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3화
마차가 덜컹거리면서 움직였다.
누운 채로 눈을 감고는 있지만 갈지혁은 잠들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야. 상대가 강했다 하지만…….’
흑풍은 분명 강자다.
운하연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인물이다.
그런 자와 이 정도로 싸웠다면 분명 약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걸로 만족할 갈지혁이 아니라는 거다.
흑풍이었다고 해서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다.
흑풍이 아니라 무당파 전체가 달려들었다고 해도 이겼어야 한다. 이 정도의 부상을 입고 승리했다면 그건 제대로 된 승리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분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일악천이다.
갈지혁의 머릿속에서 그는 최고의 무인이다.
강했고, 빈틈이 없다. 머리 회전도 빨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고의 답을 낸다.
품속에서 꿈틀거리는 이 인면지주도 분명 일악천이 보낸 것일 게다. 황금귀 이풍이 보낸 것이긴 하지만 일악천의 부탁이 있었기에 그가 이렇게 행동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인면지주를 보낸 것이 섣불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답은 인면지주에 있다.’
일악천은 갈지혁의 모자란 점을 생각해 둔 모양이다. 아마도 그 답을 이 인면지주에서 찾으라는 것일 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화초…….
일악천이 몇 가지 당부한 말이 있다. 갈지혁은 그 말들을 잊지 않고 있다.
‘스승님.’
멀어졌지만 그는 언제나 갈지혁의 머리 위에 있는 것 같다.
그리 먼 곳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갈지혁의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사독문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죽음이 꿈틀거린다. 이 안에서 사람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사독문에 한 노인의 모습이 비친다. 흉악한 외모에 쭈글쭈글한 피부.
한눈에도 혐오스럽다는 느낌이 팍 풍긴다.
그의 손에는 장작이 들려 있다. 무엇인가 요리를 하려는지 노인은 옆에 둔 생물의 가죽을 벗겼다.
악취가 갑작스럽게 사방을 덮었다.
요리가 아니다.
그 노인은 무엇인가를 만드는 듯했다.
익숙한 손길로 벗기던 생물은 뱀이었고, 이내 옆에 있는 통에서 지네들을 꺼내서 냄비에 집어넣었다.
악취는 더 심해졌다.
그렇게 무엇인가에 심취하고 있던 노인이 주변의 변화에 눈을 돌렸다.
그러더니 이내 피식 웃고는 다시금 자신의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잠시 고개를 돌린 지 반 시진 정도가 흐른 후 노인의 거처로 젊은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일악천?”
“냉큼 꺼져라, 죽고 싶지 않으면!”
“난 지운경이라 하지.”
“그놈의 손자로군. 갈지혁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갈지혁에게? 뭐라던가?”
자신의 할아버지의 사형인 일악천에게 지운경은 스스럼없이 반말을 내뱉었다.
그런 지운경의 태도에 화가 날 만도 하련만 일악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쳐 죽일 놈.”
“푸하하! 그 녀석 답군.”
“네놈이 판단할 정도로 작은 그릇이 아니다, 그놈은.”
일악천은 몸도 돌리지 않았다.
처음 지운경이 이곳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았다.
그러한 일악천의 모습에 지운경은 화가 치솟았다.
“건방진. 아직도 네가 일수만독인 줄 아느냐? 패해서 사독문에 갇힌 주제에…….”
“그래, 패해서 갇혔다. 그런 나에게 죽고 싶지 않거든 냉큼 꺼지거라!”
“그래도 이놈이……!”
그때 일악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지운경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결코 험악한 외모 때문이 아니다.
험악한 것으로 치자면 저보다 더한 자를 수도 없이 봐왔다. 그렇지만 이건 결코 험악함에서 느껴지는 그러한 감정이 아니다. 막연한 두려움이 온몸을 감쌌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마구 휘저었다.
“꼬마야.”
“누, 누구보고 꼬마라는 거냐!”
“지금 널 죽일 수 있지만 내가 널 죽이지 않는 건…… 내 제자 녀석이 네 목숨을 원하기 때문이야. 운 좋은 줄 알아라.”
일악천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갈지혁이 그를 원하고 있다.
갈지혁에게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
유일한 친구라고 믿었던 자이지만 배신했고, 그의 어머니까지 죽이려고 했던 자다.
지금 일악천이 지운경을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러지 않는 것은 갈지혁 때문이다.
소름이 오싹 돋았지만 지운경은 오히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외쳤다.
“웃기고 있군! 이제 갈지혁은 죽어! 나한테 죽을 거야! 단리문이 갈지혁의 행보를 쫓고 있다니 곧……!”
“단리문?”
갈지혁을 죽인다는 말에까지 코웃음을 치고 있던 일악천이었지만 단리문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움찔했다.
일전에 자신을 찾아왔던 젊은 사내가 분명하다.
그는 안 된다. 단리문이라는 자에게서는 지독한 혈향이 풍겼다.
위험한 자다.
일악천은 몸을 돌려 지운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지운경은 급히 손을 휘둘러 반항했지만 몇 번 움직이지도 못하고 목을 붙잡히고야 말았다. 일악천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라. 내 제자에게 손끝 하나 댔다간…… 네놈들의 삼족을 멸해 주마. 네 할아버지에게도 전해.”
말을 마친 일악천은 지운경을 땅에 패대기쳐 버리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일악천의 등 뒤에서 지운경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운경이라는 자, 어차피 그에게는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집 안으로 들어선 일악천의 표정이 수심으로 가득해졌다.
“안 돼. 그놈은 안 돼.”
단리문이라는 자, 그 그릇을 알 수 없지만 자신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자다.
일악천은 창밖을 바라봤다.
이 길로 쭉 간다면 사로가 있다. 사독문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
“사로…….”
약속을 한 것이 있다.
결코 이곳을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지대익과의 약속이 아닌 스스로의 약속이었다.
일악천은 집 안을 한 번씩 둘러봤다.
꽤나 오랫동안 지내왔다.
물건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 순간 갈지혁의 얼굴이 떠올라 버렸다.
“녀석.”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이곳에 온 후 유일하게 마음을 준 사내였고, 평생 동안 단 한 번 거두었던 제자이다.
마음은 정해졌다.
“금방 돌아오마.”
일악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단 한 명, 무당파의 장문인 무진악 만이 부들부들 떨 뿐이다. 그의 수염이 파들거리면서 떨렸다.
색까지 변해 버릴 정도의 얼굴.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다는 소리다.
그의 입에서 극도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당파의 무인 백 명이 죽었소.”
“고인의 명복을…….”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소!”
무진악은 명복을 비는 화산파의 장문인에게 소리를 질렀다. 청허검(靑許劍) 무진악(撫眞渥)은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독고문(獨孤文)은 입을 닫았다. 지금 무진악이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잘 아는 탓이다.
“화산! 개방! 아미! 당신들은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왜 개방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오?”
“책임을 묻는 게 아니오! 다만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오! 당신들이 지금처럼 갈지혁이라는 자를 운운하면 앞으로 이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오! 어떻게 본다면 그날의 일은 독에 대해 관대했던 현 무림 때문이기도 하오!”
무당파에서 변이 일어났다.
한 무인에게 백 명에 달하는 무당파의 무인이 죽은 것이다. 문제는 오십 명 이상을 단번에 죽인 한 번의 술수다.
독이다.
그자는 독을 사용했다.
무당파의 속가제자였던 단리철이라는 인물이 독을 쓴 것이다. 그리고 무진악은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분노를 세 문파에게 돌리는 것이다.
분명 억지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독에 대해 관대했던 것이 세 문파의 다리를 잡았다.
“애초부터 독을 쓰는 자가 무림에 나타났을 때부터 제대로 된 조치를 취했어야 하오. 그렇다면 겁도 없이 이러한 짓을 벌이는 자가 나타났을 리 없잖소.”
때가 좋지 않았다.
갈지혁이라는 자가 독으로 무림을 시끄럽게 하는 이 판국에 독으로 인해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무진악은 애초부터 갈지혁을 죽이려고만 들던 자다. 이번 기회에 독에 대해 두둔했던 화산파를 비롯해 자신에게 반대되는 세력의 입지를 약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갈지혁까지 죽이려 드는 것이다.
무당파가 그리 된 것은 분명 화가 나고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무진악은 그러한 현실에서 괴로워만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벌어진 일을 이용해 자신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허허, 이거 참. 갈지혁이 그 일을 벌인 것도 아니고, 무당파의 속가제자가 벌인 일을 우리에게 넘기려고 하다니…… 검으로 죽이면 정당한 것이고 독으로 죽이면 비겁한 짓인가? 내참, 우습기도 하군.”
“지금 뭐라고 했소?”
무진악의 몸에서 살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화산파와 아미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개방 방주인 걸왕만은 달랐다.
그는 구파일방의 하나이긴 했지만 가장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무인이기도 했다.
개방은 명분 때문에 입을 닫고만 있는 화산파, 아미파와는 그 궤를 달리했다.
걸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진악, 네 생각을 잘 알겠다. 결론을 말하자면 넌 갈지혁을 죽이자 이 말이 아니더냐!”
“이, 이놈이!”
갑작스러운 하대에 무진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또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리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말린다 해도 이제 먹히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한 가지 말하지. 우리 개방은 갈지혁을 쫓지 않는다.”
“마음대로 하거라!”
무진악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걸왕은 피식 웃더니 몸을 돌렸다. 어차피 이런 자리에 오래 있고 싶지도 않았다.
무당파와 등을 돌리게 되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거지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어딘가에 얽매여 자신의 속마음을 보이지 못해서야 그게 어디 거지인가, 가장 솔직해야 그게 거지지.
“그럼 이 비렁뱅이는 이만 물러나겠소이다. 냄새 나는 저와 함께해서 고역들이 많았소. 그럼 이만. 낄낄낄.”
말을 마친 걸왕은 문을 열고는 사라졌다.
방 안은 잠시 침묵으로 가득했다. 들리는 거라고는 화가 나 씩씩거리는 무진악의 거친 숨소리뿐이다.
“후우, 다들 진정들 하고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청성파의 장문인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회복시키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언제부터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함께하는 자리가 이리 되었는가. 무진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내뱉었다.
“이제부터 무림에서 허락받지 않고 독을 쓰는 자는 모두 무림공적으로 잡아들이려고 하오. 의견들 있으시오?”
있을 턱이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반대를 한다는 것은 곧 무진악과 싸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산파와 아미파 또한 반대 의사를 보일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독을 쓰는 자들이 모두 처분 대상이 된다는 건 곧 갈지혁도 포함된다는 소리다.
더군다나 갈지혁은 점창파의 장로를 밤에 암습으로 죽였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갈지혁은 무림공적이 되는 것이다.
물론 당문은 여태까지처럼 약간 예외를 둘 것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눈 밖에 난다면 무진악은 단번에 당문 또한 압박하려고 들 게 분명하다.
지금 무당파는 큰 변을 당했다.
물론 직접적인 영향을 준 건 아니지만 무진악이 물고 늘어진다면 화산파와 아미파 또한 그 피해를 입게 하는 데 원인을 제공해 주었다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의 이목이 가장 중요한 정파에게 그러한 것은 치명적이다.
가뜩이나 최근 내부 사정이 좋지 못한 두 문파로서는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까지 감내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