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23화
갈지혁의 손바닥이 귀면수라의 옆구리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때 흑풍이 움직였다.
퍽!
귀면수라에게 손바닥이 틀어박히는 것과 동시에 흑풍의 발이 갈지혁의 어깨를 찼다.
갈지혁이 볼썽사납게 땅바닥을 굴렀다.
흑풍이 발을 거두면서 옆에 있는 귀면수라를 바라봤다. 그는 내상을 입었는지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아마 흑풍이 갈지혁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었을 게다.
귀면수라는 당장에 갈지혁을 찢어발길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갈지혁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였다.
“이 새끼가…….”
귀면수라의 붕대 사이로 드러난 눈이 붉어졌다.
막 달려들려는 귀면수라를 흑풍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함부로 달려들지 마.”
“…….”
극도로 흥분했던 그의 호흡이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흑풍의 명이라면 반드시 따르는 그다.
흑풍이 자리에서 일어난 갈지혁과 마주했다.
“독에만 수준급인 줄 알았는데 무공에도 능한 모양이군.”
갈지혁의 움직임은 완벽했다. 피하는 과정에서부터 펼쳐진 신법, 그리고 빈틈을 단숨에 파고들며 휘둘러진 일장까지.
갈지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기수식을 취하며 당장에라도 싸울 수 있음을 내비쳤다. 비록 기습적인 일격에 밀려나기는 했지만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갈지혁의 발이 빠르게 앞으로 움직였다.
슉!
흑풍은 고개를 젖혔고, 아슬아슬하게 발이 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놈!”
옆에 있던 귀면수라는 그대로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갈지혁의 소매가 흔들거리나 싶더니 안에서 무엇인가가 흘러나왔다.
검과 함께 귀면수라가 뒤로 밀려났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의 몸이 뒤로 물러서게 된 것이다.
물론 아무 일도 없을 리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귀면수라가 밀려난 것은 폭발 때문이다. 그것도 몸 밖에서가 아닌 몸속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내장이 터져 나갔어야 한다. 그런데 그리 큰 내상을 입지는 않은 듯하다.
비록 순간적인 타격에 뒤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그뿐인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순간적이긴 했지만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고 몸을 추스를 시간을 벌었으니까.
귀면수라가 물러선 틈을 갈지혁은 노리지 않았다. 그의 녹색으로 물든 손이 흑풍을 향해 쏟아졌다. 손을 마주쳤던 흑풍이 뒤로 밀려났다.
두둑 하는 그다지 좋지 않은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발이 비틀렸음에도 흑풍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잡고 반대쪽으로 잡아당겼다.
탈골되었던 어깨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뭐야? 독만 조심하면 된다더니.”
흑풍은 명령을 내린 자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는 갈지혁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흑풍이 보기에는 그조차도 아직 갈지혁의 전부를 알지 못하는 듯하다.
손바닥이 얼얼하다. 순간적으로 쳐낸 장법이 그러했다.
“과연 일수만독의 제자.”
“……누구냐?”
“응? 내가 흑풍이라는 건 너도 알지 않나?”
“누구기에 그걸 아느냐고 묻는 거다.”
“궁금한가? 미안하지만 이야기해 줄 수는 없어.”
갈지혁은 흑풍과 귀면수라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난 들어야겠다.”
말을 마친 갈지혁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는 무엇인가가 갈지혁의 몸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흑풍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자연의 힘이라…… 어처구니없는 무공이군.”
그는 알아차렸다. 지금 갈지혁이 펼치는 수라독공은 자연의 힘을 체내로 끌어들이는 무공이라는 걸.
갈지혁의 팔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던 와중 그의 손가락 열 개에서 녹색의 기운이 터져 나왔다.
“십선유루지(十仙柳累指)!”
수라독공의 내공이 손가락에 모였다. 그리고 그것이 어마어마한 독기를 품고 터져 나오는 것이다.
흑풍은 재빠르게 몸에 있는 내기를 끌어 모았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그 열 개의 지공이 모두 자신이 아닌 귀면수라에게 쏠렸다.
‘앗차! 당했다!’
갈지혁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 것이다. 그렇지만 귀면수라 또한 쉬운 상대가 아니다. 그는 날아드는 열 개의 지공을 검으로 막아 냈다. 검 주변에 흰색의 검막이 펼쳐졌다. 절정 이상의 고수라고 해도 쉽사리 펼칠 수 없는 무공이다.
그렇지만 갈지혁의 지공이 독을 품었다는 건 일반의 지법과는 다르다는 뜻이 된다. 검막이 녹아 버렸다. 지독한 독기에 검막조차도 녹아 버린 것이다.
수라독공은 일악천이 평생에 걸쳐 만든 무공.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귀면수라는 순간 당황했지만 재빠르게 다음 수를 펼쳤다.
탁. 타닥.
발이 가볍게 지면을 찼다. 몸이 허공으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아름답게 춤을 춘다. 아슬아슬하게 지법이 스치면서 지나간다.
공중에서 옷자락이 마구 터져 나간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막상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온몸의 진이 다 빠진다.
땅에 내려선 귀면수라의 옷은 넝마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모두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몇 군데 자잘한 상처를 입었다.
“크윽!”
그냥 지법이 아니다. 독공을 기반으로 한 지법이다. 상처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다르다. 독이다. 그것도 지독한 독.
지법을 펼칠 때 아까 낸 갈지혁의 상처에서 난 피가 섞였다. 갈지혁의 피는 지독한 독이다. 사람의 피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독성을 지녔다.
흑풍이 귀면수라와 갈지혁의 길을 막아섰다.
지금 귀면수라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다.
“이제 나와 싸우지.”
“그리 보채지 않아도 너도 마찬가지 신세가 될걸.”
“미안하지만 그리는 안 될 거야.”
이질적인 흑색의 피부를 지닌 흑풍이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주먹에 검은색 기운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사부를 죽이면서까지 손에 넣은 힘이다. 너의 무공과는 격이 달라.”
흑풍에 대해 전혀 몰랐던 갈지혁으로서는 전혀 생소한 이야기다.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갈지혁도 손을 들어 올렸다.
앞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거리면서 시야를 좁혔다 넓혔다 한다.
갈지혁이 차갑게 말했다.
“그런 건 관심 없어. 하지만 이 순간 널 죽여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군.”
“큭큭, 말만큼이나 강한가 한번 볼까?”
“스승은 아버지다.”
그 한 마디 말이 끝나는 순간 갈지혁의 손바닥에서 장법이 쏟아졌다.
“오냐!”
흑풍은 주먹을 내질렀다. 권강이 쏟아졌다. 흑색의 침묵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갈지혁은 그대로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손가락 끝에서 지법이 흘러나왔다.
샤샤샥!
가벼운 한 번의 움직임으로 그 공격을 모두 피해 낸 흑풍은 공중을 향해 껑충 뛰어올랐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갈지혁과 흑풍이 공중에서 맞붙었다.
일 장 일 장이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하다.
공중에서 둘의 몸이 심하게 흔들리면서 동시에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슬아슬하게 발이 닿는가 싶더니 둘의 몸이 다시금 달라붙었다.
‘시간을 주면 안 돼.’
갈지혁은 재빠르게 허리춤에 있는 병을 하나 깨뜨렸다.
액체는 그대로 앞에 있는 흑풍에게 튀었다. 살까지 녹인다는 화골산을 변형시킨 독이다. 액체를 하반신에 적시고도 흑풍은 멀쩡했다. 녹아내린 것은 그의 하의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뻐억!
동시에 주먹이 흑풍의 복부에 틀어박혔지만 오히려 손에 강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예상대로다. 흑풍의 몸은 마치 쇠처럼 단단하다. 그리고 그 외공이 얼마나 강했으면 화골산 이상 가는 독을 그대로 버텨 낸단 말인가.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으로 상대해야 하나?’
몸이 단단하다면 속을 파괴하는 내가중수법으로 공격하는 것이 낫다.
독을 써도 외상을 주는 것보다는 내상을 주는 게 낫다는 소리다. 문제는 이런 자라면 내상을 입히는 것도 쉽지 않다.
콰악!
손목을 비틀어 버릴 것처럼 흑풍의 손이 갈지혁의 손을 움켜쥐었다. 양손을 마주 잡은 채로 둘은 얼굴을 맞댔다.
“갈아주마, 꼬마야.”
“개보다 못한 놈에게 죽어 줄 생각은 없다.”
둘은 그렇게 서로 손을 마주 잡은 채로 힘겨루기에 들어선 것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둘은 엇비슷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런데,
“흐으, 흐으.”
멀리서 내공으로 독기를 제압하려던 귀면수라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가 검을 든 채로 갈지혁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독기를 제압하지는 못했지만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에 억지로 몸을 움직인 것이다.
귀면수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갈지혁은 당황했다.
지금으로써는 어떻게 피해 없이 막아 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새 그의 검이 갈지혁의 어깨까지 와 닿았다. 위의 명령이 있어 죽이지는 않겠지만 한쪽 팔을 한동안 쓰지 못할 정도의 병신으로 만드는 것 정도는 용서해 줄 게다.
어떻게든 막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갈지혁의 목 뒤에서 무엇인가가 튀어 나왔다.
‘암기!’
귀면수라는 이런 암기술은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급히 검으로 그것을 쳐냈다. 그런데 그것이 검을 피하며 오히려 안으로 파고들었다.
“헉……!”
시야가 갑자기 뿌옇게 변했다. 온몸이 부들거리면서 떨리기 시작했다.
귀면수라의 귀에 어렴풋이나마 흑풍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뱀!”
‘뱀? 그게 무슨……?’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풀썩.
귀면수라는 그대로 쓰러졌고, 손목을 물고 있던 녹색 뱀이 천천히 갈지혁의 발 아래로 다가왔다.
사황이다.
갈지혁에게 절체절명의 순간이 왔음을 눈치챈 사황이 귀면수라의 숨통을 끊어 버린 것이다.
“말도 안 돼.”
흑풍의 표정이 변했다.
* * *
흑풍은 일순 당황했지만 이내 표정이 풀어졌다.
실로 당황스러운 일이긴 했다. 갈지혁의 옷 사이에서 뱀 하나가 튀어 나와 귀면수라를 노렸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다. 분명히 귀면수라는 그것을 눈치채고 검을 움직였다.
아마 암기라고 생각했을 게다. 어쨌든 공격은 정확하게 뱀을 갈라놓았어야 한다. 그런데 뱀이 오히려 공중에서 그 공격을 피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뱀이 어떻게 무인의 공격을 피한단 말인가. 그것도 절정의 수준에 오른 귀면수라의 살검을 말이다.
하지만 현실로 일어난 일이다. 부정할 수는 없다.
“대단한 뱀이군.”
갈지혁의 다리 부근에서 고개를 꼿꼿이 치켜 든 사황을 보며 흑풍이 말했다.
옆에서 싸우는 나머지 네 명의 인물도 지금의 상황을 알아차렸다. 싸우는 와중에도 진검백이 소리를 쳤다.
“녀석, 한 건 했구나!”
사황의 독에 당해 쓰러진 귀면수라를 바라보던 흑풍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즉사다. 얼마나 지독한 독을 지닌 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귀면수라는 독에 중독되어 죽은 것이다. 갈지혁을 상대하기에 미리 몇 가지 해독약을 복용한 상태다.
단리문에게 받은 것들로 이것만 복용하면 웬만한 독에는 꿈적도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가 준 해독약조차도 무시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독을 저 뱀이 지니고 있다는 소리다.
도대체 어떠한 뱀이기에…….
“좋은 애완동물을 두었군 그래.”
“친구다.”
“큭, 동물하고 친구? 우습군그래.”
흑풍은 갈지혁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검은 기운이 몰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흑풍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마공이다.
금지된 마공으로 현재는 뇌옥에서도 죽어 버린 혈천마제(血天魔帝)의 무공이다.
흑마진천무뢰마공(黑魔振天舞雷魔功).
아예 무공에 마공이라는 호칭을 집어넣었을 정도로 그것은 지독한 사기(邪氣)를 지닌 무공이다.
흑마진천무뢰마공을 펼치게 되면 온몸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힘은 평소보다 몇 배는 강해지고 몸의 움직임 또한 그렇게 된다.
으드득으드득.
온몸이 비명을 토해 낸다. 뼈가 위치를 바꾸는 듯하다. 몸 상태가 싸우기 가장 좋은 최상의 조건으로 변하고 있다.
갈지혁은 수라독공을 운기했다. 상대가 어떠하든 지금 갈지혁이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수라독공 하나뿐이다.
수라독공의 경지가 올라설수록 갈지혁의 몸에서 풍기는 독기가 강해졌다. 이제 그의 몸에서 풍기는 독기는 가히 살인적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저 수라독공을 운기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살아 있는 것들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 갈지혁은 전력을 다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만큼 흑풍이라는 자가 여태까지 상대한 자와는 격이 다르다는 소리가 됐다.
사황은 날카로운 이를 들이 내밀고 당장이라도 공격하려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