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6화
해남도에서 알아주는 가문은 바로 뱃길을 이용한 장사로 돈을 번 백씨세가(白氏世家)다.
그들은 뛰어난 장사 수완과 타고난 뱃사람의 재능으로 해남도에서 가장 많은 자금을 지닌 곳이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달리던 마차가 멈추었다.
드디어 광동성(廣東省)의 끝자락에 다다른 것이다.
가장 먼저 마차에서 내린 것은 갈지혁이다.
그는 이제 거의 몸이 회복됐는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실상 갈지혁의 몸 상태는 완벽하지 못했다. 아직 보름가량을 더 요양해야 예전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 게다.
그나마 운하연이 옆에서 돌봐주었기에 이토록 빠르게 치유가 된 것이다.
흑풍과의 대결에서 갈지혁이 입은 내상은 컸다. 그게 단 며칠 사이에 완벽하게 쾌유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차에서 내린 갈지혁은 주변을 둘러봤다.
확 트인 바다가 일순 사방에서 달려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항구와 거대한 배의 모습도 보인다.
해남도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한다.
그것도 강이 아닌 바다를 건너는 긴 여정이니 거선이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깝다.
바람이 상쾌하다. 바다 냄새와 함께 시원함이 물씬 사방에서 풍겨져 나온다.
“바다네요.”
뒤따라 내린 운하연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녀 또한 이렇게 바다를 보는 것은 꽤나 오랜만이다.
여행을 많이 다닌 편이었는데 이렇게 바다를 보게 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갈지혁은 계속해서 바다를 바라봤다.
생전 처음이다, 바다를 보게 된 것은.
혼이 쏙하니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그 정도로 바다는 갈지혁을 매료시켰다.
그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항구를 따라 마치 유람이라도 온 서생처럼 바다를 바라보며 걸었다.
시끄러운 파도 소리가 익숙해질 무렵 갈지혁은 거대한 배 앞에서 멈추어 섰다.
배는 무엇인가를 싣고 왔는지 빠르게 물건들을 내리고 있었다. 물건을 나르는 짐꾼들 사이에서 목청을 높이는 중년의 사내 하나가 보였다.
바닷사람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외모를 지닌 자였다.
드러난 어깨와 팔뚝은 외공을 익힌 자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두꺼웠고, 수염은 텁수룩했다. 그는 연신 물건을 들어서 나르는 일꾼들에게 소리쳤다.
“그건 거기가 아니잖아!”
“아, 이씨! 자꾸 그런 식으로 할 거야?”
그는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가리키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갈지혁이 그에게 다가갔다. 일꾼들을 지휘하던 사내는 누군가가 다가오자 고개를 돌렸다.
“뭐야, 당신? 왜 함부로 배에 올라섰어?”
사내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함께 위협적인 어조가 섞여 있다. 갈지혁의 행색을 보던 사내가 급기야는 밀치면서 소리를 쳤다.
“당장 안 내려가! 바다에 거꾸로 꽂아 버리기 전에 당장 꺼지라고!”
“배를 타려고 하는데.”
“뭐야? 손님이야? 이봐, 손님이라고 해도 배에 함부로 타는 게 아니야! 이 배는 오늘 출항하지 않으니까 다른 배 알아봐!”
“내일 가려고 하오.”
“내일? 몇 명이나?”
그는 뒤에 있는 나머지 셋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갈지혁이 대답했다.
“한 명. 나만 가는 거요.”
“그래? 뭐, 돈만 있다면 해남도까지 가는 길에 함께해도 상관은 없지. 그럼 내일 해가 뜨고 반 시진 안에 이곳으로 와. 늦으면 버리고 간다.”
갈지혁은 품속에서 돈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돈의 액수가 생각보다 많았던 탓인지 그는 더 이상 갈지혁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배를 한 번 스윽 살펴본 후 갈지혁이 배 아래로 내려왔다.
일전에 배를 타고 가다가 장강수로채와 만났던 일이 기억났다. 그것도 얼마 되지 않은 듯하지만 벌써 꽤 된 일이다.
갈지혁이 뒤에서 기다리던 셋에게 말했다.
“식사나 하러 가지.”
“칫.”
진검백이 혀를 차면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갈지혁이 한 명만 간다고 한 말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오히려 귀를 바짝 세웠기에 너무나 생생하게 잘 들렸다. 갈지혁은 혼자 가려는 마음을 굳힌 것이다.
항구 마을은 시끌벅적했다.
사람들도 많았고, 대부분이 뱃사람이거나 장사를 하는 자들로 보였다.
객잔을 잡고 안으로 들어선 일행은 몇 가지 음식을 시켰다. 막 떠나가려는 꼬마 점소이를 갈지혁이 갑자기 불렀다.
“꼬마야, 죽엽청 두 병.”
“아, 알겠습니다.”
아이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갈지혁이 무서웠는지 허겁지겁 사라졌다.
객잔 안은 시끌벅적했지만 정작 갈지혁 일행은 조용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은 탓이다.
풍객은 답답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요즘 이렇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또한 해남도로 가는 배편을 단 한 명분만 끊은 것을 들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의 운하연이었다면 오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집요하게 들러붙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운하연은 그렇다고 쳐도 진검백이라는 사내도 버리고 가는 분위기가 아닌가.
‘쩝, 대체 무슨 일이야?’
풍객은 먼저 날아온 죽엽청을 자신의 잔에 채우고는 마셨다.
그가 술병을 내려놓자 갈지혁이 병을 들어 올렸다.
“받아.”
“됐다.”
“받으래도.”
“…….”
진검백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쪼르르륵.
병에서 하얀 술이 떨어져 내렸다. 천천히, 그러면서도 끊이지 않으면서 말이다.
진검백에게 술을 따라준 갈지혁이 운하연을 보면서 술병을 들어 올렸다.
마시겠냐는 듯한 행동이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운하연도 잔을 내밀었다.
운하연의 잔에도 술을 채운 후에 갈지혁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에도 술을 따랐다.
풍객은 먼저 마신 자신의 행동이 무안했는지 급히 잔에 다시금 술을 채웠다.
갈지혁이 고개를 돌리면서 한 사람씩 바라봤다.
“그동안…… 고마웠다.”
쉽지 않게 내뱉은 말일 게다.
갈지혁은 고맙다는 말을 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쉽지 않게 말을 꺼내고 있는 것이다.
그걸 진검백이 모를 리 없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젠장.”
잔을 꽉 잡은 채로 진검백은 숨을 몰아쉬었다.
“운하연 당신에겐 미안해. 하지만 내 입장을 이해해 줬으면 하는군. 후에 다시 보게 될 때는 난 독왕, 당신은 다음 대 약선으로 보자고. 당신이라면 단화초가 없어도 분명 그 역병의 해독약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할 말은 끝났다.
갈지혁은 이내 풍객을 바라봤다. 그는 움찔하고는 갈지혁을 마주 봤다.
풍객 또한 지금 갈지혁이 이렇게 하는 의미를 알아차렸다. 지금 갈지혁은 다른 이들과 헤어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섭섭한 마음이 생겼다.
갈지혁이 풍객을 바라보며 말했다.
“풍객, 용기는 좋지만 몸 좀 사리라고.”
“흠흠.”
부끄러웠는지 풍객은 헛기침을 했다. 갈지혁이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마지막 밤이야. 좋게 보냈으면 하는군.”
“……멍청한 놈.”
말을 받으면서 진검백도 잔을 내밀었다.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지금만큼은, 지금만큼은 웃으련다.
운하연과 풍객도 잔을 내밀었다.
술자리는 길었다.
분위기는 어느새 평소처럼 좋아졌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진검백과 풍객이 했고, 갈지혁과 운하연은 대부분 들어주는 입장이다.
운하연은 만면에 미소를 가득 담은 채로 이야기를 들었다. 반면 갈지혁은 무표정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이처럼 간간이 대꾸라도 해 주는 갈지혁의 모습은 분명 보기 쉬운 게 아니다.
마음속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마음을 숨긴 채로 술자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마음먹고 내공으로 술기운을 날리려고만 한다면 취할 일도 없겠지만 넷 모두 그러지 않았다. 술기운에 적당히 달아오른 채로 그들은 각기 자신의 방으로 흩어졌다.
덜컥.
방문을 걸어 잠그자마자 갈지혁은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창밖을 바라봤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바다 냄새가 물씬 밀려왔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갈지혁은 온 신경을 주변으로 분산시켰다.
감시자의 눈길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자신을 쫓고 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정말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더 함께하다가는 모두가 죽는다.
그걸 갈지혁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갈지혁을 죽이지 않은 것은 전부 단화초 때문이다. 그 말은 곧 단화초의 위치만 알게 되면 갈지혁을 죽일 거라는 소리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화초를 찾으러 해남도로 가고 있다.
어찌 보면 그건 죽으러 간다는 소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갈지혁이 이렇게 서두르는 것은 얼마 전 있었던 일 때문이기도 했다.
흑풍은 강했다. 문제는 단화초를 노리는 자에게 흑풍 정도 되는 자가 한 명 뿐일 거라는 보장이 없어서이다. 그 정도의 고수가 둘만 갈지혁을 노린다면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또 하나, 갈지혁이 바로 단화초로 향하게 한 이유가 있다.
자신이 단화초의 위치를 안다는 걸 알고 있는 자다. 그 말은, 즉 갈지혁이 아닌 또 한 사람, 바로 일악천을 안다는 소리다.
갈지혁은 도망이라도 칠 수 있다. 하지만 일악천은 사독문 안에 있다.
그는 도망을 칠 곳도 없다.
계속해서 시간만 끈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일악천에게 찾아갈지도 모른다.
무림에 나온 것은 갈지혁이다.
그런 자신 때문에 스승인 일악천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걸 결코 원하지 않는다.
‘모든 건 내 손으로.’
상대의 힘은 어마어마할 게다.
그걸 알기에 갈지혁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가려했던 마지막 길을 걸으려고 하는 거다.
독왕.
독왕이 되어야 한다.
대신 갈지혁은 목숨을 걸었다.
단화초의 위치를 알아내는 순간 그 정체불명의 인물은 모든 힘을 쏟을 것이다.
싸워야 한다.
이길 거라는 확신은 없다.
흑풍 같은 자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자라면 더 더욱 강한 괴물들을 수하로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진검백을 보냈다.
그와 운하연이 있으면 분명 힘이 된다. 하지만 더 이상 함께했다가는 많은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창밖을 바라보던 갈지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시원하다. 가슴 밑바닥에부터 깔려 있던 모든 우중충한 기분을 털어 냈다.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다.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걷지만 두렵지도 않다.
이제는 정말로 혼자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러한 것을 바라서도 안 된다.
혼자라는 생각과 함께 낮은 조소를 흘리던 갈지혁은 소매 속에서 갑자기 고개를 내민 사황을 바라봤다.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갈지혁이 약지로 사황을 턱을 간질였다.
귀찮은 듯이 몸을 비틀어댔지만 사황은 갈지혁의 팔에 묶인 채로 떠나지 않았다.
해가 떠올랐다.
죽은 듯이 침상에 누워 있던 갈지혁이 거짓말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손과 얼굴을 씻고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흑의는 찢어진 곳 하나 없고 흙으로 얼룩진 곳 하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사고가 난 후에는 단 한 번도 입지 않은 흑의다. 그는 발목에 묶여 있는 끈을 강하게 맸다.
그는 접어 두었던 깃발을 펼쳤다.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글자가 살아서 꿈틀댄다.
하지만 걸어온 길을 반영이라도 하는 것처럼 처음에 비하면 많이 색이 바랬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소리다.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에 깃발을 멘 채로 방을 나섰다.
터벅터벅.
계단을 밟으면서 갈지혁은 식당 쪽으로 내려왔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객잔 안에는 손님들이 많았다. 아침이라고 해도 이곳은 항구 쪽이다.
서둘러 출항을 준비하는 배부터 먼 곳까지 가야 하는 장사꾼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