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9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무슨 일로 해남도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은 아니죠?”
갈지혁은 곽소정을 바라봤다.
당돌하게 생긴 여인이다.
외모는 아름다운 편이지만 그것보다 더욱 눈이 가는 것은 진취적인 행동이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방금 전에 건드린 자들이 누군지 알아요?”
“알고 싶은 마음도 없소.”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건드린 게 아니다. 그리고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마음을 먹었다면 참지 않았을 게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갈지혁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백씨세가의 인물들이에요.”
“백씨세가?”
“당연히 섬 밖에서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희 해남도에는 두 개의 세력이 있어요. 해남파와 백씨세가죠.”
출렁.
배가 거센 파도에 부딪쳤는지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다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해남도의 이야기에 관심없다. 그에게는 지금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금 건드린 그 사내가 백씨세가의 가주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한다는 막내 자식이죠. 분명 해남도에 도착한 이후에 당신의 행동에 모두 간섭할 걸요.”
“그쪽에서 먼저 덤벼든다면 나 또한 피할 생각은 없소. 그리고 그건 백씨세가든 해남파든 마찬가지요. 덤빈다면 물러설 생각은 없다는 건.”
독왕이 되기 위해서 온 곳이다.
갈지혁은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는지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금 선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곽소정은 갈지혁이 사라진 문을 바라봤다.
그녀가 픽 하고 웃는다.
“아가씨.”
“아, 하시려는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저자는 위험합니다.”
“뭐가요?”
“보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전 갈지혁의 손 움직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운이 좋아 피해 냈다고 해도…… 그 다음엔 막아 내지 못했을 겁니다.”
현문은 곽소정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무림에서 알아주는 웬만한 자들이라고 해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던 그다.
그렇지만 갈지혁과 싸우게 된다면 결코 자신이 이길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다.
방금 가벼운 일전만으로도 그 정도는 판단할 수 있다.
독을 하독하는 걸 보지 못했다.
어떤 방식으로 하독했고, 또 중독시켰는지 모르겠다.
현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독에 중독당한다면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싸우기 까다로운 상대다.
“저놈이라면…… 제가 아가씨를 반드시 지켜 줄 수 있다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정도인가요?”
곽소정은 의외라는 듯이 현문을 바라봤다.
그녀는 무공에 문외한은 아니다. 그렇지만 무(武)보다는 문(文)에 관심이 많은 탓에 높은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이토록 자유롭게 밖으로 다닐 수 있는 것은 바로 옆에 있는 현문 때문이다.
그는 해남파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는 고수다.
그런 현문이 이토록 자신없어하는 모습은 곽소정으로서는 처음 보는 일이다.
그녀가 웃었다.
“아저씨가 이토록 굳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긴 대단한 사람인가 봐요.”
“위험한 자입니다.”
“그렇지만 은인이죠.”
“……아가씨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어머? 그걸 이제 알았나요?”
대꾸하며 곽소정은 상쾌하다는 듯이 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파도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아마 곧 폭풍이 올 모양이다.
덜컹덜컹!
배가 크게 흔들린다. 미칠 듯이 파도가 배의 옆면을 때린다. 사람들은 배 구석에 웅크린 채로 어서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가기를 빌고 있다.
선실 밖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연신 들린다.
뱃사람들의 고함 소리, 파도가 연신 배의 몸통을 때리는 소리가 천둥마냥 크게 들려온다.
배를 처음 타본 사람에게 지금 이 순간은 엄청난 공포였다.
바다는 아름답다.
파랗고, 그 끝이 보이지 않도록 길게 드리워진 바다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반면, 바다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삼킬 수 있는 힘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공포다.
바다에서는 도망칠 곳이 없다. 그렇기에 더욱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은 곧 대책이 없다는 소리니까.
이처럼 배가 흔들리는데도 불구하고 두 패거리의 인물들은 태연했다.
그들은 바다에 익숙하다.
바다를 알고, 그것을 이용할 줄도 안다.
지금 바다가 노여움을 품고 미칠 듯이 그 화를 쏟아 내고 있지만 이내 원래의 온화함을 찾을 거라는 걸 알기에 이토록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날 이후 두 패거리는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사실 백씨세가의 인물들은 어떻게든 해남파에 시비를 걸고 싶은 눈치였다.
그렇지만 갈지혁에게 당했던 사내가 아직도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누워 있는 걸 보면서 그러지도 못한다.
섣불리 움직이면 갈지혁이 가만있지 않을 게다.
애초에 목적이 있어 이 배에 탄 백씨세가다.
그런데 그러했던 애초의 목적이 갈지혁에 의해서 완전히 뭉그러져 버렸다.
화가 날 만도 하다.
그렇지만 상대가 만만치가 않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사단을 내도 냈을 게다.
잘 때를 노려서 어떻게 해 보려고도 했지만 그것도 될 일이 아니었다.
갈지혁은 자지 않았다.
아니, 거의 자지 않는다고 말해야 옳을 게다.
잔다고 해도 거의 선잠을 자면서 언제나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암습을 가한다면…… 실패는 불 보듯 뻔하다.
이 무리의 우두머리이자 백씨세가 가주의 막내아들인 백무각(白懋覺)은 멍청한 자가 아니다.
안하무인격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세상 무서울 것 하나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그이지만 나설 때와 나서선 안 될 때를 모르지는 않는다.
갈지혁과 이곳에서 괜히 싸울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인원으로는 갈지혁과 싸워 봤자 손해를 보게 된다.
이 배는 곧 해남도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곳부터는 백무각이 쓸 수 있는 힘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다.
굳이 이곳에서 피를 볼 필요는 없다. 지금의 분함은 해남도에 도착해서 갚아도 그만이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이자 백씨세가의 가주인 백무령(白懋怜)의 명을 이행하지 못한 것이 백무각은 못내 신경이 쓰였다.
지금 해남도는 큰 일전을 앞에 두고 있다.
바로 해남파와 백씨세가의 싸움이다.
최근 들어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세력이 급기야는 크게 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해남파와 백씨세가가 사이가 좋지 않아진 것은 고작 이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
전부 백씨세가의 가주가 백무령으로 바뀌면서부터 시작된 일이다.
두 세력은 해남도의 양대 세력으로 오랜 시간 평화를 지속했다. 그건 두 무리가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이다.
해남파에는 힘이 있었다.
백씨세가에는 재력이 있었다.
서로 걷고 있는 길이 달랐기에 두 개의 세력은 크게 다툴 이유가 없었다.
백무령은 야망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해남도의 지존을 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더불어 그 지존이 자신이기를 원했다.
그는 외부에서 무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백씨세가는 힘이 필요한 경우에는 해남파에 이야기하여 적당한 선에서 거래를 했다. 물론 그 대가로 백씨세가는 해남파에 적당한 돈을 지불했다.
그렇게 상부상조(相扶相助)하던 관계가 깨졌다.
백씨세가는 섬 밖에서 데리고 온 자들을 쓰기 시작했고, 해남파의 눈에 그것이 곱게 보일 턱이 없었다.
사소하게 다투기 시작한 것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해남에 사는 사람이라면 두 개의 세력이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처음엔 그래도 눈치를 보던 백씨세가였지만 이제는 많은 무인을 고용하면서 점점 해남파의 위치를 넘보기 시작했다.
백씨세가는 점점 해남파를 도발했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백무령은 막내아들인 백무각에게 명을 내린 것이다.
해남파 장문인의 딸인 곽소정을 노렸던 게다.
아무리 해남파의 장문인이 참고 있다고 해도 그의 딸 사랑은 이미 해남도에 널리 알려진 일이다.
곽소정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그는 백무령과 일전을 벌이려고 들게다.
그걸 노렸다.
그런데…….
‘시답잖은 새끼 하나 때문에 계획이 실패하다니.’
백무각이 갈지혁을 노려봤다.
나이는 그와 비슷한 연배다. 그렇지만 갈지혁과 백무각이 서 있는 위치는 너무나 다르다.
무림은 백무각이라는 자를 모른다.
해남도 백씨세가의 막내아들이라고 한다면 그제야 아 하면서 고개나 끄덕일 정도일 게다.
그에 반해 갈지혁은 다르다.
뒷배경으로 알려진 백무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자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다.
무엇을 가지고 시작한 자가 아니다.
맨몸으로 시작해 이제는 무림의 모든 주목을 받게 된 절대고수 중 하나다.
심지어 홀로 점창을 무너뜨린 일은 지금 무림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당연하다.
다른 중소 문파도 아니고 구파일방의 하나인 점창파를 무너뜨린 것이니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 리가 없다.
맘에 들지 않는다.
모든 걸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백무각으로서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걸 가진 갈지혁에게 시기심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치켜든 채로 갈지혁을 바라봤다.
이 미칠 듯이 흔들리는 배 안에서는 아무리 강인한 심장을 지닌 자라도 공포감을 가지게 된다.
바다를 접해 보지 않은 사람일수록 그러한 것은 더하다. 은연중에 굳어 있는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갈지혁을 계속해서 바라보았지만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덮고 있어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배가 심하게 덜컹거릴 때도 미동조차 않는다. 조금이라도 겁을 먹었다면 움찔거리는 것이 정상일 터인데 말이다.
그렇지만 백무각은 생각을 달리했다.
바다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는 공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갈지혁이 겁을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배가 심하게 기우뚱하는 듯싶더니 선실 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꺄악!”
여인의 비명 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더불어 선실 안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물이 연신 쏟아져 들어온다. 배는 점점 심하게 덜컹거린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백무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다에서 오래 살아온 그는 직감적으로 지금의 상황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아무리 성난 바다라도 이내 잠잠해짐을 잘 아는 그다. 그랬기에 여유를 가졌다.
뱃길을 나서면서 이 같은 풍랑(風浪)을 만나 본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모두 별일 없이 헤쳐 나갔기에 그는 잠시 바다는 언제나 같지 않다는 걸 잊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이라면 그다지 파도도 높지 않은 때라고 너무 방심만 했던 모양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백무각뿐만이 아니다. 그의 무리는 물론이거니와 해남파의 인물들도 모두 일어선 상태였다.
그들 또한 직감적으로 현재 상황이 좋지 않음을 느낀 모양이다.
해남파의 무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은 비록 무인이지만 또한 배에 대한 지식을 지녔다.
해남파의 무인들이 사라진 후 열린 선실 문으로 거세게 물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어어!”
백씨세가의 인물 중 하나가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그 물줄기는 그들을 덮쳤다.
콰당!
물줄기가 쏟아지는 부분에 있던 자들이 모두 휩쓸렸다. 간신히 버티고 선 백무각이 부들부들 떨었다.
갈지혁이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얼굴이 확하니 달아올랐다.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물에 휩쓸려 선실 안을 우습게 뒹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