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8화
당연하다.
그자는 자신이 함부로 대했던 상대가 무림에서 손꼽는 고수인 갈지혁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걸 이제는 알았다.
어찌 그때처럼 함부로 굴 수 있단 말인가.
고개를 끄덕거린 그가 선실 안으로 다시 들어섰다.
다소 이야기가 오가던 선실이 또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배에는 약 칠십여 명에 달하는 사람이 있다.
한 사십 명 정도는 장사꾼이고, 나머지는 유람을 가는 서생이거나, 그도 아니면 가족끼리 해남도로 가는 이사 행렬이었다.
배를 타고 가던 와중 며칠 전부터 갈지혁의 눈에 두 개의 패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젊은 여인을 위시한 패거리와 젊은 사내가 중심인 패거리였다. 둘은 서로를 알고 있는 듯했지만 말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 패거리의 사이는 상당히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선실의 양 끝에 있는 그들은 시간만 나면 서로를 노려보면서 상대가 무슨 행동을 하지나 않나 견제하는 듯했다.
유일하게 이 선실에서 갈지혁의 눈치를 크게 보지 않는 자들이 바로 이 두 패거리였다.
물론 이들도 처음에는 그를 주시했지만 이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느꼈는지 서로를 견제하기에 바빴다.
갈지혁 또한 그들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 일 정도가 지나자 이들은 급기야 서로에게 살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좋지 않던 선실의 분위기가 더욱 내려앉은 것도 사실이다.
그 두 개의 패거리가 대놓고 서로에게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하니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위축되는 게 당연했다.
갈지혁은 눈을 감은 채로 몸의 상태를 확인했다.
완벽한 몸 상태는 아니지만 이 정도라면 무슨 일이 생겨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배를 탄 지 무려 팔 일 만의 일이다.
갈지혁이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소매 속에서 꿈틀대는 사황을 느꼈다.
인면지주는 조용히 있는 반면 사황은 기회만 나면 고개를 들이밀려고 든다.
인면지주가 행동을 자제하는 것은 물론 사황 때문일 게다.
사황이 꿈틀대는 듯싶더니 이내 가슴 쪽 앞섶을 통해 얼굴을 슬쩍 꺼냈다.
어떻게 보면 괴이하다고 할 수도 있는 장면이었지만 갈지혁은 손을 내밀었다. 사황이 손을 통해 다시금 소매 속으로 몸을 감췄다.
그때였다.
쾅!
사황과 장난을 치던 갈지혁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마 전부터 계속 터질 듯하더니 결국 두 패거리가 이빨을 드러낸 모양이다.
열 명에 달하는 인원이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서로를 응시했다. 그들은 언제라도 싸울 수 있게 병기를 뽑아 들었다.
인원은 여인 쪽이 넷, 사내 쪽이 여섯이었다.
“당장 사과하지 못할까!”
여인 쪽 인원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사내 쪽 인원 중 하나가 픽 하고 웃었다. 상당히 젊어 보이는 사내의 웃음에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노인을 우습다는 듯이 바라보며 그가 대꾸했다.
“못하겠다면?”
“이, 이, 고얀!”
사람들이 바짝 굳은 얼굴로 그 두 패거리를 바라봤다.
육지라면 모를까 해상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도망칠 곳이 없다. 더군다나 이 같은 무림 고수들의 싸움이라면 배가 부서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노인이 검을 뽑아 든 채로 여섯 명을 겨누었다.
실제로 여인의 패거리 넷 중에서 제대로 검을 쓸 수 있는 건 노인 하나뿐이다.
나머지 셋은 그다지 나이도 많지 않았고, 실제로 무공 실력도 그리 빼어나지 않았다.
반면, 사내 쪽은 조금 달랐다.
노인만한 고수는 없었지만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을 지닌 자들이다.
싸운다면 여인 쪽이 불리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검을 내릴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이 여섯 놈을 육시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듯한 모습이다.
그러자 그 반대편에 있는 여섯 명의 사내들 또한 자신들의 병기를 꺼내 들었다.
이제 싸움은 멈출 수 없을 듯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무서워, 엄마.”
“괜찮아. 괜찮으니까…….”
덜덜 떨면서 흐느끼는 아이를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꼭 껴안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갈지혁이 입을 열었다.
“당장 칼들 내려라.”
작은 목소리였지만 침묵 속에 잠긴 선실에서 그 목소리는 매우 크게 들려왔다.
더군다나 내공이 실린 웅장한 목소리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구석에 가만히 처박혀 있던 갈지혁에게로 향했다.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사내의 무리 중에 수장으로 보이는 젊은 자가 말했다.
갈지혁은 허공을 응시하며 대꾸했다.
“길게 말하지 않는다. 내려.”
“건방진 놈! 난 네놈에 대한 이야기 따위, 믿지 않는다!”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여섯 명의 사내 중 하나가 앉아 있는 갈지혁에게 몸을 날렸다.
비록 갈지혁에 대한 소문으로 무림이 시끄럽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보니 그다지 강해 보이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상대는 앉아 있다. 먼저 선공을 펼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내가 달려들었지만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가 손가락 하나를 폈다.
순간,
갈지혁에게 검을 든 채로 달려들던 사내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잡았다.
“커, 컥! 커헉!”
그의 다리가 그대로 풀리면서 선실 바닥에 꼬꾸라졌다. 갈지혁이 손가락의 방향을 바꿔 사내의 무리를 가리켰다.
“이번엔 누가 당할 텐가?”
“…….”
젊은 사내가 침묵했다.
얼굴이 꽤나 준수한 편인데 표정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그가 손으로 뒤에 있는 자들에게 검을 내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들었던 병기를 집어넣자 이번에 갈지혁은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장도 검을 거두시는 게 좋을 듯싶소만.”
“……그러지.”
노인은 그대로 검을 자신의 허리에 걸었다.
그 또한 이런 배에서 싸워 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병기를 거두자 그제야 갈지혁이 손가락을 내렸다.
그토록 살기등등한 상황이었는데 그가 나서기가 무섭게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노인은 놀라운 눈으로 갈지혁을 바라봤다. 배에 타고 나서야 이곳에 갈지혁이라는 자가 탔다는 걸 들었다.
노인은 해남도의 인물이지만 갈지혁의 이야기는 무림에서 많이 들었다.
그랬기에 유의 깊게 봤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소 젊은 모습과 겉모습만을 보고 얕잡아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다.
단 한 명을 제압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노인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울고 있는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당연히 그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움찔하면서 갈지혁을 바라봤다.
아이의 울음이 신경에 거슬렸다고 판단했는지 둘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의 아버지가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조용하게 할 테니까…….”
“꼬맹아.”
눈물을 담은 채로 아이가 시선을 돌려 갈지혁을 올려다봤다.
갈지혁이 입을 열었다.
“남자는 울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못 지킨다.”
무엇인가 해코지를 할 거라는 생각에 바짝 긴장해 있던 아이의 부모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저 거칠 거라고만 생각했다.
독을 쓴다고 하니 추악하고 야비한 자로만 그려졌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이를 내려다보던 갈지혁은 이내 선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선실 밖으로 나온 그의 눈에는 넓게 펼쳐진 바다만이 보였다. 어둠 속에 감싸인 바다는 미칠 듯이 울렁댔다.
그때 갈지혁의 뒤를 따라나온 누군가가 말했다.
“비가 올 게야.”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 여인의 무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던 노인이다. 그가 진지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봤다. 이내 그의 뒤로 나머지 세 명의 인물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그 네 명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바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사람과 바다가 다른 건 바로 그거야.”
“노인장, 저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하시더군. 우리 아가씨께서.”
갈지혁은 고개를 반쯤 돌려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가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고맙다는 표시에 갈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당신들을 도우려고 한 행동이 아니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소.”
“그렇든 아니든 우리에게는 도움이 되었으니 고맙다고 하는 것이네.”
어차피 상관없다는 생각에 갈지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해남도로 가기 위해 주변의 모든 인연을 정리한 그다. 그런 지금 또 다른 누군가와 연을 맺고 싶지는 않다.
바닷소리가 시끄럽다.
“당신이 갈지혁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초에 그런 소란을 피우면서 배에 탔는데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갈지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전 곽소정(藿小程)이라고 해요.”
“난 현문(顯紋)이라고 하네.”
노인도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갈지혁은 딱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미 이들 모두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굳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현문이라고 자신을 밝힌 노인이 이어 말했다.
“우리는 해남파의 사람들이네.”
그제야 갈지혁은 조금 관심이 간다는 듯이 눈앞에 있는 넷을 살펴봤다.
해남파라면 지금 가는 해남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곳이다. 더불어 구파일방의 하나로 중원과는 많이 다른 무공을 펼치는 곳이기도 하다.
예전 같았다면 이들의 무공을 보고 싶어 했을 게다.
그렇지만 지금은 무공을 겨루기 위해 해남도로 가는 게 아니다. 지금 그는 단화초를 구하러 가는 것이다.
노인이 물었다.
“미안하네만 자네가 해남도로 가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왜 나에게 그런 걸 묻소?”
“그거야…….”
“솔직하게 말할게요. 당신은 위험인물이거든요.”
“위험인물?”
곽소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갈지혁을 만나기 전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독을 쓰고, 사람의 생명을 우습게 알고, 싸움을 즐긴다는 소문을 말이다.
그녀 또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막상 만나 본 갈지혁은 그리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당신은 무림에서 이름난 문파들을 쓰러뜨리고 다녔잖아요. 그리고 지금 해남도로 간다는 건 아무래도 해남파를 노린다는 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신경 쓸 것 없소. 해남파에는 볼일 없으니까.”
해남파의 입장에서는 신경 쓸 만도 하다.
다른 곳은 몰라도 가장 최근 갈지혁에게 무너진 점창파는 지금 우스운 꼴이 되어 버렸다.
상대가 독을 썼든 뭐든 간에 그들은 단신으로 들어선 갈지혁을 막아 내지 못했다.
그것만으로 이미 점창파는 고개를 들고 있는다는 게 우스워져 버렸다.
독에 대해 무지한 것은 점창파나 해남파나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도 아닌 독이라면 아무리 해남파라고 해도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만 갈지혁의 말을 듣고 추측컨대 그는 해남파와 다툴 생각이 없는 듯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을 했던 곽소정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해남파에 나쁜 뜻만 품고 있지 않다면 갈지혁은 그녀에게 단지 은인이 되기 때문이다.
곽소정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저 제 은인이 되는 거군요.”
“…….”
갈지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곽소정이 궁금증을 풀어 주려는 듯이 말했다.
“복잡하지 않게 돼서 다행이라는 소리죠. 당신은 저의 은인이지만 해남파에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럼 단순히 은인이라고 볼 수도 없잖아요? 하지만 그게 아니니…… 단순히 은인이라고만 생각하면 될 것 같아서요.”
단순 명쾌하다.
그녀는 그런 여인이다.
고맙기는 했지만 섣불리 마음을 드러내기에는 갈지혁이라는 인물은 너무나 위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