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4화
화산과 아미는 개방과 입장이 다르다. 모든 것을 감내할 정도로 그들은 개방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두 문파가 무진악과 싸우면서까지 딱히 갈지혁을 지켜줘야 할 이유도 없는 게 사실이다.
그들은 무진악과 싸우기보다는 독을 쓰는 자들에 대해 더욱 강하게 탄압하는 것이 낫다.
또한 갈지혁이 언제 자신들의 문파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굳이 싸우면서까지 갈지혁을 지켜줘야 할 의리가 그들에게는 없다.
단지 아미파는 일전에 갈지혁에게 신세를 진 일이 있는 탓에 여전히 씁쓰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독고문, 당신의 제자가 갈지혁의 옆에 있다고 들었소. 연락을 취해 보는 게 좋을 듯 하외다.”
독고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원하지 않는 대로 흘러가게 되었지만 이것밖에는 답이 없다.
화산파는 갈지혁을 칠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이미 갈지혁은 죽게 될 거라고 독고문은 확신했다.
모두가 진검백을 갈지혁을 감시하려고 두었다고만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진검백을 보낸 것은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어서다.
만약의 경우 갈지혁을 잡거나 죽여야 할 경우 그것이 가능한 무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갈지혁이 예상보다 훨씬 강한 자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지만 진검백이 질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모두가 낙화검이라고 부르며 그를 무시할 때 장문인만은 그의 진짜 모습을 알았다.
“그럼 반대하는 사람은 없는 걸로 보겠소. 구파일방 중 하나인 개방을 제외한 나머지 문파는 오늘부터 갈지혁을 비롯한 모든 독인들을 쫓을 게요. 그리고 그들을 죽일 것이오. 무당파에서 일어난 일인데 갈지혁을 공적으로 몬다는 것에 의구심을 갖는 분도 계시겠지만 어차피 치러야 할 순서에 불과하오. 그는 점창파의 두 장로를 밤에 암습으로 죽인 자니까. 그때부터 이미 그를 무림공적으로 하려고 준비 중이었소. 그러다가 더는 볼 수 없다는 판단에 지금 그리 결정을 내린 거요. 그러니 모두들 양해 바라오.”
추살령(追殺令)이다.
이제부터 갈지혁은 무림에서 발 편히 뻗고 잘 수 없게 될 게다.
“그럼 이 일을 점창파와 해남파에도 알리겠소. 그리고 소림에게도.”
이 자리에 없는 세 문파에게 소식을 알리겠다고 한다. 말리고 싶었지만 독고문은 이제 그럴 힘도 명분도 없다.
“……그리하시오.”
말을 내뱉은 독고문은 침묵했다.
무진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응시했다. 누군가가 본다면 회한에 젖은 한 문파 장문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창을 통해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슬쩍 가늘어졌다.
지금이 기회다.
소림의 방장이 없는 지금이 무당파가 구파일방 중 최고의 수위를 차지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과감한 결단력과 힘을 보여 줘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기회다.
갈지혁이 타고 있는 마차가 남쪽으로 향했다.
해남도는 남쪽 끝에 있는 섬이다.
중원에서 가장 멀다고 볼 수 있는 곳으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바람이 상쾌하고 날씨는 무더운 편이다. 그곳은 구파일방의 하나인 해남파가 있는 곳이면서 무인들의 손을 타지 않는 곳이 바로 해남도이기도 하다.
해남도는 외지인을 반기지 않는다.
해남파가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러한 지역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비록 갈지혁이 해남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며칠 이상은 더 걸릴 길이다.
마차에 몸을 실은 갈지혁은 누운 채로 운기요상을 하고 있었다.
흑풍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았다. 그게 겨우 삼 일 전이니 완벽하게 낫는 것은 당연히 무리다. 하지만 그날보다 갈지혁은 눈에 보이게 호전된 상태다.
처음엔 거동조차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움직이는 것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
단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움직임을 자제하는 것뿐이다.
흑풍 이후 다른 어떠한 손길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 바짝 긴장했지만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마차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동을 계속했다.
갈지혁은 가뜩이나 없는 말수가 눈에 띌 정도로 확연하게 줄어 버렸다.
마차 안에 있는 셋은 말이 없다.
진검백은 눈을 감은 채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고, 운하연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풍객은 갈지혁의 누울 자리를 위해 여전히 마부 옆에 자리했다.
지금 해남도로 향하는 갈지혁의 마음은 상당히 복잡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갈지혁을 쫓는 지금 그곳으로 향하는 것 또한 은근한 모험이다.
누운 채로 갈지혁은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살폈다.
창밖을 바라보는 운하연을 본 갈지혁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단화초는 줄 수가 없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섣불리 줄 수 없을뿐더러 그에게도 너무나 필요하다.
그건 사부인 일수만독 일악천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진검백이 잠을 자고 있지 않다는 걸 갈지혁은 잘 알고 있다.
말수가 꽤나 많은 자인데 지금은 무엇인가 상념에 빠진 듯하다.
해남도로 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제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다.
갈지혁이 누워 있던 상태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부스럭거리면서 그가 일어나자 눈을 감고 있던 진검백이 눈을 떴고, 창밖을 바라보던 운하연 또한 시선을 돌렸다.
“왜 그래? 괜히 무리하지 말고 누워서…….”
진검백이 묻자 갈지혁이 손을 저었다.
“할 말이 있다.”
“나한테?”
“모두에게.”
“별일이군. 네가 먼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니.”
자세를 바로하고 앉은 갈지혁이 천천히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진검백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만 헤어지자.”
“무슨 소리야, 갑자기?”
“이제부터는 나 혼자 간다.”
여태까지 갈지혁은 진검백이 옆에 있는 것에 뭐라고 한 적이 없다.
맨 처음 만나 지금까지 그는 감시자라는 명목으로 옆에 있는 진검백을 가만히 뒀다.
그랬기에 갈지혁과 진검백의 관계는 꽤나 애매했다.
감시자와 감시당하는 관계였지만 겉으로 보기에 둘은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료였다.
하지만…….
진검백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네 명령을 듣고 움직이는 게 아닌데?”
“장난은 집어치워.”
“장난?”
진검백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갈지혁은 흔들거리는 마차에 앉은 채로 진검백을 응시했다. 한 점 흔들림 없는 시선이 굳게 결심한 모양이다.
갈지혁과 진검백 사이에 묘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중재에 나선 것은 운하연이었다.
“그만 해요, 둘 다.”
진검백은 갈지혁을 노려보던 시선을 돌렸다. 운하연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 또한 이 둘의 사이를 알고 있다.
둘은 솔직히 말해 좋은 관계가 될 수 없다. 그런데 묘하게 이 둘은 잘 어울렸다.
마치 오랫동안 사귀어온 벗이라도 된 마냥 말이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 둘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나타난 모양이다.
“물어봐도 될까요? 저야 그렇다고 쳐도 진 소협까지 떼어 내려는 이유가…….”
“더 이상 날 따라오면 둘 다 죽어.”
“그게 무슨……?”
“얼마 전에 만났던 자, 기억하나? 흑풍, 그자 말이야.”
“물론이죠. 며칠 안 된 일을 벌써 잊겠어요?”
잊을 리가 있겠는가.
갈지혁을 이리 만들었고, 있어서는 안 될 자가 무림에 있었다. 무당파에서 잡아 둔 자가 이렇게 중원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이었다.
“그자가 왜 너희 둘을 노렸을까?”
“그거야 모르죠.”
“너희 둘이 나와 연관되었기 때문이야.”
“……?”
“이해가 안 갈지도 몰라. 하지만 확실하다. 죽기 싫으면 나한테서 떨어져.”
갈지혁의 말을 듣기만 하던 진검백이 발끈했다.
“겨우 그런 이유냐? 그런 이유라면 나도 못 물러난다. 어차피 죽을 거면 네놈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와 같이 있는 게 낫지 않느냐? 내가 있으면 오히려 죽지 않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갈지혁이 픽 하고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검백 또한 그런 갈지혁의 웃음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갈지혁이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난 안 죽는다.”
“또 헛소리할 생각이라면 집어치워. 너도 인간이다. 목이 떨어지면 죽어.”
“내 말은 그게 아니다. 그놈은 날 안 죽여.”
“그놈?”
“나를 노리는 바로 그놈. 정말로 독황독립문의 인물일지, 아니면 또 다른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확실해.”
갈지혁의 말을 들었지만 진검백은 쉽사리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분명 흑풍은 갈지혁은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 될 거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이쪽은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런 상대의 마음을 확실하게 파악한다는 것도 우습다.
지금은 그랬지만 마음을 바꿔 갈지혁을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그런 진검백의 마음을 알았는지 갈지혁이 말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니까.”
확신 어린 말투. 진검백 또한 아는 바다. 무엇인가 원하는 게 없다면 갈지혁을 놔둘 리 없다.
알지만 그게 뭐냐고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그렇지만 갈지혁이 먼저 대답해 주기 전까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겠다.
“대체 네게 그런 확신을 주는 건 뭐야? 그 물건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그자가 널 죽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거냐?”
“…….”
갈지혁이 침묵했다.
일순 망설였지만 이내 그는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이제는 알 때도 됐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단화초,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는 건 나뿐이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운하연이 눈을 부릅떴다.
여태까지 전혀 모른다는 식으로 시치미를 떼던 갈지혁이다.
물론 말만 그렇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이렇게 수긍하지 않았기에 깊게 파고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갈지혁이 단화초의 위치를 안다고 말했다.
운하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인가요?”
“그래.”
여태까지 모른다고 대답했던 갈지혁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운하연은 지금,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모른다고 했잖아요. 여태까지.”
“믿지 않은 건 마찬가지잖아?”
“왜 모른다고 한 거죠? 제가 그걸 어떻게 쓰려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면서!”
운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만 앞에 마주하고 있는 갈지혁은 여전히 태연해 보였다.
“단화초는 분명 약이 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왜 지금 독황독립문이나 알 수 없는 인물이 그 단화초를 노리는 걸까? 약으로 쓰려고? 그럴 리가 없잖아?”
“독초라는 말은 들었어요. 하지만 그 독의 해독약을 먼저 만들고, 또 지금 도는 역병을 제압하면…….”
“헛소리.”
갈지혁은 말을 끊었다.
운하연은 단화초를 단순한 독초로만 보고 있다. 그녀 또한 진정한 단화초의 위력을 잘 모르는 것이다.
“단화초는 지금 돈다는 역병을 우습게 만드는 독성을 지녔어. 단화초의 독이 완성된다면 천하가 사라져. 당문십독? 절대극독? 웃기지 마라 이거야. 단화초의 독은 하루 만에 사천에 있는 모든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위력을 지녔어.”
갈지혁이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 냈다.
평소 말수가 적은 그가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생전 처음인 듯하다.
반면 운하연은 침묵했다.
갈지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는 탓이다. 하지만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걱정을 하는 것보다 역병을 먼저 제압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그녀의 심정이다.
“하지만 지금 역병이 돌아도 중원은 쓰러져요. 그 단화초의 독이 퍼질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차라리 병을 먼저 막아 내는 게 방법 아닐까요?”
“예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뭐죠?”
“이 역병을 제압할 수 있는 약이 단화초라는 말…… 누구한테 들었나?”
“그야…… 저희 할아버지가…….”
“그럼 약선은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지?”
운하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운하연은 알지 못한다. 그저 그리 들었을 뿐이다.
그랬기에 약선이 사라진 지금 그토록 단화초를 쫓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찾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약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