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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136화 (136/200)

# 136

11화

그들이 움직이자 백무각은 못 이기는 척 수하들을 이끌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뱃전에 나서자마자 그가 본 것은 쓰러지려는 돛이었다. 그의 안색이 급격하게 변했다.

바다를 아는 그로서는 지금 상황에서 돛이 떨어져 내린다면 어찌 될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모두가 죽는다.

다른 자들이 죽는 건 신경 쓸 일이 아니지만 자신 또한 살기 힘들다.

사람들 모두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무리 바다를 모른다고 해도 이러한 상황에서 돛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를 리 없다.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하늘에 기도나 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작스럽게 공중으로 날아오른 갈지혁이 재빠르게 쓰러지는 돛의 줄을 잡아챈 것이다.

정확한 판단이었고, 그 이후에도 빼어난 대처로 쓰러지려는 돛을 일으켜 세웠다.

사람들이 감탄 어린 시선으로 갈지혁을 바라봤다.

비에 젖은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모습은 사내들의 혼을 쏙 빼놓기 충분했다.

물에 젖어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에게서는 절대적인 힘을 지닌 강자의 느낌이 풍긴다.

무공을 익혔든 익히지 않았든 사내라면 강함을 꿈꾼다.

그런 그들에게 갈지혁의 모습은 당연히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그러한 모습은 백무각을 화나게 했다. 언제나 주인공은 자신이어야 했다.

이토록 관심의 중심에 갈지혁이 있는 게 너무나 싫었다.

그때 멍하니 갈지혁을 바라만 보는 사람들을 향해 곽소정이 소리쳤다.

“돛을 펼쳐요!”

내리려고 했던 돛이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이제는 돛을 내리는 게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 상태로 바람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원들이 모두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험난한 파도를 타고 앞으로 전진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도 도웁시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사내들이 모두 선원들과 함께 힘을 쓰기 시작했다.

갈지혁은 비를 맞으면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던 그와 백무각의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바라보는 백무각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백무각은 갈지혁의 상대가 아니다.

저 정도의 인물이라면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갈지혁이 몸을 돌려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갈지혁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곽소정은 내심 감탄한 눈으로 갈지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정말로 대단한 자다. 그 돛이 그대로 떨어졌다면 배는 분명히 가라앉았을 게다.

배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자다. 그런 자가 돛을 단숨에 잡아채면서 배의 중심을 일으켜 세웠다. 아마도 주변의 상황을 보고 대충 판단하고 움직인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그같이 행동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것이다.

웬만한 뚝심과 행동력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곽소정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파도는 곧 잠잠해질 거예요! 돛을 조금 더 올려요!”

배가 거센 파도와 마주하면서 바다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미칠 듯이 몰아치던 파도는 곽소정의 말대로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하지만 이미 그때 선원들을 비롯한 모든 사내들은 녹초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거의 기절하다시피 갑판에 누운 채로 잠에 빠졌다.

잠잠하게 변한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를 해남도로 인도했다.

* * *

거대한 선박 하나가 해남도로 들어섰다.

날씨가 꽤나 후텁지근하다. 이맘때의 해남도의 날씨는 선선하면서도 은근히 푸근하다. 해남도는 사람 살기 좋은 땅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와 풍부한 자원은 해남도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 줬다.

푸른 바다, 흰색의 모래.

바다를 여행해 봤다고 하는 자들도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이다. 해남도의 바다는 중원의 것과는 다르다.

길게 드리워진 야자수(椰子樹)도 그렇다. 이러한 절경은 중원에서 보기 힘든 것이다.

배가 멈추어 서고 나서 사람들이 하나씩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은 활기로 가득 차 있다.

얼마 전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들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안전하게 땅에 발을 내딛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배가 들어서는 곳에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그것도 양쪽으로 갈라진 채로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이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 두 패거리 모두 이 배에서 내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먼저 얼굴을 드러낸 것은 표정이 좋지 않은 백무각이었다. 그가 자신의 수하 다섯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내자 서 있던 자들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어디 편찮은 곳이라도…….”

“어서 가자.”

백무각은 말을 잘랐다.

갈지혁의 독에 당했던 자는 이제 거동은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회복됐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갈지혁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는 것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라도 알 것이다.

그때 바로 뒤이어 해남파의 곽소정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가씨!”

누군가가 반갑다는 어조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허허! 이거야 원! 완전 여인이 다 되셨습니다! 껄껄.”

크게 웃으며 그가 뱃전으로 다가왔다.

곽소정은 나머지 세 명과 함께 지금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는 해남파의 인원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웃는 얼굴에 백무각을 마중 나왔던 백씨세가의 인물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괜히 일 년 만에 해남파로 돌아오는 곽소정과 백무각을 같은 배에 타게 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곽소정이 지어 보이는 미소는 결코 거짓으로 지어 보이는 그러한 게 아니다.

묻고 싶었지만 백무각의 표정을 보니 그럴 맘도 일지 않는다.

그의 기분이 상당히 불쾌해 보이는 것이 분명 무슨 일인가 있었던 모양이다.

백씨세가의 머리라고 불리는 화문성(華文星)은 의아했다.

‘현문 하나라면 어렵지 않았을 터인데…….’

곽소정의 뒤를 따라 나타난 해남파의 인물들이 너무나 멀쩡하다. 반면 해남파와 싸움을 일으키기 위해 배에 탔던 백씨세가의 인물들은 모두 표정이 좋지 않다.

계획대로라면 결코 틀어질 일이 없다.

‘현문이 그리도 고수란 말인가?’

현문이 해남파 내에서 강한 편에 속하기는 하지만 백씨세가에서 보낸 여섯 명 또한 녹록치 않은 자들이다. 나이는 조금 젊은 편이지만 모두가 일류의 경지에 들어섰다.

이 정도라면 현문이 아무리 예상보다 강했다고 해도 이겼어야 옳다.

그렇지만 분위기로 추측컨대 백무각은 해남파의 인물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아니, 되려 당한 분위기다.

화문성의 귀에 막 이 배에서 내린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지혁이라고, 자네도 알지 않는가?”

“갈지혁? 그 독을 쓴다는 자 말인가?”

“그래! 내가 그자하고 같이 배를 탔는데 말일세, 단지 독에 능통한 게 아니라 무공도 엄청나더군! 정말로 사람이 나는 건 처음 봤다니까!”

억양이 격앙된 것이 상당히 흥분한 모양이다.

화문성은 시선을 돌려 그 이야기를 해대는 자를 바라봤다. 마중 나온 자신의 지기에게 신이 난 듯이 그는 갈지혁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화문성의 귀에 그를 제하고도 갈지혁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배에서 내린 자들은 마중 나온 사람들을 만나자마자 갈지혁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갈지혁, 갈지혁……

사방에서 그의 이름이 들려온다.

백무각의 얼굴에 한눈에 봐도 알 정도로 불쾌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제야 화문성은 대충 상황을 알아차렸다.

백무각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는 해남파에 시비를 걸었지만 어쩌다 보니 갈지혁과 얽히게 된 모양이다.

갈지혁이라면 이 여섯으로 상대가 될 턱이 없다.

중원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해남도까지 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갈지혁에 대한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이곳 해남도까지 알려졌다.

물론 소문이다.

그렇지만 그 소문 중 반 정도가 진실이라고 해도 이 여섯으로는 무리다.

‘젠장! 갈지혁이 왜 이곳에…….’

만약 그가 이곳 해남도에 온 것이 해남파와 얽힌 것이라면 백씨세가로서는 귀찮은 일이다.

점창파처럼 해남파를 꺾으러 온 것이면 좋으련만 불확실한 것에 기대하는 것도 우습다.

갈지혁이 해남파를 꺾어 준다면 그것만큼 백씨세가에 좋은 일은 없다. 그렇지만…….

도움은 안 되도 좋으니 방해나 안 했으면 하는 것이 화문성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갈지혁이 개입한다면 여태까지 짜두었던 모든 계획들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게다.

현재 무림에서 가장 상대하기 귀찮은 자를 꼽으라면 화문성은 무림맹의 맹주도 구파일방의 그 누구도 아닌 갈지혁을 꼽을 게다.

그는 단순히 무인이 아니다.

무인이면서 또한 독인이다.

독을 쓴다는 것이 일정 수준 이하의 무인에게는 얼마나 치명적인지도 잘 안다.

갈지혁이 하독하면 반 수 이상의 무인이 전투 불가능한 상태가 될 게다.

더군다나 배에서 내린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무공도 대단하다고 하니 암습 같은 걸로 죽이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다.

‘귀찮아졌어.’

화문성이 멈추어 있자 백무각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는 거요, 화문성?”

마중 나온 무리에서 백무각이 유일하게 존중해 주는 자가 바로 화문성이다.

그는 백씨세가의 머리다.

백무각의 아버지이자 현재 세가의 가주인 백무령도 화문성에게만은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려놓은 상태다.

화문성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실패하신 모양입니다.”

“다 성공했는데 괜한 놈이 방해를 해서…….”

“갈지혁입니까?”

“어떻게……?”

백무각이 놀란 눈으로 화문성을 바라봤다.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화문성이 갈지혁의 이름을 지목하자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모두가 그의 이야기만 하는군요.”

으쓱하면서 화문성이 대답했다.

백무각은 그제야 그가 어떻게 갈지혁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알았다.

화문성이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의 대부분이 점점 이곳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자가 없다.

그가 물었다.

“갈지혁이라는 자, 내렸습니까?”

“아직 안 내렸을 거요. 아, 지금 저기 내려오는 놈이 바로 갈지혁이오.”

화문성이 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간단한 짐을 든 채로 아래로 뛰어내리는 한 사내가 보였다. 앞머리로 얼굴을 가렸고, 옷은 흑색의 무복이다.

가벼운 차림이지만 옷이 정교해 보이는 것이 많은 독을 숨기는 데 용이해 보인다.

사내는 발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망설이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앞을 갑작스럽게 한 여인이 막아섰다.

해남파 장문인의 딸인 곽소정이다.

“어디 머무실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없다면 저희가 모시고 싶은데요.”

“아가씨 아는 분입니까?”

얼굴에 수염이 조금 많지만 호탕해 보이는 사내가 곽소정의 옆에 섰다.

그녀가 사내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많지 않았기에 은근히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갈지혁이 딱딱한 어투로 대꾸했다.

“해남파에는 신세 질 일 없소.”

“허, 허허.”

사내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갈지혁의 위아래를 훑었다. 무엇인가 곽소정과 인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조심스레 대하려고 했지만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좋은 사이 같지는 않다.

그가 갈지혁에게 물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존성대명이 뭔지 물어도 되겠는가?”

“갈지혁이라고 하죠.”

대답한 것은 갈지혁이 아닌 곽소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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