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7화
이미 아래에는 다른 모두가 앉은 채로 갈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해가 뜨기가 무섭게 움직이는 갈지혁이기에 저절로 그것에 맞춰진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 갈지혁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타났다.
“야, 왜 이렇게…….”
평소보다 늦게 나타난 갈지혁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진검백은 말을 멈췄다. 얼굴은 여전히 가리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변했다.
단정해졌다.
그래, 바로 그거다.
펼치고 내려온 깃발을 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무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갈지혁을 모르는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강수로채와의 싸움.
단신으로 펼친 비무행.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그다. 그렇지만 그 후에 갈지혁은 무림 역사상 처음으로 단신으로 구파일방의 하나를 무너뜨렸다.
현 무림의 최고 고수로 갈지혁을 꼽는 자까지 나타났을 정도라고 하니 말해서 무엇하랴.
그런 그가 객잔에 나타난 것이다.
갈지혁은 계단을 밟고 내려와 일행이 있는 탁자 옆에 섰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혹여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눈을 빛내는 자도 있었다.
진검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뭐 하는 거야?”
“나가지.”
말을 마친 갈지혁이 앞장서서 객잔을 나섰다.
객잔을 나서자 마찬가지 반응이 밖에서도 일어났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면서 갈지혁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의 발은 어제 갔던 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갈지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를 쫓는 진검백, 운하연, 풍객 또한 매한가지였다. 넷 모두 아무런 말도 없이 한곳을 향해 걸었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진검백은 어떻게 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했다.
따라가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하지만 이제 마음을 정했다.
갈지혁을 놓아주련다.
이유는 자신이 곁에 있으면 갈지혁과 화산파 모두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화산에서 내려진 명 때문이다. 지금 진검백은 갈지혁을 죽여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됐다.
옆에 있다면…… 결국 행해야 한다.
그랬기에 차라리 떨어져 주는 거다.
이제부터 진검백은 갈지혁의 일에 끼어들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둘이 싸우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웅성거리던 사람들 중 일부는 이 일행을 쫓아오기까지 했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분위기 탓이다.
뱃전에 이르자 앞만 보고 가던 갈지혁이 멈추어 섰다.
이미 배에는 많은 사람들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어제 봤던 그 사내가 웅성거리며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급히 밖으로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야?”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 시선을 돌리던 그의 눈에 갈지혁의 등에 달린 커다란 깃발이 들어왔다.
“독왕…… 대로행?”
어디선가 들어 봤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고개가 갸우뚱하는 순간 사내는 번개처럼 무엇인가를 생각해 냈다.
“독왕 갈지혁!”
자신도 모르게 버럭 지른 고함 소리에 배에 오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몇 백에 달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단 한 명에게로 향했다.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렸지만 주변은 오히려 너무나 고요하다.
그저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갈지혁은 말없이 진검백을 바라봤다.
진검백 또한 입술을 꽉 깨문 채로 갈지혁을 응시했다. 서로를 바라보던 중 진검백이 입을 열었다.
“……조심해라.”
“걱정하지 마. 내가 누군지 잊은 거냐? 난 갈지혁이다.”
“안다, 이 자식아. 네가 누군지는 세상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함께한 지 일 년이 넘어 이 년이 가까워질 정도다.
어쩌다 보니 함께하게 된 연이 이렇게 길게까지 이어질 줄은 둘 모두 몰랐다.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진검백은 자신이 갈지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버렸다.
그리고 그건 갈지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갈지혁이 운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포기했나?”
“아뇨. 전 포기를 몰라서요. 어서 중원으로 돌아와요. 그때 다시 만나죠. 이야기는 그때 다시 해요.”
“끈질기군.”
말은 그리했지만 갈지혁은 가볍게 생각했다.
갈지혁이 갑작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깃발을 내밀었다. 앞에 서 있던 진검백은 갈지혁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갈지혁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받아.”
“이 깃발을?”
“그래.”
엉겁결에 받아 들기는 했지만 진검백은 갈지혁이 자신에게 왜 이 깃발을 전해 주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것은 갈지혁이 무림에 나서면서 함께했던, 어찌 보면 그의 의지라고 봐도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진검백에게 넘겼다.
“이제 필요 없다. 해남도를 다녀온 그날부터 난 무림에서 인정하는 독왕이 될 테니까. 굳이 무거운 것 들고 다닐 필요는 없지. 그래서 네게 맡긴다.”
더 이상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해남도에서 걸어서 나오는 그날 갈지혁은 독왕이 될 것이다. 살아서 걸어 나온다면 말이다.
물론 무림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갈지혁에게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진정한 독왕이 무엇인지 아직 갈지혁도 모른다. 하지만…….
갈지혁이 몸을 돌렸다.
더는 할 이야기도 없다.
운이 나쁘다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약한 이야기를 하고 헤어지는 것도 우습다.
뒤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하려는 것이다. 그런 지금 나약한 모습은 사양이다.
걸어가는 갈지혁의 귀로 진검백의 전음이 흘러들었다.
[무림에서 널 공적으로 몰았다.]
갈지혁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듣지 못해서가 아니다. 애초부터 공적이 되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독이라는 건 어차피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리 될 줄 알았다.
그랬기에 독왕이 되려는 것이다.
독왕이 된다면…… 건드리지 못한다. 천하를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자를 공적으로 몰아서 무엇 하겠는가.
독왕이라는 건 그런 거다. 천하를 상대로 싸워도 이길 수 있는 독의 절대지존(絶對至尊).
갈지혁은 독왕이 되기 위해 해남도로 간다.
진검백이 소리쳤다.
“반드시 독왕이 되어야 한다!”
갈지혁이 걸음을 멈추더니 뒤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카락으로 가리고는 있지만 진검백은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갈지혁이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깃발이나 잘 가지고 있어라. 그게 바로 전설이 될 테니까.”
갈지혁의 그 한마디에 진검백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저놈이라면…… 저 멍청한 놈이라면 정말로 될지도 모른다.
말을 마친 갈지혁은 몸을 돌려 배 위로 올랐다.
갈지혁이 배 안으로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선은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갈지혁이 사라지자 몰렸던 인원이 썰물이 빠지듯 사라졌다.
사람들이 점점 사방으로 흩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진검백은 멍하니 선 채로 바다를 바라봤다.
이제는 배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어졌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다를 향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죠?”
옆에서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진검백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무엇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둔 게 없다.
갈지혁과 함께 다니면 심심할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고, 또 할 일도 있었다. 그런데 갈지혁과 떨어지게 되니 할 일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흐음, 이젠 정말 할 일 없는 건달이 되어 버렸군요.”
말을 하면서 진검백은 깃발을 곱게 접어 등에 멨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진검백은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그는 낙화검이다. 화산파에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조용히 지내기만 하면 그만이다.
조만간 장문인이 찾겠지만 갈지혁이 도망쳤다고 말하고 말 생각이다.
“으라차차!”
그는 기지개를 켰다.
손을 하늘까지 쭉 뻗었던 진검백은 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평소의 그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속까지 그럴 리는 없지만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진검백이 웃으면서 물었다.
“운 소저는 어디로 가실 겁니까?”
“남쪽으로 왔으니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야겠죠.”
“저도 북쪽으로 올라갈 생각이니 아직 저희는 헤어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어차피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시간도 없다. 운하연과 진검백은 바로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진검백이 앞장섰고, 그 뒤를 운하연과 풍백이 뒤따랐다.
그의 뒤를 쫓던 운하연의 눈이 자꾸 등에 걸려 있는 깃발로 향했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었지만 점점 그녀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옷, 그리고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을 남에게 주기까지 한 갈지혁.
마치…… 죽으러 간 것 같다.
‘아냐. 설마 그토록 독왕이 되겠다던 사람이 죽으러 간 건 아닐 거야. 하지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여자의 직감이란 무서운 거다.
* * *
“엄마, 심심해!”
“쉿!”
아이 하나가 배를 탄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심심하다고 징징거렸다. 그렇지만 정작 그런 아이의 어머니는 급히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소 이상한 반응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 갈지혁이 있었다.
선실 내부에 있는 커다란 방에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묘하게 선실이 조용하다. 아직 채 출항을 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시끄럽기도 하련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 하나 뻥끗하지 않고 잠을 자거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이다.
배에 탈 때 그같이 주목을 받았으니 그건 당연한 거다.
사람들은 독을 무서워한다.
독을 쓴다고 하면 괜히 생명을 함부로 여길 듯하고, 광포할 것만 같다.
갈지혁 또한 그런 주변의 시선을 모를 리 없다.
그렇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지금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건 알지만 익숙한 일이다.
배가 연신 파도에 부딪치는지 흔들린다.
처음엔 재미있어하던 아이들도 이제는 그것이 지루해졌는지 선실 내에서 칭얼거리기 일쑤다.
속이 타는 것은 아이의 부모들이다.
갈지혁은 그런 생각이 전혀 없지만 그걸 모르는 그들로서는 혹여 자식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모습이다.
선실 구석에 앉은 채로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지혁의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움찔했다.
그렇지만 그런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그는 선실 밖으로 걸어나가 갑판 쪽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바닷바람이 그대로 안면으로 몰아쳤다.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아침에 출발했는데 이제는 해가 끝에 달려서 모습을 감추려고 하고 있다.
배가 심하게 흔들거렸다.
‘강과는 많이 다르군.’
진검백과 함께했던 여정이 문득 생각났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장강수로채의 채주인 구백룡을 만났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갈지혁의 이름이 무림에 크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은 듯하지만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갈지혁의 시선이 전방을 응시했다.
이 바다 끝에 해남도가 있다.
해남파의 무공은 상당히 독특하다고 알고 있다. 갈지혁 또한 비무행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해남파의 무인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만큼 해남파의 무림 활동이 뜸하다는 소리다.
그들은 무림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해남파의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은 엄청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리고 해남도로 가는 이상 그 무공과는 반드시 부딪치게 될 게다.
아직 감시자는 따라붙은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이 배 안에 있는 자 중에서 반드시 적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그때 배의 위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보시오! 곧 비가 올 겁니다! 선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갈지혁이 시선을 들어 말을 한 자를 확인했다.
이 배를 처음 탈 때 갈지혁을 윽박지르던 사내다.
그의 말투가 공손해져서인지 갈지혁은 한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