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19화
비록 좋게 만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의 유일하게 화산파의 진검백이 아닌 인간 진검백으로 자신을 봐주는 자다. 이렇게 말한다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친구라고까지 생각한 자다.
그런 자를 베어야 할지도 모른다.
순순히 따라올 자는 분명 아니니까.
“갈지혁…….”
화산파에서 명이 내려왔다. 조만간 다시 연락할 테니 갈지혁을 제압할 준비를 하라고. 최악의 상황에는 죽여도 된다는.
단리문의 앞에 누군가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얼마 전 진검백과 겨루었던 귀영신객이다. 그가 벌써 남만에 도착했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렇다. 귀영신객이 남만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리문이 중원에 있는 것이다.
단리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귀영신객에게 들은 일 때문이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독을 뿌리는 걸 갈지혁에게 걸렸다?”
“죄송합니다. 갈지혁일 줄은…….”
“머저리 같은 놈!”
고함과 함께 터져 나온 힘에 귀영신객의 몸이 벽에 틀어박혔다. 기침과 함께 피가 터져 나왔다.
“갈지혁이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무, 무엇을……?”
“그것이 역병이 아닌 독이라는 걸.”
귀영신객은 찔끔하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갈지혁은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 앞에 나타나 마을을 이렇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고 떠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 세 명 모두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벼이 놀렸다. 성공했다는 생각에 너무나 들떠 해야 할 말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분간하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단리문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것까지 말한다면 분명 죽는다.
그걸 알기에 그는 이 말만큼은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귀찮아. 단화초나 어서 찾을 것이지 왜 이렇게 미적거리는 거야.”
갈지혁이라는 자를 얕봤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자꾸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의식하고 행동하는 것은 분명 아닐 터인데 예상 밖의 일을 자꾸 터뜨린다.
그 예로 점창을 무너뜨린 것이다. 사천당문과 무엇인가 거래를 한 듯한 모습도 그러하다. 개방의 방주와도 함께했고, 그 와중에 또…….
귀영신객이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이번엔 새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단리문의 의자 옆에 새가 내려앉았다. 잘 훈련이 된 새가 분명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단리문은 새에게 달려 있는 종이를 풀었다.
익숙한 글씨체, 그리고 날아든 새를 보는 순간부터 이미 누가 보냈는지는 알아차렸다.
“우려했던 일이군.”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것이다.
무림맹에서 갈지혁에게 직접적으로 무력을 쓰려고 한다. 개방 방주의 강한 반대로 우선 시간은 벌었다 하지만 무진악은 위험한 자다. 마음먹은 이상 분명 어떻게든 갈지혁을 제압해 두려고 할 게다.
단리문은 씨익 웃었다.
“겨우 무진악 따위가 내 일에 간섭하게 둘 수는 없지.”
마음 같아서는 확실하게 무진악을 죽여 버림으로써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싶었지만 지금 하기에는 너무 이른 행동이다. 모든 행동을 취하는 데는 시기가 있다. 무진악은 분명 죽어야 할 자지만 지금은 아니다.
단리문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십사영(十四影)을 불러.”
귀영신객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 해서 십사영이 무엇이냐고 되물으려 했다.
그때 단리문의 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십사영의 누구를 말입니까?”
귀영신객은 깜짝 놀랐다. 그곳에 누군가가 있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도대체 단리문의 주변에는 이만한 괴물이 얼마나 있단 말인가.
귀영신객이 단리문에게 새삼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전부.”
“십사영 전부를 말입니까?”
“그래. 그들에게 중요한 명령을 내린다고 전해.”
“설마……?”
“그래. 십사영 모두 갈지혁에게 간다.”
“죽입니까?”
보이지 않는 그림자의 질문에 단리문은 고개를 저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 전까지 갈지혁은 절대 죽어선 안 된다.
오히려 그림자가 물어본 것의 반대다.
“절대 죽지 않게 지켜 주라고 해. 무림맹에서 손을 쓸지도 모르니 꼭 지키라고.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만큼은 지켜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림자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가 사라졌는지 아니면 계속 그곳에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만큼 은밀한 탓이다.
‘도대체 왜 단리문은 갈지혁에게 집착하는 건가.’
그가 보기에 단리문은 세상에 다시없는 고수다. 무림의 그 누가 온다 한들 단리문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속내를 전혀 알 수가 없는 능구렁이 같은 자다. 그런 그가 왜 갈지혁에게만큼은 유독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이유가 있다는 거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런 행동을 할 자는 분명 아니다. 방해가 되면 죽여 버리는 것이 단리문이다. 갈지혁은 분명 단리문이 행동을 하는 데 방해물이 된다. 오히려 그의 일을 막을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죽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데 오히려 지키려고 한다.
갈지혁이 지니고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기 때문일 게다.
궁금하지만 물을 수는 없다. 그것을 물어볼 만한 입장이 아닌 탓이다.
단리문은 앞에서 호흡을 고르고 있는 귀영신객을 보며 말했다.
“뭐 해?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다른 명령은 추후에 내리지. 그동안 쥐 죽은 듯이 있어. 또 일을 벌이면 그때는 정말 죽여 버릴 테니까.”
“예.”
귀영신객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단리문이 말했다면 결코 농담이 아니다. 귀영신객 정도 되는 자를 눈 깜빡할 사이에 죽여 버릴 만한 힘이 그에게는 있다.
귀영신객이 사라지자 단리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진검백 그놈이 귀영신객을 잡아?”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예전부터 진검백이라는 자가 예상외의 무위를 보였다는 말은 들었다. 그렇지만 낮은 수준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귀영신객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그것이 아니다.
귀영신객이라면 단리문 또한 인정하는 고수다.
비록 단리문에게는 큰 패가 아닐지라도 무공 실력만 본다면 얕볼 수 없는 실력자다. 그런 그와 진검백은 엇비슷하게 싸웠다고 한다.
“약선의 손녀와 알 수 없는 검객, 그리고 독왕 갈지혁이라…….”
재미있는 무리인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의 행보에 관심을 더욱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이 셋이 조금씩 일을 귀찮게 만들고 있다. 갈지혁만 아니라면 예전에 죽였겠지만…….
“화산파가 이것저것을 숨기고 있군그래.”
화산은 힘을 숨기고 있다. 그리고 화산의 문도인 진검백도 그러했다. 분명 갈지혁을 감시하라고 붙인 것은 장문인일 것이다. 그 말은 곧 장문인은 진검백의 진짜 실력을 알고 있다는 소리다.
처음에는 왜 진검백을 갈지혁에게 붙였나 했다.
잘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넉살이 좋은 모양이거니 했거늘 무공 실력이 수준 이상인 듯하다.
예상외의 변수가 사방에서 튀어나오니 아무리 단리문이라고 해도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단리문의 손가락이 의자를 두드렸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죽일 수도 있다.
진검백과 운하연은 분명 걸림돌이다.
톡톡.
의자의 손잡이와 손가락이 부딪치면서 기묘한 소리를 토해 냈다.
운하연은 마을의 외곽 부분에 있는 허름한 집 한 채를 구했다. 약선문의 힘이라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곳은 갈지혁과 운하연이 인면지주의 독에 대해 알아볼 곳이다. 언제나 갈지혁의 옆에 있던 진검백은 밤을 제하고는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혼자 고민할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날이 늘어나는 집안 물품을 보아하니 어디선가 돈을 긁어모으는 듯하다.
“도박이야.”
“도박이요? 화산파의 무인이?”
“저놈은 색다른 놈이잖아.”
갈지혁은 진검백이 어떻게 돈을 모으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처음엔 선뜻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던 운하연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실제로 진검백이 도박장을 다니며 돈을 벌어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극히 일부였고 실제로 진검백은 자신에게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었다. 갈지혁 또한 내색은 않지만 그가 허튼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아 버릴 정도가 된 것이다.
진검백은 눈을 감은 채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 벗어나 약 반 각 정도 가면 나무들로 가득한 공간이 나온다.
그곳은 조용하다. 사람이 거의 오지 않아 주변에 인기척도 없다.
진검백은 눈을 감고 있지만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머릿속에서 진검백은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 상대는 갈지혁이다.
암향표(暗香飄)를 펼쳤다. 단박에 거리를 벌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갈지혁의 몸이 빠르게 따라붙는다.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 진검백은 빠르게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펼쳤다. 전신에 있는 중요한 요혈을 노리고 날아든다. 그때 갈지혁의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가 터져 나오면서 검이 오히려 뒤로 밀려난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갈지혁의 독이 퍼지기 시작한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뿌리는 것을 진검백은 피해 냈다. 갈지혁의 독은 극독이다. 닿으면 아무리 진검백이라도 쉽게 해독할 수 없다.
갈지혁의 손바닥에 녹색 기운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의 장법은 개방의 강룡십팔장과도 견줄 만하다. 그런데도 그만한 내력 소모가 없는 것을 본다면 강룡십팔장보다 낫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어떻게 해야 하지?’
화산에도 많은 장법이 있다.
복호장법(伏虎掌法), 태을전진미리장(太乙電震迷離掌), 낙화추영장(落花追影掌)…….
그 외에도 많은 것이 있지만 그 무엇도 갈지혁의 장법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대로 검을 펼쳐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갈지혁에게 쉽사리 다가갈 수가 없을 것 같다. 그의 주변에 일렁거리는 녹색 기운이 무엇인지 잘 아는 탓이다.
차라리 모른다면 낫다.
갈지혁에 대해 모른다면 어떻게든 싸워 보려고 할 게다. 문제는 갈지혁을 너무 잘 안다는 것이다. 그의 모든 무공을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독에 대해서도 옆에서 본 진검백 만큼 잘 아는 자도 없을 게다.
지금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칫.”
진검백이 눈을 떴다.
그 상황이라면 어떠한 검법을 펼친다 해도 손해를 보게 될 것 같다.
“역시 그것뿐인가.”
갈지혁을 이기기 위해서 진검백은 한 가지 무공을 펼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무공을 펼친다 해도 갈지혁을 제압하기 힘들 것만 같다.
그는 땀을 닦아 내면서 한숨을 쉬었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갈지혁과는.
그런데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갈지혁과 싸우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아니, 거짓말이다.
싸우고 싶다. 미칠 듯이 그와 싸워 보고 싶다.
간단한 비무가 아니라 목숨은 건 싸움을 하고 싶다.
무인이라서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갈지혁과의 싸움이라면 죽는다 해도 전혀 원망하지 않을 수 있다.
갈지혁과의 싸움이라면 많은 것이 남을 것이다.
그것이 그토록 진검백이 원하는 자유로운 검에 한 걸음 다가가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난 무인이니까.”
진검백은 자신의 마음을 그 한 마디로 바로잡았다.
진검백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얼마 전에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아내 달라고 부탁했던 자다.
화산파에서 심어 놓은 자로 정보를 담당한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장문인께서 말씀하시기를 갈지혁이라는 사내를 죽여야 할지도 모르게 된 것은 무림맹의 결정이라고 합니다.”
“무림맹의?”
예상외의 일이라는 듯이 진검백이 반문했다.
그러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진검백이 묻기도 전에 말했다.
“갈지혁이 점창파의 두 장로를 죽인 것이 화근이 되어…….”
“갈지혁이 두 장로를 죽였다고요?”
“예, 그렇습니다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갈지혁이 점창파의 장로를 죽이다니! 그때의 싸움을 옆에서 보고 있었지만 모두 멀쩡하게…….”
“그때가 아니라 밤에 암습을 했답니다.”
“…….”
진검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갈지혁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한다. 갈지혁이 암습? 웃기지도 않다. 그의 옆에 계속 같이 있어서 자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갈지혁은 암습 따위를 할 위인이 아니다.
지금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고 무림에 있는 수많은 무인들을 격파하고 있다. 그러던 그가 굳이 돌아가서까지 점창의 두 장로를 죽여야 할 이유가 없다.
“모함입니다.”
“화산파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당파 장문인 무진악의 의견에 크게 반발하였지요.”
“무당파가 그리 나왔다면 벌써 명령이 내려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개방이 도왔습니다. 아미도 나섰지요.”
그제야 진검백은 상황이 이해가 됐다.
무당파의 무진악이라면 말을 내뱉은 순간 이미 결단을 내린 후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