지혁은 인면지주의 독을 알아내려고 했고 진검백은 괴롭히기까지 했다.
손가락으로 툭툭 찔러대는 진검백에게 인면지주가 살의를 드러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진검백은 그게 그리 재미있는 모양이다. 어쩔 거냐는 듯이 손가락으로 계속 찔러대는데 인면지주조차도 반항하지 못했다.
급기야는 무시까지 했지만 사황으로 인해 익숙해진 진검백은 어떻게든 인면지주를 괴롭게 했다.
마차를 빌려서 이동하는 와중이라 심심한 탓이다. 사황은 어떻게 하든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포기했지만 인면지주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반항을 하니 재미가 인다. 괴롭히는 맛이 있다.
진검백이 키득거리면서 인면지주의 머리를 쿡쿡 눌러댔다.
갈지혁은 인면지주의 거미줄을 살폈다. 인면지주가 뱉어 낸 거미줄에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나 찾는 모양이다.
운하연은 인면지주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야기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반면 풍객은 죽상을 지었다.
그는 인면지주가 근처로 다가오기만 하면 화들짝 놀라서 발을 마구 휘두르곤 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갈지혁과 진검백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나마 갈지혁은 독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치자.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인면지주를 괴롭히는 진검백의 모습이 풍객은 당황스러웠다.
진검백은 구석으로 숨어드는 인면지주의 머리를 끝까지 손으로 쿡쿡 찔렀다. 참다못했는지 인면지주가 살의를 드러냈다.
“킥킥! 어쭈? 덤벼볼래?”
사황에게도 전혀 놀라지 않는 그다. 이 정도에 진검백이 당황하면서 물러날 리가 없다. 그렇지만 풍객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인면지주라는 영물에 대해서는 들어 봤다. 지금 이곳에서 인면지주가 독성을 내뱉는다면 자신으로서는 견뎌낼 재간이 없다.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지 않은가.
더듬거리며 풍객이 말했다.
“이, 이봐! 그만 좀 하라고!”
“왜 그러십니까? 이놈이 물지도 않을 테고, 설령 그렇게 돼도 갈지혁도 있고 약선문의 소문주인 운하연 소저도 있지 않습니까.”
“……그 전에 물리지 않으려고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하하! 그런가요?”
진검백은 인면지주를 괴롭히는 손가락을 거뒀다. 풍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내심 불안했는지 계속해서 구석에 박힌 인면지주를 살폈다.
놀이를 끝내자 진검백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갈지혁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이 빛나고 있다. 흥미 있는 장난감이라도 받은 어린아이 같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눈이 날카롭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손가락에 고정됐다.
갈지혁은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했다. 거미줄이 꽤나 끈기가 있다.
‘마비독이군.’
인면지주의 거미줄에는 독이 있다.
다른 독은 없다. 단 하나, 마비독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마비독이 상당히 지독하다.
손가락 끝이 얼얼하다. 맨손에 닿았는데도 이 정도라면 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말해서 무엇하랴.
그뿐이 아니다. 이 마비독은 마비독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다른 성분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만큼 마비력이 지독한 탓이다. 마비독도 지독하면 사람을 죽인다. 이 정도라면 독에 대한 내성이 적은 사람이라면 단박에 즉사다.
인면지주는 이 거미줄로 먹이를 제압할 게다. 아마도 이 지독한 마비독에 웬만한 생물들은 죽어 버릴 것이다. 만약 산다면 그제야 인면지주는 진정한 독을 뿜어낼 것이다.
‘입이군.’
먹이를 제압하는 것은 거미줄, 숨통을 끊는 것은 입이다. 지독한 독은 거미줄이 아닌 입에 있다.
진검백이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식사 좀 하고 가죠!”
마부가 달리던 말을 멈췄다.
“으라차!”
진검백은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황급히 풍객이 마차에서 쫓기듯이 나왔다. 그는 인면지주와 한 자리에 있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마차 밖에서야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휴우.”
갈지혁이 인면지주를 들어 올리고 마차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마차 밖에서 인면지주를 눈까지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풍객은 기겁했다.
“어? 어어!”
눈앞까지 인면지주를 가져다 댄 갈지혁의 모습이 풍객에게는 미친놈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저토록 행동하는 걸 어찌 이해하겠는가.
“흠.”
갈지혁은 쉽사리 인면지주의 독에 대해 알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았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번 식사, 누가 만들 차례지?”
“나일세.”
풍객이 대꾸했다. 갈지혁의 얼굴이 슬그머니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