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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125화 (125/200)

# 125

25화

애초부터 물러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갈지혁이라는 인물은 물러설 줄을 모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거 하나만은 분명하다.

이미 사황은 품 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다. 흑풍은 사황의 존재 또한 잊지 않고 있다. 그냥 뱀이었다면 전혀 신경 쓸 거리도 되지 않았을 게다.

그런데 사황은 조금 달랐다. 지독한 독성도 그렇지만 검을 피하기까지 하는 기이함을 보였다. 물리지 않는다고 해도 잘못했다가는 갈지혁에게 일격을 허용할 기회를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갈지혁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아슬아슬하게 주먹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팔로 갈지혁의 주먹을 밀어낸 흑풍은 재차 이어지는 갈지혁의 발을 손으로 막아 냈다.

“핫!”

막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쭉 뻗어진 손에서 무엇인가가 터져 나왔다.

탄류(呑流)라고 불리는 흑풍의 무공이다. 내공을 이용해 매 공격마다 탄류라는 무공을 덧씌운다. 그렇게 되면 그 파괴력은 다섯 배가량 증가하게 된다.

갈지혁의 몸이 뒤로 마구 밀려났다. 그런데 주먹을 거둔 흑풍이 놀랍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흘려보냈군 그래.”

갈지혁이 빠르게 흑풍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렇지만 흑풍은 갈지혁을 놓치지 않았다. 내뻗은 주먹을 잡아 낸 흑풍이 미소를 지었다.

“셋이 한 번에 덤벼. 그래야 그나마 날 이길 승산이 있을 거 아냐? 그것도 아주 극히 미미할 정도지만.”

“…….”

갈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매서운 눈으로 흑풍을 노려봤다. 가려진 눈에서 붉은 살광이 터져 나왔다. 그 기세가 섬칫했지만 흑풍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미 끝난 싸움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이들이 아무리 강해도 승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게다. 현 무림에서 자신을 이길 만한 자는 열 손가락 안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 그에게 패배라는 단어가 있을 리가 없다.

그때였다.

“음?”

갑작스럽게 손에 전해지는 기이한 기운에 흑풍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독!’

자신이 주먹을 잡고 있는 형태였는데 그 상태에서 손을 통해 독기가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흑풍은 급히 주먹을 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착 달라붙은 것처럼 갈지혁의 손이 떨어지지 않는 게 아닌가.

“이익!”

흑풍은 몸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독기를 밀어내려고 했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분명 독의 이동 경로가 보인다. 애초부터 독에 대한 내성도 강했고, 또 준비된 약도 먹어둔 상태다. 독에 당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갈지혁의 몸에서 나온 독은 피부를 통해 안으로 스며들었다.

독은 분명 강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제압할 수만 있다면 위협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랬기에 내공으로 급히 독을 억누르면서 밖으로 배출해 내려고 했다. 길을 찾았고 독의 움직임도 느꼈다.

그런데 안 된다.

마치 터져 버린 물줄기처럼 독은 미친 듯이 몸 안을 헤집었다.

손을 놓으려고 해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니 흑풍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놈이!”

흑풍은 발로 갈지혁의 가슴을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갈지혁의 몸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가 내려섰다.

그리고 그 순간 흑풍의 몸이 반대편으로 퉁겨졌다.

콰당!

나무를 들이받고서야 흑풍의 몸이 멈췄다. 갈지혁의 몸에서 반탄력이 쏟아지면서 그의 몸이 밀려난 것이다.

흑풍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머리에서부터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올려 피를 닦아 낸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생각이 바뀌었다.”

조금 손봐주고 말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생각이 완전하게 변해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괴롭게 죽여 버리고 싶다. 그렇지만 그건 안 된다. 단리문이 그의 움직임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리를 상하게 해서도 안 된다. 갈지혁이 찾는 무엇인가를 단리문 또한 원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오른팔, 그 팔을 다시는 못 쓰게 반병신을 만들어주지.”

오른팔 하나로는 대가가 너무 작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금 흑풍이 갈지혁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이 될 것이다.

“뼈를 조각조각 내주지. 주먹질은 물론 못 해. 무거운 것도 못 들어. 아니, 애초에 손조차 들어 올리지 못할 거야.”

갈지혁의 몸에 녹색의 기류가 모이기 시작했다.

“퉤.”

검은색 피를 뱉어 낸 갈지혁이 기수식을 취했다. 전혀 물러서지 않는 모습이 흑풍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으드득!

흑풍이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 순간 흑풍의 몸 주변으로 엄청난 기운이 몰리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기운이 점차 하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둘의 싸움을 보고만 있던 진검백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수강(手|)……!”

검을 쓰는 자들의 검강, 도를 쓰는 자들의 도강과도 같지만 그러면서도 은근히 다른 것이 바로 수강이다. 도구가 있는 상태와 없는 것은 천지 차이다.

말로만 들어 봤지 실제로 수강을 뿜어내는 자는 생전 처음이다.

검은색의 수강이 넘실거리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삼킬 듯이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갈지혁은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깊게 숨을 쉬었다.

‘결이다.’

장법으로 상대하려는 것이다. 수강을 장법으로 상대하려는 갈지혁의 생각을 알았다면 백이면 백 모두 말리려 들 게다.

그렇지만 갈지혁이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일악천에게 직접 전수받은 그 장법이다. 독장이지만 그 위력은 개방의 강룡십팔장에 비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주변에 있는 나무와 흙들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진검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 일격은 분명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을 게다. 주변에 있는 건물과 나무들이 모두 부서질지도 모른다.

“혈천수강(血天手|)!”

흑풍의 손끝에서 넘실거리던 수강이 쏟아졌다.

유성우처럼.

그것은 마치 터져 나오는 화산과도 같았다. 검은색의 수강은 모든 것을 부술 듯이 쏟아져 내렸고, 수강이 닿는 모든 것은 먼지로 화해서 사라졌다.

주변의 광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혈천수강은 그만한 위력을 지닌 무공이었다.

갈지혁의 몸은 최상의 상태다. 운기하고 있던 수라독공의 기운이 몸을 감쌌다. 사방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몸은 가볍다.

‘간다.’

화악!

손이 뒤로 밀려났다가 앞으로 퉁겨져 나갔다. 용천혈부터 백회혈까지 이어져 있는 모든 혈도의 피가 한곳으로 쏠리는 기분이다.

우드득!

수강과 갈지혁의 장법이 부딪쳤다.

퍼엉!

두 개의 힘이 격돌하는 순간 갈지혁의 몸과 흑풍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무승부다.

“갈지혁!”

진검백은 간신히 땅을 구르다가 일어선 갈지혁을 보면서 소리쳤다. 한눈에 보아도 내상을 입은 게 분명하다. 입으로 연신 피를 토해 냈고, 옷은 넝마가 되어 버렸다.

“크으…….”

흑풍도 일어섰다. 그 또한 그다지 좋아 보이는 상태는 아니다. 흑풍 또한 옷은 엉망진창이었고, 온몸에 상처로 인해 피가 흘러나왔다.

“혈천수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는 자신의 수강이 갈지혁과 대등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컥컥!”

입에서 몇 번 피를 게워 낸 흑풍의 눈에 살기가 짙어졌다. 흑풍의 호흡이 거칠다. 갈지혁과 마찬가지로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하다.

갈지혁은 간신히 나무에 기댄 채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의 짧은 순간의 격돌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준 상처는 보통을 넘어선다.

절정의 고수들이다. 그런 둘이 필살초를 펼쳤다. 겨우 일 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도 있다. 둘은 그 일격에 모든 것을 담았다고 봐도 된다.

잠시 뜸을 들이던 흑풍이 먼저 움직였다. 갈지혁이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탓이다.

나무에 기대어 서 있던 갈지혁의 눈앞에 흑풍의 모습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퍽!

주먹이 복부에 틀어박혔다. 모든 힘이 다 빠진 듯했지만 그래도 그 일격은 엄청난 괴력을 지녔다. 갈지혁의 몸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순간 갈지혁의 팔꿈치가 흑풍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큭.”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던 흑풍은 그대로 발로 갈지혁의 얼굴을 걷어찼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가 홱하니 돌아갔다. 비틀거리면서 갈지혁은 나무에서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땅에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다.

찰나, 갈지혁의 소매에서 무엇인가가 터지면서 흰 연기를 쏟아 냈다.

흑풍은 급히 소매를 휘두르면서 뒤로 물러섰다. 빠르게 대처했다고 생각했지만 머리가 핑 돈다. 아까 전에 당했던 독의 기운까지 몸에서 요동을 치니 버티기가 어렵다.

흑풍은 쓰러지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끝내야 한다.’

지금 끝내지 않으면 나중에 귀찮아진다. 문제는 지금 자신이 죽여야 할 자가 갈지혁이 아니라는 거다. 차라리 갈지혁만 죽이면 되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죽이기라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흑풍이 죽여야 하는 것은 갈지혁을 제외한 두 명이다.

‘지금 난 저 둘을 이길 수 없다.’

흑풍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리고 애초부터 그는 진검백과 운하연을 상대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이상의 내공을 남겨두려고 했었다.

비록 혈천수강이 내공의 소모가 극심한 무공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녹초가 되는 무공은 아니다. 몇십 번을 사용한 적도 있는 것이 바로 혈천수강인 것이다.

그런데 갈지혁의 손과 닿는 순간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찰나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할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든 내공을 쏟아 내지 않고는 모든 기운이 자신에게 쏟아질 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모든 내공을 쏟아 냈다. 그러면서 내심 갈지혁이 그대로 나자빠질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결과는 무승부다.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내고도 겨우 무승부라는 소리다.

비틀거리던 흑풍은 그대로 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발이 갈지혁의 턱을 올려 찼다. 경쾌한 소리가 귓가로 들린다.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라면 갈지혁은 일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비틀거리면서 쓰러질 것처럼 뒤로 물러서던 갈지혁이 용케도 버텨 냈다.

이제는 흑풍이 죽을 맛이었다. 내공이 바닥을 드러내자 억누르고 있던 독기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버티다가는 죽는 건 흑풍이 된다.

‘무인은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하는 법.’

갈지혁을 바라보던 흑풍의 눈이 커졌다. 갈지혁의 몸으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갈지혁의 거칠었던 숨이 점점 제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젠장, 기이한 내공 수법이군.’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다. 흑풍은 그대로 몸을 돌려 마을 밖으로 달렸다.

독기를 억누르고 있던 한 줌의 내공까지도 모두 발에 실었다. 우선은 마을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다. 거기까지만 가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줄 자들이 있다.

임무는 실패했지만 우선은 살고 볼일이다.

흑풍은 진검백과 운하연이 자신을 쫓아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흑풍이 사라지자 그 둘은 급히 갈지혁을 향해 달려갔다. 버티고 서 있기는 하지만 보통의 부상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수강을 장법으로 막아 냈다. 누가 강기를 장법으로 막으려고 든단 말인가. 그렇지만 갈지혁은 밀리지 않았다.

“괜찮아요?”

운하연은 의원답게 갈지혁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외상은 많지만 큰 것은 없다. 용케 피해 낸 모양이다.

문제는 내상이다.

‘강기를 손으로 막아 냈어. 아무래도 내상이 심할 거야.’

운하연은 맥을 짚었다. 혈도를 따라 내공의 움직임도 확인했다.

갈지혁의 상태를 살피는 운하연을 보고 진검백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갈지혁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운하연이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강기를 손으로 막아 낸 사람이 이렇게 멀쩡할 줄은 몰랐어요.”

갈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간신히 숨을 쉬면서 상태를 회복하려고만 들고 있다.

“업어서 안으로.”

운하연의 부탁에 진검백은 갈지혁을 업었다. 그 와중에도 갈지혁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내공심법을 운기했다.

싸움이 끝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흑풍은 십사영에게 구조됐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이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있던 것은 바로 십사영이라는 인물들이다. 갈지혁과 그 일행의 행보를 감시하라고 명 받은 이들은 추적과 은신에 있어서는 가히 발군의 실력을 지녔다.

흑풍은 치료를 받고서야 눈을 떴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자마자 버티지 못하고 기절한 그를 십사영이 구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약재로 그를 치료한 것이다.

“단주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

“당신이라면 성공하고도 남을 거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무에 몸을 기댄 채로 흑풍이 피식 웃었다. 자신 또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역시 상대의 실력을 너무 낮게 봤던 것이 컸다.

“견문발검(見蚊拔劍)…….”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 갑자기 무슨……?”

“큭큭, 그래. 단주께서 괜한 일에 나를 보냈다고 생각했지. 아니, 단주 또한 너무 갈지혁을 얕보고 있어. 단주에게 전해 주게. 갈지혁이라는 자, 단주가 생각하는 이상의 인물이라고.”

말을 마친 흑풍은 눈을 감았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지만 더 이상 그것을 이을 여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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