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21화
“독왕대로행? 우습구나!”
그는 단박에 깃발을 꺾을 듯이 양손으로 잡고 들어 올렸다.
순간,
“그 무식한 손 치워라!”
집 안에서 갈지혁이 걸어나왔다. 거한은 그런 갈지혁의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소만 지어 보였다. 자신이 있다는 듯한 태도다.
“갈지혁이로군.”
“다시 말하지 않아. 깃발 내려놔.”
“안 놓는다면?”
갈지혁이 검지를 들어 올려 거한을 가리켰다. 그런 갈지혁의 태도가 그는 무척이나 우스웠나 보다.
“어쩌겠다는 거야?”
“죽는다.”
“뭐? 푸하핫! 들었는가? 날 죽이겠다는군. 그것도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린 상태로 말이야. 크하핫!”
그는 정말로 유쾌하다는 듯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어느새 갈지혁의 옆에 운하연까지 나와서 섰다.
흑색 피부를 지닌 사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 나왔군.”
그 소리를 놓칠 자는 이 안에 아무도 없다. 그 한 마디로 갈지혁 또한 이들이 자신들을 노리고 왔음을 알아차렸다.
이야기할 것도 없다. 자신들을 노리고 왔다면 이쪽에서 보여 줄 답도 하나다.
“해 보지. 내 손가락이 빠를지 네놈의 손이 깃발을 부러뜨리는 것이 빠를지.”
“큭큭! 오냐! 해 보자! 어디 내 손을 한 번 막아 보거라!”
말을 마친 거한은 그대로 깃발을 반으로 꺾으려는 듯이 몸을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갈지혁의 손가락 끝에서 모아 두었던 독지가 쏟아졌다.
그대로 깃발을 꺾으려던 괴한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나선으로 날아드는 독지의 위력을 늦게나마 깨달은 것이다. 처음부터 방비를 했다면 모를까 너무 늦었다. 그는 급히 깃발을 던지면서 손으로 막으려 했다.
‘늦…….’
쾅!
그때 거한의 앞에 나타난 붕대를 한 자가 독지를 손바닥으로 받아 냈다. 그는 뒤로 밀려나면서 거한과 부딪쳤다.
“방심하지 마!”
“미, 미안.”
붕대 사내의 고함에 거한은 고개를 숙였다. 이 한 가지로 둘의 상하 관계를 알 수 있었다. 갈지혁은 말없이 둘을 향해 다가갔다.
당장에라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둘은 자세를 잡았다. 도끼를 꺼내 든 거한의 눈이 살기로 번뜩인다. 방금 전의 일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는 듯하다.
붕대 사내는 검을 꺼내 들었다.
근데 그 길이가 보통을 넘어선다. 마치 사람의 키만 한 거대한 검인데 검신은 일반적인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막상 갈지혁은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그의 발이 깃발이 있는 곳에 멈추어 섰다. 갈지혁은 쓰러져 있는 깃발을 일으켜 세웠다.
깃발을 잠시 응시하던 갈지혁이 말했다.
“너희들이 누군지 몰라.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지.”
갈지혁은 네 명을 하나씩 살폈다.
진검백에게 날린 공격을 보고 이미 이들이 결코 하류 잡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변하는 건 없다.
“상대 잘못 건드렸어.”
갈지혁의 말에 네 무인은 모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갈지혁을 자신들의 한참 아래로 보고 있는 탓이다.
붕대사내가 갈지혁에게 한 발 내디디며 말했다.
“미친놈, 뚱땡이 녀석 한 번 물러나게 했다고 기고만장하기는.”
분명 갈지혁이 날린 독지는 위협적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검을 들지 않았을 때 이야기다. 검을 들면 그 정도의 독지는 흘려보낼 수 있다. 그리고 이쪽은 무엇보다 네 명이 아닌가.
진검백이 예상보다 강한 자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광살마존(光殺魔尊)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다.
지금 갈지혁의 일행은 암기를 던지는 사내의 정체를 모른다. 그가 만약 광살마존이라는 걸 안다면 깜짝 놀랄 게다.
나이는 사십. 그렇지만 얼굴을 보면 육십이 훨씬 넘은 듯하다.
기이한 무공을 익혔다가 노화가 심해진 탓이다.
살수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별호에 살(殺) 자가 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다. 무림에서는 그를 잡아 죽이려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산동을 뒤흔들던 희대의 살인마는 사라졌다.
그런데 죽었다고 알려진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낙화검과 광살마존? 어린애가 웃지.’
싸움의 승패는 이미 난 것과 다름없다. 그 누구한테 물어봐도 답은 같을 것이다. 이건 이미 정해진 문제의 답을 내리는 것이라고 봐도 된다. 물론 운하연이라는 여인이 있긴 하지만 약선문의 무공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자신들을 이길 수는 없다.
그리고 여인이다. 광살마존 하나로도 둘을 상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셋이 갈지혁 하나만 맡으면 된다는 건데…….
‘저놈은 죽여선 안 되지.’
다른 둘은 반드시 죽이라 했다. 그런데 갈지혁만큼은 제압만 하라고 명했다.
그의 검에 회오리가 일듯이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돌돌 감은 붕대 사이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흘러나온다.
진득한 살기.
살인자의 살기다. 무인이 아닌 살인자들에게서나 나는 그러한 느낌이다.
갈지혁은 두 손에 내공을 집중했다. 경고를 한만큼 그에 맞는 대가를 치뤄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입만 나불거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붕대 사내의 별호는 귀면수라(鬼面修羅)다. 귀신과도 같은 흉악한 얼굴 때문에 그러한 별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광살마존과는 달리 귀면수라는 그리 유명하지 않다. 그는 무림에서 별로 활동하지도 않았고 딱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다.
그는 건달이었다. 하류배였다.
검보다는 주먹으로 사람을 쳐 죽이는 것이 익숙했던 귀면수라를 본 사부는 그를 단박에 제자로 맞아들였다.
온몸이 이미 피로 물들어 있다. 이런 자를 필요로 했다. 늦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부의 무공은 독특했다. 귀면수라는 단숨에 검의 달인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 무공을 익히기 위해 그는 얼굴을 포기했어야 했다는 거다. 뜨거운 불꽃이 그의 몸을 덮었고, 얼굴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귀면수라의 얼굴은 추악하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
“…….”
갈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귀면수라라는 자의 검은 언제든 날아올 수 있다. 방심하고 있다가는 큰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
“무공 실력? 명검?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갈지혁이 대답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느새 귀면수라의 옆에 거한의 사내도 끼어들었다. 도끼를 치켜든 거한의 모습이 마치 산처럼 위압감을 뿌렸다.
철부마왕(鐵斧魔王) 이평!
거대한 쇠도끼 한 자루로 몇 개의 문파를 피바다로 만든 악인. 광살마존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춰 죽은 것으로 알려진 광인 중 하나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말이야, 결단력이닷!”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귀면수라의 검이 갈지혁의 손바닥을 후려쳤다. 손바닥에 내공이 모여 있다고는 하지만 검과 부딪친다면 당연히 피륙으로 이루어진 손이 불리할 거라고 생각한 탓이다.
맞부딪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갈지혁의 손과 몸이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그러자 득달처럼 달려들던 철부마왕의 도끼가 빛을 갈랐다.
번쩍!
콰앙!
갈지혁의 발치에 있던 흙이 전부 터져 나갔다. 도끼가 땅을 움푹 파이게 한 것이다. 엄청난 힘이 아닐 수 없다.
도끼를 그대로 땅에서 뽑아낸 철부마왕은 몸을 비틀었다.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아슬아슬하게 도끼는 갈지혁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공격을 피해 내는 갈지혁을 향해 귀면수라의 몸이 날아들었다.
일순 검이 다섯 개로 갈라지면서 갈지혁을 노렸다. 아슬아슬하게 철부마왕의 도끼를 피해 낸 탓에 이번 공격은 피해 내기가 어려울 듯했다.
갈지혁은 오히려 귀면수라에게 다가가면서 소매 속에 있는 독을 하독했다.
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에 갈지혁의 어깨가 그의 가슴을 쳤다.
“큭!”
뒤로 물러서는 귀면수라를 보며 갈지혁은 끝났다고 판단했다. 독이 정확하게 들어갔다. 이제는 몸의 균형을 잃는 일만 남았다.
갈지혁은 급히 자세를 취하고 철부마왕을 경계했다. 어디서 갑자기 이런 자들이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분명 단순한 떠돌이 무인들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끝이야.’
독이 들어간 이상 귀면수라는 제 실력을 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먼저 그를 제압하고 그 후 철부마왕을 쓰러뜨리면 된다. 그렇다면 저쪽에 남은 숫자는 둘이 된다. 진검백이라면 능히 한 놈을 제압할 테니 우두머리로 보이는 저 흑색의 사내만 남는다.
“시시하군.”
갈지혁은 귀면수라의 담담한 어투에 고개를 돌렸다.
색깔이 변했어야 할 얼굴이 너무나 멀쩡하다.
“네 독은 통하지 않아. 이미 약을 먹었거든.”
약을 먹는 시늉을 하며 귀면수라가 웃었다. 갈지혁은 그제야 이들이 자신들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한 자들임을 확신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들을 보낸 자는 갈지혁에 대해 많은 조사를 한 듯하다.
모든 독에 해약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자들에게 독의 진행을 더디게 하는 약이라도 먹인다면 그 위력은 해독약과 견줄 수 있다.
‘웬만한 독으로는 오히려 시간 낭비야.’
갈지혁은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둘만 해도 버거운데 뒤에 있는 흑색의 사내 또한 싸움에 끼어들 기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갈지혁의 옆으로 운하연이 다가와서 섰다.
그녀는 담담하게 거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맡죠.”
“강해. 내가 네 실력을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못 이겨.”
“보기만 하라고요.”
갈지혁은 말리려고 했지만 운하연은 가볍게 거절했다.
운하연의 얼굴에는 미소만 가득했다. 전혀 경직됨을 느낄 수가 없는 표정이다. 연기인가, 아니면…….
분명 갈지혁은 운하연과 가볍게 몇 번 손을 맞댄 적이 있다. 그저 맞댄 것뿐이라 승패가 나지는 않았지만 운하연이 예상보다 강하다고는 예전부터 생각했다.
그렇지만 운하연의 무공은 약선문의 것. 살인자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이들에게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크, 크흐흐! 너희들이 날 얕보는구나!”
철부마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운하연이 자신을 지목하자 얕보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철부마왕이 막 흥분을 하고 날뛰려는 찰나 흑색 피부를 지닌 사내가 말했다.
“상대해.”
“예?”
“어차피 죽여야 할 사람이야. 지금 죽여. 갈지혁은 우리가 잡고 있을 테니.”
“아, 알겠습니다.”
철부마왕 정도 되는 자가 이리 공손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이자가 괴물이라는 소리다. 운하연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꽉 쥔 주먹을 본 철부마왕은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애매했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사내라면 이런 여인을 죽이고 싶지 않아야 정상이다. 철부마왕 또한 그러했다.
죽이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고 꽉 쥔 주먹은 너무 작아 보듬어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한다.
다른 자의 명령이었다면 어겼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명령을 어기기는 죽기보다 싫다. 그보다 끔찍할 것이 분명하기에.
“약선문은 장이 강하지. 어떤 장법으로 덤비든 내 도끼를 쓰러뜨리지 못해.”
“그래요. 약선문은 무공이 약한 문파죠. 저희는 무공보다는 사람의 치료에 더 힘을 쓰니까.”
약선문이 비록 무림에서 알아주는 문파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무공이 강해서가 아니다. 죽어 가는 사람조차 살릴 수 있다는 명의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약선문 또한 비전 무공들은 꽤나 된다. 그렇지만 그 무공의 위력은 다른 유명 문파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하다.
그런 약선문의 무공으로 파괴만을 자랑하는 철부마왕의 도끼를 막는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진검백 또한 광살마존과 마주하고 있다. 둘은 누가 먼저 움직일지 기다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멈추어 선 채로 상대를 응시했다.
그리고 운하연은 거한 철부마왕과 마주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싸움이다.
운하연이 가볍게 발로 땅을 툭툭 찼다.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슬쩍슬쩍 떠오르면서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운하연이 말했다.
“조심해요.”
쉭!
그녀의 몸이 철부마왕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너무나 빠른 그 움직임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운하연의 손이 정확하게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크억!”
뒤로 물러선 철부마왕의 표정이 변했다. 급하게 뒤로 물러섰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있다가는 배에 구멍이 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약선문의 소문주인 운하연이 이런…….
“전 장이나 지보다는 권을 익혔죠. 막아 봐요.”
“이, 이런.”
운하연의 주먹이 더 이상 작아 보이지 않는다.
철부마왕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약선문에 권법이 있다는 것조차 생소하다. 물론 얕잡아 볼 문파는 아니라 하지만 철부마왕은 자신했다. 단신으로도 약선문 정도는 부술 수 있을 거라고. 약선문의 무공도 몇 번 견식해 본 적이 있다. 허접했다. 위력이 약해서가 아니다. 살의가 없다. 그런 무공으로는 사람을 죽이기도 힘들뿐더라 손에 사정을 두기가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