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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135화 (135/200)

# 135

10화

열린 문을 통해 계속해서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사람들의 혼란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백무각은 홀딱 젖은 채로 한 사내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는 여전히 앉아 있는 갈지혁을 노려봤다.

대체 무엇이 저리도 태평하단 말인가.

백무각의 몸에서 하얀 연기가 일기 시작했다. 분노가 치밀면서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몸에 묻은 물이 일순 공기 중으로 증발해 버렸다.

그때 다시금 물이 문을 통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번에 물줄기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을 덮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빠르게 무엇인가를 잡았지만 나이가 어린 사내아이 하나는 미처 그러지 못한 모양이다.

“악!”

아이 어머니의 비명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가만히 앉아 있던 갈지혁의 눈에 그대로 물에 휩쓸려 바깥으로 쓸려 나가는 아이가 보였다.

일전에 해남파와 백씨세가가 싸움을 벌일 때 울던 그 사내아이다.

갈지혁의 몸이 움직였다. 앉아 있었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그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그의 발이 선실 벽을 찼다.

물위를 날듯이 스쳐 지나가던 갈지혁의 몸이 빙그르르 돌았다.

그의 손끝에 아이의 옷이 잡혔다.

퍼엉!

물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 광경에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야 말았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는 것은 그만큼 갈지혁의 움직임이 대단했다는 소리다.

화려한 움직임을 선보인 갈지혁이 아이를 내려놨다.

아이는 자신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갈지혁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울지 않는구나.”

갈지혁이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물에 갑작스럽게 휩쓸린 탓에 겁에 질린 듯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이의 부모가 급히 달려왔다.

“괜찮니? 괜찮아?”

어머니가 급히 아이를 안으면서 눈물을 쏟아 냈다. 방금 전 그 상황에 물줄기에 휩쓸려 밖으로 나갔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뻔하다.

아이의 아버지가 갈지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과는 다른 의미다.

그때는 그저 무서웠기에 숙였던 고개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아이나 꽉 잡고 있으시오. 더 흔들릴 거요.”

말을 마친 그는 계속해서 감사의 뜻을 전하려는 사내를 뒤로한 채로 선실 문가로 다가섰다.

밖에서는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더불어 파도는 배 위에서도 보일 정도로 높게 치솟았다.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도 보인다. 그들은 흠뻑 젖었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였다.

갈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선실 안은 공포로 가득 찬 상태다.

갈지혁이 손가락을 들어 백무각을 가리켰다.

“너.”

“건방지게 지금 누구에게…….”

“네놈은 배에 대해 모르나?”

“모를 리가 있나.”

“그런데 지금 왜 여기서 놀고 앉아 있는 거냐?”

갈지혁의 말에 백무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상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키는 갈지혁의 모습에 그는 화를 참지 못했다.

누구에게 간섭 한번 받지 않은 백무각이다. 그런 그에게 가뜩이나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갈지혁이 명령을 내려대니 울컥하는 건 당연했다.

백무각이 이빨을 갈면서 말했다.

“네놈이 나에게 명령을 시킬 존재인가?”

“너뿐만이 아니다. 네 뒤에 있는 나머지 놈들 모두 움직여.”

강압적인 말투.

아무리 지금 싸워서 이길 수 없음을 안다고 해도 이러한 말에 따를 백무각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상황이 좋지 않음도 알고 있지만 이미 그에게 그러한 것은 관심 밖의 일인 듯했다.

단지 그는 지금 화가 나는 걸 풀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네놈의 명을 따를 이유는 없다.”

“이들을 다 죽일 생각이냐?”

“닥쳐! 다른 놈들이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가 선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쓱 하고 훑어봤다. 백무각의 시선에는 노골적인 멸시의 빛이 가득했다.

그가 킥킥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이런 놈들은 알아서 하라고 해. 어차피 이런 놈들 몇 백 명이 죽는다고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아. 우리는 이 배가 물에 빠진다고 해도 방법이 있으니까 이놈들을 위해 너나 죽도록 달려 봐.”

“원하는 대로.”

갈지혁은 몸을 돌려 선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백무각은 씩씩거리면서 사라지는 갈지혁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보던 백무각은 이내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의 시선에 곱지 않은 빛이 역력하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자 자신들도 모르게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모양이다.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원래의 안하무인격인 성격대로 백무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봐! 죽고 싶지 않으면 눈들 깔아!”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배가 점점 심하게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백무각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바다도 모르는 놈이 무엇을 하겠다고 선실 밖으로 나간단 말인가. 짐이 되면 짐이 됐지 결코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바다라는 건 평생을 옆에서 살아온 자신조차 전부 이해하기 어려운 마물(魔物)이니까.

선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갈지혁은 쏟아지는 비와 배 위로 흘러 들어오는 파도에 온몸이 흠뻑 젖어 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옷 조금 젖는다고 해서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사황은 눈치껏 갈지혁의 어깨에 매달린 채로 떨어지지 않게 몸을 고정시킨 상태다. 인면지주 또한 사황의 옆에 죽은 듯이 몸을 움츠리고 있다.

갈지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조심해라.”

그는 선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미 근방에는 해남파의 인물 넷이 나뉘어져 움직이고 있었다.

“돛을 내려요!”

곽소정이 목소리를 높여 선장에게 소리쳤다.

강인해 보이는 사내는 곽소정의 외침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수하들에게 명을 내리기에 바빴다.

곽소정의 옆에는 노인이 있었다.

그녀는 선장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다가가 어깨를 잡아챘다.

갑자기 정체도 알 수 없는 여인이 이런 긴박한 상황에 방해를 하자 그는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야!”

“돛을 내려요!”

“지금은 돛을 내리는 것보다 침수되는 곳을 막는 게 더 급선무야!”

“이대로 가면 배는 완전히 잠겨요. 아직 구멍이 난 곳은 크게 없으니 돛을 먼저 내리고 막는 게 나아요.”

“이건 내 배야! 그리고 이 해로를 다닌 지 이십 년이 넘었어! 누군지는 몰라도 당신보다는 내가 더 많이 알아! 그러니 제발 닥치고 선실 안에 처박혀 있으라고!”

거친 말을 내뱉었지만 곽소정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 이르게 되면 사람의 말이 거칠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더군다나 바다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더 더욱 그렇다.

그걸 알기에 곽소정은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곽소정이라고 합니다.”

“곽소정? 어…… 어어?”

선장은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곽소정을 바라봤다.

곽소정이라는 이름은 해남도로 뱃길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해남도에서 가장 신비한 여인.

더군다나 그녀는 배를 운행하는 데 최고의 재주를 지녔다고 한다.

곽소정이 다시금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돛을 내려요.”

“…….”

그는 하늘을 한 번 보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사내의 눈에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하들의 모습이 보인다. 서둘러 결정을 내려야 한다.

지금 이대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순간의 기회를 놓친다면 배는 무너진다.

그가 눈을 질끈 감더니 외쳤다.

“돛을…… 돛을 내린다! 서둘러라! 가장 먼저 돛을 내려라!”

선장의 목소리가 배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미칠 듯한 폭우와 파도 소리를 단숨에 억누르는 듯한 사자후에 버금가는 외침이었다.

과연 뱃사람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방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선원들이 돛으로 모두 모이기 시작했다.

용케도 선장의 외침을 들은 모양이다. 모두가 돛으로 모이자 그가 소리쳤다.

“돛을 내린다! 이쪽에 있는 놈들은 저쪽으로 가고 나머지는……!”

막 고함을 지르던 선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지금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위를 바라보자 선원들도 모두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표정도 단번에 변했다.

돛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거센 물줄기를 버텨 내지 못했는지 중간 부분이 점점 꺾이는 듯싶더니 돛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려는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아직은 버티고 있지만 이토록 흔들리는 배에서 저 돛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게다.

이대로 돛이 떨어진다면 배의 일부분이 부서지게 된다.

가뜩이나 침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배다.

저만한 돛이 떨어지면서 배가 받을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돛이 떨어지는 그 순간 이 배는 험난한 파도 속에 잠겨들 게 분명하다.

“아아!”

한 사내의 입에서 경악스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거대한 파도가 배의 옆면을 세차게 한 번 두드리는 순간 돛이 마침내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선장의 얼굴이 단번에 어둡게 변했다.

조금 더 일찍 돛을 내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게다. 그렇지만 후회는 너무 늦었다.

이제는 어떻게든 살기 위한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 배는, 평생을 그와 함께한 이 배는 더 이상 바다와 싸울 수 없다.

그때 누군가의 몸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거슬러 공중으로 솟구쳤다.

돛을 올려다보고 있던 탓에 사람들은 그 정체불명의 존재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갈지혁이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듯싶더니 이내 돛 끝에 달린 줄을 잡아챘다.

갈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굵은 줄이 갈지혁의 어깨까지 빙빙 감겼다. 그는 그대로 온몸의 힘을 쏟아 냈다.

갈지혁은 그대로 돛의 줄을 잡은 채로 공중에서 화려 하게 몸을 비틀었다.

밧줄이 중앙에 있는 거대한 기둥에 묶였다.

휘리릭!

줄이 그대로 갈지혁의 몸을 찢을 듯이 조여 왔다.

파앙!

줄이 갑작스럽게 옆으로 터져 나갔다.

갈지혁의 몸이 갑판으로 떨어져 내렸다. 공중에서 빙글 돈 그가 가볍게 배에 착지했다.

“돛이…… 돛이 일어섰다!”

누군가가 감탄 어린 탄성을 토해 냈다.

그제야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을 알아차렸다.

미칠 듯이 쏟아지는 비는 여전했다. 파도는 아직도 화를 풀지 않고 미칠 듯이 배를 흔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생겼다.

선원들 모두의 시선이 갑판에 선 채로 가볍게 옷을 터는 갈지혁에게로 쏟아졌다.

갈지혁에 대한 무성한 이야기들이 단지 소문만이 아니라고 그들은 확신했다.

모두의 시선이 감탄으로 물들 때 유독 분노에 찬 눈으로 갈지혁을 노려보는 자가 있었다.

바로 백씨세가의 백무각이었다.

선실 안에서는 이 배가 물에 잠긴다고 해도 방법이 있다고 큰소리친 그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독기 어린 외침이었을 뿐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가라앉는다면 무공을 익혔든 그렇지 않았든 마찬가지로 한 인간일 뿐이다.

더군다나 이처럼 격한 파도 속이라면 살아남지 못한다.

알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그를 움직이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옆에 있는 수하들이 은근히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깨끗이 무시했다.

지금 나간다면 갈지혁에게 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또한 이곳에서 죽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러던 와중에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와 아이, 노인을 제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뱃사람들을 돕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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