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6화
위험하니 자신이 싸우겠다고 말하려 했다.
독인이다. 그것도 일정 수준 이상의 상대다. 진검백이 싸운다면 위험한 독에 당할지도 모른다. 물론 갈지혁이라고 해서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진검백보다는 독에 당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랬기에 자신이 싸우려 했다. 하지만 진검백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차마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웃으면서 조심하라고 말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진검백이 그런 갈지혁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알면서도 우기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 탓이다.
가슴이 뜨겁다.
지금 이자만큼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끝내고 싶다.
진검백은 아이를 내려놓고는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혼자 덤빈다고?”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셋이 한꺼번에 덤비기를 원했던 모양이다. 아니, 애초에 그래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물론 독을 쓰는 자이니 한 번의 하독으로 셋 모두 제압하는 것이 편하긴 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 혼자서도 너 정도는 충분하거든.”
“하핫! 미쳤군! 난 독인이야! 너 같은 놈은…… 단번에 끝나!”
“마침 잘됐군. 난 세상에서 제일 강한 독인과 싸워야 하거든. 그러니 너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이겨야겠지?”
“세상에서 제일 강한 독인?”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검백의 눈이 갈지혁에게로 향했다. 갈지혁 또한 진검백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갈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몰라도 돼. 넌 그저 나의 실험 대상일 뿐이야.”
“내가 너의 실험 대상? 큭, 큭큭! 재미있는 노옴!”
진검백이 자신의 말을 비꼬자 사내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는 앞에 있는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나이는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행색을 보아하니 꽤나 이상한 무리다.
두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이다. 셋 모두 그다지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데 그 개성만큼은 너무나 독특하다.
한 명은 완전 건달이다. 길거리에서나 볼 수 있는 독기로 똘똘 뭉친 건달. 몸 전체에서 음울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만 같은 맹수의 기질이 보인다.
한 명은 너무 단정하다. 건달 같은 옆의 사내와는 완전히 비교가 된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곳에서 검을 익힌 듯하다. 자세에서 우러나오는 기세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다.
유일한 여인 또한 특이하다. 가장 특이한 것은 눈동자다. 파란색 빛이 일렁거리는 것이 순수 중원인은 아닌 듯하다. 아마도 색목인의 피가 섞였을 게다.
셋 모두 실력 없이 달려드는 자가 아니라는 걸 사내는 알고 있다. 실력이 없는 자였다면 이곳에 접근하기도 전에 죽었어야 옳다. 셋 모두 독에 대한 내성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다.
‘재미있군. 이런 놈들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나?’
마음 같아서는 오래 놀아주고도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그는 급히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다.
사내가 비록 젊어 보이긴 하지만 실제 그의 나이는 마흔을 넘겼다. 그는 단리문의 수족으로 독을 퍼뜨리는 임무를 맡은 자다.
황규영(凰規影). 그의 이름을 아는 자는 무림에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십오 년 전쯤 무림을 시끄럽게 했던 귀영신객(鬼影神客)이라는 별호는 아직도 광동 근처에서는 전설처럼 남아 있다.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걸리면 모두 죽는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그를 귀영신객이라 불렀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사람을 죽이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횡포가 점점 심해져 무림맹에서는 그를 공적으로 지명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귀영신객의 모습은 지워진 듯이 사라졌다.
너무나 잔혹했던 손속이다. 원한이 없었다면 결코 그렇게까지 사람을 발기발기 찢어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죽은 사람들에게서는 공통점이라고는 없었다.
귀영신객의 뒤를 쫓는 자들은 수도 없이 고민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머리를 쥐어짰지만 정작 귀영신객이 사람들을 죽인 이유는 간단했다.
원한이 있어서도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했던 탓이다.
귀영신객은 살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 희열을 알아 버린 그가 멈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애초부터 그는 멈출 생각을 가진 적도 없었다.
어차피 약한 자는 죽어야 하는 세상이다. 늙어 죽든 누구의 손에 죽든 어차피 죽을 것, 그것이 자신의 손에 의해 이뤄진다고 해서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진검백이 검을 뽑아 들자 귀영신객은 씨익 웃었다.
강하다고 해도 질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강하다고 해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애송아,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나? 피가 튀는 잔인함 속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있어?”
진검백을 마주 본 채로 옆으로 발을 움직이며 귀영신객이 말했다. 그의 입은 쉬지 않고 계속 떠들었다.
“미치지 않고는 못 볼걸? 팔이 날아가고 눈알이 터져 나와. 그런 잔인한 전쟁터 속에서 검을 휘두를 수 있겠어?”
“…….”
“왜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지 알아? 그건 그 사람의 모습에 동정이 가고 두려워서이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렇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이지. 내가 검을 들고 맨 처음 죽인 것이 바로 나다.”
“그럴싸한데?”
귀영신객은 진검백의 안정적인 보법을 보면서 예상보다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행색으로 보아 사람 한 번 못 죽여 봤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나이는 어려 보이는데 꽤나 노련한 무인과 마주한 기분이 든다.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경험이 없다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싸움에 임해서도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다. 경험이 많다는 소리다.
‘서둘러야겠군.’
너무 끌어서는 안 된다. 상관에게 연락을 취해야 할 시간이다. 늦는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팡!
기이한 모양의 검 두 자루가 그의 손에 들렸다. 길이가 보통 검보다 짧고 기이할 정도로 휘어져 있다.
귀영신객의 손가락 끝에서 검이 빙글빙글 돌았다. 원을 그리면서 검은 빠르게 움직였다.
진검백의 검이 뒤로 당겨졌다. 그때 그의 몸 주변에서 기이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귀영신객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방에 퍼지는 매화 향기를 맡고서야 상대가 어느 문파의 무인인지 알아차렸다.
“화산파?”
큰 문파에서 정공을 익힌 자라고는 생각했지만 화산파일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이렇게 짙은 매화 향이라니…….
‘화산에 저런 자가 있었던가?’
화산파의 젊은 무인 중 검으로 매화의 향기까지 만들어 내는 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화산파의 무인이라 놀라긴 했지만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의 손에서 두 자루의 곡도가 여유 있게 빙글거리며 돌았다.
진검백의 발이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를 밟으며 거리를 좁혀왔다. 매화 향기를 안고 뻗어지는 검을 두 자루의 곡도로 가볍게 쳐낸 귀영신객은 빠르게 오른손을 움직였다.
곡도 한 자루가 진검백의 얼굴을 스윽 스치면서 지나갔다. 피하지 못했다면 바로 얼굴이 베어져 나갔을 게다.
그렇지만 문제는 곡도가 한 자루가 아니라는 거다. 왼손에 들린 곡도가 진검백의 어깨를 찔러 들어왔다.
파파팡!
빠르게 휘둘리는 곡도와 진검백의 검이 부딪쳤다.
귀영신객은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너무나 쉽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낸 탓이다. 마치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진검백의 검이 곡선을 그리면서 날아들었다. 곡도를 세운 귀영신객은 그것을 막아 내는 것과 동시에 발을 내질렀다.
그런데 이번에도 진검백이 자신의 발 공격을 막아 냈다.
“어쭈?”
비웃음처럼 들리는 짧은 감탄성을 내뱉은 후 귀영신객의 두 자루 곡도가 마구 돌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예기가 쏟아져 나왔다.
진검백의 검에서도 그에 대응하는 검기가 쏟아져 나왔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화산의 검법에 어울리게 진검백의 검 또한 그러했다.
쉬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기끼리 충돌했다. 귀영신객은 검기가 부딪치고 나서야 얼굴 표정을 굳혔다.
‘화산에 저런 놈이 있었던가?’
화산파의 무인과는 꽤나 많이 싸워 봤다. 그의 손에 죽은 자 중에서 화산파의 무인도 몇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우습게도 여태까지 상대한 화산파의 무인 중 가장 어렸지만 또한 가장 강하다.
여태까지 화산의 그 누구도 이렇게 자신의 공격을 쉽사리 막아 내지 못했다.
몇 차례 손을 나누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는 것은 충분하다. 이대로 싸우다가는 쉽게 승부를 낼 수 없을 게다.
“꽤 강하군.”
“목 쭉 내밀고 각오해야 될 거다. 난 네놈을 살려줄 생각이 없으니까.”
“마찬가지야. 그런데 미안하게도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이만 끝내지.”
곡도만으로 승부를 내려고 했는데 그러기에는 상대가 너무 만만치 않다. 귀영신객은 슬며시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무림에서 몸을 감췄던 십오 년 동안 그는 새로운 것을 배웠다. 그가 사라졌던 것은 단지 무림맹의 추격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마침 그때 그의 앞에 단리문이라는 사내가 나타났다.
그에 대해서는 지금도 제대로 답이 내려지지 않는다. 어떠한 크기를 지닌 인물인지 도통 모르겠다.
단리문과 싸웠다. 그런데 상대도 되지 않았다. 독이라는 거, 참 개 같은 것이다. 바로 토악질을 해대고 속에 있는 걸 전부 게워냈다.
추했다. 무공을 익히고 나서 이 같은 모습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죽어 가는 그를 단리문은 살려 냈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게 해 준다고.
자신이 왜 사람을 죽이는지 안 것은 단리문이 처음이다.
그저 죽이는 것이 좋아 사람을 죽인다는 걸 다른 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단박에 그걸 알아차렸다.
십오 년 동안 귀영신객이 배운 것은 여태까지 그가 배웠던 것과는 전혀 다른 독공이었다. 독공을 배웠고 수많은 독을 제조하는 방법도 배웠다.
독은 참 매혹적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 이만큼 잔인한 방법도 없다 싶을 정도로.
비록 늦게 배우긴 했지만 귀영신객은 재능이 있는 자였다. 그리고 다른 방면으로 이미 일가를 이룬 그이니 늦었다고 해도 그 성취는 무척이나 빨랐다.
‘독으로 끝낸다.’
귀영신객은 소매에서 손을 빼냈다. 손에는 무엇인가가 들려 있다. 누가 본다 해도 저것이 독이라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이건 눈속임이다. 진짜 독은 이미 하독됐다. 소매에 손을 넣는 순간 요대를 통해 독분이 흘러나왔다.
이 독이 체내로 흡수된다면 바로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뒤틀린다. 구멍이란 구멍으로 온몸에 있는 수분이 전부 빠져나온다. 단숨에 몸이 쪼그라들면서 죽어 버린다는 소리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갈지혁이 말했다.
“수정화(水渟花)의 독. 기문혈(氣門穴)에 내공을 집중해서 천천히 돌리면 중독되지 않아.”
슬쩍 미소 짓던 귀영신객의 표정이 변한 건 당연했다.
갈지혁이 내뱉은 수정화라는 것은 바로 그가 쓴 독의 원 재료였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거기다가 완벽한 해법까지 알고 있으니 당황스러움이 밀려들었다. 독을 만드는 것을 본 것도 아니다. 그저 하독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독에 대해서 알아냈다.
세상에 있는 독의 가짓수는 셀 수도 없다. 그중에 하나를 바로 맞출 정도라면…….
문득 귀영신객은 최근 들어 많이 들은 이름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단리문에게서도 들었던 이야기도.
그의 입이 열렸다.
“독…… 왕 갈지혁?”
귀영신객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을 이곳에서 만났다.
독왕(毒王) 갈지혁.
물론 무림에서 그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일부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독의 길을 걷는 자들의 반 수 이상은 갈지혁을 독왕이라 칭한다. 그는 독인으로서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다.
처음엔 그저 미치광이였다.
독왕대로행이라는 말도 안 되는 문구가 적힌 깃발 하나를 들고 싸움을 벌였다. 승승장구(乘勝長驅)했지만 그래도 거기서 그만일 거라 생각했다.
무림에는 독을 익힌 자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은 독을 쓰지 못했다. 그나마 독을 쓰는 자들이라면 살수 쪽의 길을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독을 익힌 자들의 한계이자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변했다.
그 남자가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면서 사람들이 점점 독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러면서 독을 익히는 자들 중 일부가 갈지혁을 독왕이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무림에서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호사가들이나 일부 젊은 무인들도 그를 독왕이라고 불렀다.
물론 작은 일이지만 실제로 무림에서 독왕이라고 불린 자가 생전 처음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일이다.
‘치잇, 갈지혁은 피하라고 했는데…….’
귀영신객은 난처한 입장에 처해 버렸다.
단리문이 말했다. 절대 갈지혁과는 싸우지 말라고. 만약 만나게 되더라도 전혀 내색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됐다.
갈지혁이 있는 줄 알았다면 나서지 않았을 게다. 그에게는 얻을 것이 있으니 절대 움직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들었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