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17화
귀영신객이 난처해하고 있을 때 진검백의 표정이 변했다.
‘독왕…….’
앞에 있는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 보통의 실력자는 아니다. 그런 자의 입에서 독왕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불려 버린 것이다.
독왕이라고.
‘괴물 녀석.’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렇지만 손에 든 검은 더욱 강하게 쥐었다. 몇 번 겨루지 않았지만 상대는 강했다. 손에 들고 있는 두 자루의 곡도도 그렇지만 갑자기 터져 나올 독도 위험하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독의 위험을 가장 잘 아는 것이 바로 그이지 않는가.
갈지혁의 말대로 기문혈에 내공을 집중하니 몸으로 막 파고들었던 독이 눈 녹듯 사라졌다. 물론 갈지혁이 말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스스로 독을 해독할 능력을 진검백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자가 이 자리에 있다.
앞에 있는 사내는 아니다. 정체를 모르는 자고 강한 자이기는 하지만 그에게 자신의 숨겨진 진짜 실력을 보여 줄 생각은 없다.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내. 이제는 독왕이라는 칭호까지 붙게 된 갈지혁의 눈을 의식해서다.
“맞혔어. 저 친구가 갈지혁이야. 그렇지만 지금 넋 놓고 있을 때는 아닐 텐데?”
“……귀찮게 됐군.”
“……?”
말을 마친 귀영신객은 곡도를 들어 올렸다.
갈지혁과 싸워서는 안 된다. 단리문이 그리하라고 했으니 죽더라도 따라야 한다. 그렇지만 차라리 나타나지 않았으면 모를까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이 싸움을 피한단 말인가.
눈앞에 있는 화산파의 무인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다. 그만두자고 해서 검을 거둘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갈지혁이라면 저놈은 진검백이겠군.’
갈지혁과 같이 다니는 사내라면 분명 진검백이다. 낙화검이라는 별호를 지닌 화산파의 낙오자.
겨우 진검백이라는 놈한테 이렇게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덤벼.”
우선은 싸워야 한다. 그냥은 물러설 수 없으니 어떻게든 검을 겨루며 틈을 만들어야 한다. 답은 애초부터 하나였다.
‘도망친다.’
하지만 무턱대고 도망친다면 쉽지 않다. 우선은 갈지혁과 최대한 거리를 벌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
곡도 두 자루가 화려하게 움직이나 싶더니 하얀빛이 흘러나왔다.
“살천강기!”
흰 빛이 몸 주변을 아른거리는가 싶더니 강기가 쏟아져 나왔다. 눈을 현란하게 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강기를 이렇게 사용한다는 것 자체로도 상대가 엄청난 고수라는 걸 증명해 주는 것이다.
진검백은 급히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펼쳤다.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절초와 살천강기라는 귀영신객의 절기가 부딪쳤다. 그것의 위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진검백은 자신의 무공 중 그에 어울릴 만한 것을 펼친 것이다.
강기는 화려하게 펼쳐지기 시작한 매화들과 격돌했다. 꽃잎들이 마구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다!
한가을에 산에서 휘날리는 꽃잎처럼 매화 잎들이 폭풍우를 만난 것처럼 사방으로 만개했다.
그리고 그 매화의 잎 하나하나는 날카로운 칼이 되었다.
살천강기를 펼치면서 이 싸움은 끝났다고 생각했던 귀영신객으로서는 너무 강력한 반격에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매화만리향이라면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절초. 그러한 것을 낙화검이 펼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다.
‘위험해!’
매화 잎들이 순식간에 주변을 감싼다. 그런가 싶더니 날카롭게 폭발한다.
귀영신객의 발이 움직였다. 일 보가 열 개의 신형을 만들고 이 보가 되면 그 순간 몸은 백 개로 갈라진다.
엄청난 보법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검백의 매화만리향을 완전하게 피해 낼 수는 없었다.
동시에 온몸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상체, 하체 모두 멀쩡한 곳이 없다. 그의 자랑이기도 했던 얼굴까지도 완전히 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이, 이놈…… 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렇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렇지만 진검백 또한 완전하게 멀쩡하지는 못했다. 살천강기는 엄청난 강기다. 귀영신객이라는 별호가 붙게 된 것에 가장 기여한 것이 바로 살천강기다.
살천강기의 대부분이 매화에 막혔지만 몇 개의 강기가 그 틈을 파고들었던 모양이다. 매화 탓에 그 위력은 많이 약해졌지만 진검백의 가슴에도 큰 상처가 생겼다.
피가 그의 옷을 적셨다. 그런데도 진검백은 오연하게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분명 작지 않은 상처다. 귀영신객도 그러했지만 진검백 또한 웃으면서 넘어갈 상처는 분명 아니다.
“흐으, 흐으.”
숨이 가쁘다. 이 상태라면 오래 싸울수록 점점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차라리 한 줌의 내공이라도 더 있는 지금 도망치는 것이 낫다. 진검백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거리를 벌린 후 도망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 계획을 바꿔야만 했다.
소매 속에서 스르륵 하고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려 귀영신객의 손아귀에 잡혔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꽤나 큰 물건이다. 그것은 독무를 만드는 단환이다.
그 독성은 강하지 않지만 순간적으로 시야를 가릴 수 있는 데 가장 좋은 물건이다. 이미 귀영신객은 싸울 의사가 사라졌다.
‘젠장, 이곳에 대해 갈지혁이 알았다고 그에게 말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단리문은 분명 그에 맞는 대가를 귀영신객에게 치르게 할 것이다.
‘차라리 아예 먼 곳으로 도망이나…….’
단리문을 피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그를 옆에서 보필하지 않았던가. 그가 어떤 자인지 잘 안다.
어디로 숨든지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죽일 것이다.
돌아간다고 해도 살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차라리 죽으려면 깨끗하게 죽는 게 낫다. 도망쳤다가 잡힌다면 분명 개죽음이다.
‘후, 우선은 도망치는 게 먼저인가?’
단리문의 일은 그 후다. 우선은 도망치는 것이 먼저다.
귀영신객은 두 자루의 곡도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의 곡도가 다시금 돌기 시작했다. 다시금 살천강기라도 펼칠 듯한 모습이다. 몸에서 울컥거리면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는 곡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진검백 또한 다시금 기수식을 취했다.
그가 살천강기를 펼치려는 것처럼 진검백 또한 매화만리향을 펼치려는 것이다.
좀 전의 싸움은 무승부였다. 그렇지만 그걸 진검백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이긴다.’
어떻게든 도망치려는 귀영신객의 속내를 모르는 진검백으로서는 살의를 불태웠다.
“차앗!”
막 앞으로 몸을 도약하는 귀영신객을 보면서 진검백은 검을 움직였다.
그런데 막 한 발 내디딘 귀영신객의 몸이 뒤로 훌쩍 물러섰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무엇인가가 던져지면서 땅에 부딪쳤다.
탁.
단환이 터지면서 안에서 녹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
지독한 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검백은 급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한 부상을 입은 지금 독은 더욱 치명적이다. 곡도로만 상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막 녹색 운무가 몸에 닿는 순간 진검백은 의아했다.
너무나 미약한 독이다. 체내에 파고드는 독의 위력이 너무 약하다. 이 정도라면 몸에 침투도 하지 못한다.
“설마!”
진검백은 망설이지 않고 전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독무를 빠져나간 그의 눈에 이미 그는 없었다.
“……도망?”
상대의 실력이 대단했던 만큼 이미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핏자국을 따라간다면 못 찾을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 전에 먼 곳까지 도망갈 것이다.
흔적을 찾으면서 쫓는 자와 무작정 달리는 자가 같을 리는 없다. 진검백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진검백의 옆으로 갈지혁과 운하연이 다가왔다. 운하연은 급히 진검백의 상처를 살폈다. 꽤나 깊게 상처를 입었다.
“부상이 커요. 조금 쉬는 게…….”
“죽이지 못했어. 반드시 죽였어야 했는데…… 이 아이들의 복수를 해 주고 싶었는데…….”
진검백은 땅에 쓰러져 죽어 있는 여자 아이의 시신을 바라봤다.
“으, 으으…….”
진검백은 고개를 떨궜다.
복수를 해 주고 싶었다. 죽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필요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러고 싶었다.
검을 들었던 이유가 사라졌다.
검을 내려야만 했다. 그런 자신이 진검백은 너무나 싫었다.
“큭! 좀 살살 해 주실 수 없습니까?”
진검백이 엄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까 전에 어두웠던 표정은 이제 그에게 없다. 모두 잊은 듯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이 무리에서 그런 진검백의 모습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싸움터에 따라가지 않았던 풍객을 제한다면 말이다.
“사내새끼가 엄살은…… 이까짓 상처가 무에 대수라고.”
말은 그리했지만 풍객은 상처가 꽤나 깊다고 생각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상처는 분명 날카로운 도에 의한 것이다.
풍객이 진검백의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갈지혁과 운하연은 대화를 나눴다.
“거의 확실하지?”
“예. 믿을 수 없지만.”
역병이 아닌 독이라는 갈지혁의 말을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그렇지만 눈앞에 나타난 자를 보고 나니 믿을 수밖에 없게 됐다. 우습게도 귀영신객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운하연에게 지금 이러한 일이 독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꼴이 됐다.
“독을 쓰는 자예요. 분명 누군가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어요. 독을 악용해서요. 혹시 무슨 독인지 아시겠어요?”
운하연의 물음에 갈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있는 독을 모두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갈지혁 정도 되는 자라면 접하는 것만으로도 대충 어떠한 성분의 것인지는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니다. 이건 도대체 어떤 독인지 알지 못하겠다.
전혀 생소한 재료이거나 엄청난 과정을 거쳐 독으로 제조한 것이라는 소리다.
“이 독을 만든 놈은 대단한 놈이야. 아니면 미치광이지. 이런 독은…… 엄청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만들어 낼 수 없어. 많은 실험을 했겠지.”
“실험이라면…….”
“인체 실험.”
“역시!”
운하연의 표정이 변했다.
사람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는 소리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 자라는 소리도 되고, 결과를 위해서는 수단도 가리지 않을 잔인한 손속을 지닌 자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독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독이야. 다른 독도 모두 같긴 하지만…… 이 독은 조금 특별하지.”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동물로 실험을 했다면 결코 제대로 된 결과를 뽑아낼 수 없는 성분을 지닌 독이다. 반드시 인간이어야만 한다.
“어떠한 독인지는 아시겠어요?”
“전혀. 동물의 것인지 식물의 것인지, 아니면 혼합시킨 독인지도 분간이 안 가.”
마차를 모는 마부는 멀뚱한 눈으로 이 일행을 쳐다봤다. 알 수 없는 행동을 한 후 세 사람은 마을로 갔다. 그러더니 한 명이 큰 부상을 입고 왔다. 그 후에는 뭔 독이 어쩌고저쩌고 이야기를 나눈다.
무슨 일인지 도통 모르겠다.
“젠장! 그럼 편히 좀 쉬어 볼까 했는데 못 쉰다는 거 아닙니까, 아가씨. 어떤 미친놈이 마을에 독을…….”
“풍 아저씨, 급히 약선문에 서신을 보내야겠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대충 다른 마을로 가서 전서구를 날리는 것까지 계산하면 육 일입니다.”
우선은 약선문에 이 일을 알리는 것이 먼저다. 여태까지는 역병 쪽으로만 생각하고 그쪽으로만 해답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게 틀렸을 거라는 확신이 든 지금 방향을 급선회하려고 하는 것이다.
독 쪽으로 파고든다면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갈지혁은 병 속에 넣어 둔 응고된 핏조각을 바라봤다. 이렇게 보기만 한다고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분명 전혀 알 수 없는 독이다. 그런데 아까 접해 보았을 때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독일지도 모른다.
갈지혁은 그리 생각했다.
마차에 기댄 채로 숨을 고르던 진검백이 옷을 입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가 크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검을 들어서 허리에 찼다.
‘벨 수 있었는데…… 베지 않았다.’
모든 실력을 보였다면 벨 수 있었다. 그렇지만 베지 못했다. 아니, 베지 않았다.
‘후회하고 있는 것인가? 진검백, 정신 차려라. 이미 지난 일이다.’
지금에 와서 후회한다 한들 변하는 건 없다. 진검백은 자신을 바라보는 풍객을 향해 씨익 웃음을 흘렸다.
울분, 괴로움 같은 걸 모두 이 미소에 담았다.
“오늘도 노숙이나 해야겠군.”
“그러기 싫으면 마을에 들어가서 자든가. 물론 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말이지.”
“그건 사양하지. 자면서까지 목숨 걱정하고 싶지는 않거든.”
진검백은 그대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점점 어두워지나 싶더니 이제는 완벽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