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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137화 (137/200)

# 137

12화

그녀의 대답에 사내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갈지혁이라면 해남파에서도 위험인물로 손꼽는 자가 아니던가.

그런 자가 갑작스럽게 이곳 해남도에 나타났다.

“갈지혁이라면 그 독을 쓴다는……?”

“맞아요.”

곽소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그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갈지혁이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갈지혁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웃고 있다는 게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얼마 전 점창파를 무너뜨렸다던데…….

“그럼 난 이만 가보겠소.”

갈지혁은 곽소정을 지나치면서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도와줄게요. 당신이 무슨 일로 이곳에 온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주겠어요.”

“당신이 날 도울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소만?”

“이곳은 해남도예요. 당신은 해남도를 모르죠. 당신이 무엇을 찾든 누구를 만나려고 하든 해남도를 모른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걸요? 무슨 부탁을 하려고 모시려는 게 아니에요.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은혜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갈지혁이 몸을 돌려 곽소정을 바라봤다.

지금 그는 단화초를 찾아야 한다. 해남도의 지리를 잘 아는 자가 있으면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더군다나 갈지혁은 단화초를 찾기 전에 몇 가지 준비할 게 있다.

해남파의 도움이 있다면 시간은 더욱 단축될 게다.

누군가와 연을 맺는다는 게 그랬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한 때다. 이런 기회를 버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갈지혁이 대답했다.

“그럼 잠깐만 신세를 지도록 하겠소.”

“떠나고 싶을 땐 언제라도 떠나도 좋아요.”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곽소정에게 말했다.

“마차가 대기 중입니다, 아가씨.”

“그래요? 그쪽으로 가죠.”

그때 막 마차로 향하는 해남파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급히 검을 뽑아 들었지만 막상 길을 막아선 사람들은 기겁하면서 얼굴이 굳어졌다.

한 쌍의 부부와 아이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이라는 걸 알아차린 해남파의 인물들이 급히 검을 거뒀다.

수염이 가득한 사내가 대표로 나서서 물었다.

“무슨 일인가?”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고마움?”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자가 급히 사내를 지나쳐서 갈지혁에게 다가왔다.

그가 갈지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경향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그렇게 그냥 어정쩡하게 넘어가고 싶지 않아 기다렸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자식놈을 구해 주신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못난 놈이 뭘 도울 수 있겠는가마는…… 갚을 수 있다면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아니오. 도울 수 있는 힘이 있어서 도운 것뿐이니 고마워할 것 없소.

“아닙니다. 제발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라도 해 주십시오.”

사내의 눈은 애절했다.

물론 이렇게 헤어진 후에 다시 만날 수 있을 리 없다. 갈지혁과 이들은 사는 세계가 다르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 언제나 죽음을 등지고 사는 갈지혁이 어찌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내는 대답이 듣고 싶은 듯했다.

갈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내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참 맘에 안 드는 놈이다.

외모만 해도 그렇다.

왜 떳떳하지 못하게 얼굴을 숨기고 다닌단 말인가. 또 딱딱한 행동도 맘에 안 든다.

평소 호탕하고 바닷사람답다는 말을 자주 듣는 막문환(幕雯換)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막문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갈지혁을 살폈다.

해남파에서 곽소정을 위해 보냈던 마차들이 돌아가고 있다.

지금 곽소정이 탄 마차에는 현문과 막문환, 그리고 갈지혁이 자리했다.

어째서 곽소정이 이러한 자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다만 방금 전 대화로 그녀가 갈지혁이라는 자에게 무엇인가 은혜를 입은 듯하다.

그 사실 하나 때문에 막문환은 무엇인가 불만이 있어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곽소정을 친딸처럼 아꼈다. 그런 그녀의 은인이라는데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비록 맘에는 안 들지만 막문환은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솔직한 자다. 덕분에 마차 안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곽소정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었다.

“그동안 해남파에는 별일 없었나요?”

“뭐, 별일은 없습니다. 백씨세가와의 사이가 더 벌어진 것만 빼면 말이죠.”

“아, 저도 배에서 백무각을 만났는데 그자가 대놓고 시비를 걸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해남파에 도전하지는 않았었는데 말이죠. 백씨세가가 이렇게 나오게 된 이유라도 있나요?”

“그게…….”

막문환은 갈지혁을 살폈다. 말은 하지 않지만 그를 은근히 경계하는 듯하다.

곽소정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말했다.

“비밀스러운 일인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에이, 백씨세가에서 힘을 모으고 있던 것은 아가씨도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그건 이미 이십 년 전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던가.

점점 모이기 시작한 무인의 숫자가 이제는 해남파에 견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재력에 무력까지 지녔으니 백씨세가가 해남파를 넘볼 만도 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정작 정면으로 싸우려 들지 않았던 것은 바로 절대고수의 열세였다.

비록 무인의 숫자는 얼추 맞췄다고 하지만 절대고수는 해남파가 더 위다.

더군다나 이 상태로 두 개의 힘이 격돌한다면 양패구상(兩敗俱傷)이다.

둘 중 하나는 살아야 하거늘 모두가 죽어 버린다.

그 같은 일을 벌일 정도로 백무령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들이 절대고수를 몇 명 데리고 왔습니다.”

“절대고수요? 왜 그런 자들이 백씨세가에…….”

“잘 모르겠습니다. 백씨세가에서 그들을 고용하면서 줄 건 돈밖에 없긴 한데 또 그리 생각하기도 뭐합니다.”

그 정도의 고수들이라면 굳이 해남파와 대적하면서 돈을 벌려고 들지 않을 게다.

아마 돈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지불하기로 한 게 분명하다.

곽소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백무각이 어찌하여 그토록 시비를 걸어왔던 것인지 알 법도 하다.

믿는 게 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안하무인의 성격을 지닌 자라고 해도 해남파에 도전을 했을 리가 없다.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인 모양인가요?”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면 분명히.”

“해남도가 시끄럽겠네요.”

해남파와 백씨세가는 해남도에서 가장 커다란 두 개의 세력이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이라고 해도 두 개의 세력 중 한곳과 연결이 된다.

곽소정의 말대로 지금의 해남도는 꽤나 시끄러운 편이다.

두 개의 세력이 붙는다면 분명 하나는 지금보다 많은 입지를 상대에게 빼앗기게 될 게다.

중원은 해남파의 이런 사정을 모른다. 그들은 해남도에 많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밖으로 잘 나오지 않고 중원의 일 외에는 간섭도 잘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중원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건 해남도 또한 같으니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게다.

곽소정이 창밖을 바라봤다.

해남도가 시끄럽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그녀가 돌아왔다.

해남파는 해남도의 중앙에 있는 여모봉(轝母峰)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은 꽤나 먼 거리다.

마차를 타고 쉬지 않고 이동해도 오 일가량은 걸릴 정도의 거리인 것이다.

“배에서 백무각이 시비를 걸었다라…….”

막문환이 중얼거렸다.

백무각이 배에서 시비를 걸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해남파로 돌아가는 이 길 또한 안전하지는 않을 게다. 더군다나 방금 전 백씨세가의 머리라고 불리는 화문성을 봤다.

그가 무리에 섞여 있다면 무슨 방책을 낼 게다.

지금 백씨세가는 어떻게든 해남파에게 싸울 거리를 만들어 내려는 중이다.

분명 화문성이라면…….

그는 더러운 술수도 망설이지 않고 펴대는 자니까 말이다.

해남파까지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밤이 깊어지자 마차가 멈췄다.

마차는 다섯 대.

한 마차 당 네 명씩 타고 있음을 감안하면 스무 명이라는 소리다. 더군다나 마부와 마부석에 탄 이들도 있으니 그 숫자까지 얼추 계산하면 서른 명에 가까운 엄청난 숫자다.

그들 중 일부는 능숙하게 자리를 만들었고, 나머지는 음식을 장만하러 사방으로 퍼졌다.

사라졌던 자들은 곧 동물을 잡아서 나타났다.

갈지혁은 목이 베인 동물을 바라보다가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절단면이 검에 베인 것치고는 뭔가 달랐던 것이다.

뭔가 비스듬하게 잘린 것이 중원의 검과는 다르다.

“검 날을 기울여서 벴군.”

갈지혁이 막 손질을 하려는 토끼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 말에 갈지혁을 주시하던 막문환은 놀란 감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그렇다.

해남파의 검과 중원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검을 비스듬히 세운다는 거다.

비록 정도(正道)에서 어긋났다고 말하는 자도 있지만 그 덕분에 해남파는 보다 빠른 쾌검을 구사하는 게 가능하다.

단숨에 해남파의 검의 요지를 짚어 낸 갈지혁은 분명 대단한 눈을 지녔다 해야 옳을 게다.

‘단순한 독인이 아니란 말이로군.’

무공도 나름대로 익히지 않았다면 결코 알아내지 못했을 게다.

갈지혁 하면 독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 탓에 무공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았지만 절정에 다다른 고수라는 걸 막문환은 확신했다.

그때 갈지혁의 근처에 있던 현문이 갈지혁에게 다가가며 대꾸했다.

“맞네. 우리 해남파의 검은 비스듬히 세우지. 그래서 비무를 하는 와중에 다치거나 죽는 자들도 많이 나오는 편이지.”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선 현문이 물었다.

“검을 익혔는가?”

“아주 조금. 검은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고 해서 익혀두면 도움은 되니까.”

“허리에 차고 있는 건 청강검 같아 보이는데…….”

볼품없어 보이는 청강검이 갈지혁의 허리에 달려 있다.

그것도 시중에서 은자 몇 개 쥐어 주면 구할 수 있을 정도의 싸구려다.

“맞소. 얼마 전에 갔던 마을에서 산 거요.”

“그런 걸로 어디 싸움이나 하겠는가? 그냥 부딪치는 순간 부서질 것 같은데.”

“난 검으로 싸움을 하지 않소.”

“자네가 독인이라는 건 아네. 하지만 독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나면 어찌할 생각인가. 아마 곤란해질걸. 독도 좋지만 검에 매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걸세.”

갈지혁이 고개를 돌려 현문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그가 시선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갈지혁이 입을 열었다.

“무슨 독을 보고 어떠한 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아는 건 독이 아니오.”

“독이 아니라니?”

현문은 갈지혁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독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농사를 짓는 농부도 놀리는 거냐고 화를 낼 게다.

독이라는 건 다루기가 어려울 뿐이지 아무리 배움이 없는 사람이라도 아는 것이다.

비록 현문이 해남파의 무인이라고 하지만 독에 대해 모를 리가 없다. 그렇지만 현문은 지금 갈지혁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대답을 요구하는 표정을 짓고 있자 갈지혁이 대답했다.

“마비독, 사독, 고독…… 춘약도 독이오.”

“춘약 같은 저급한 것 정도야…….”

“내가 지금 그 춘약으로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일 수 있다면? 그래도 춘약이 저급하다고 생각하시오?”

현문은 말문이 턱하니 막혔다.

춘약은 미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욕을 생기게 하는 저급한 약으로 이것에 중독당하면 사내든 여인이든 음란한 마음을 품게 된다.

무림에서도 이 같은 춘약을 써서 여인들의 인생을 망치는 패륜아들이 있다.

그렇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무인이라면 춘약의 힘 정도는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공을 익힌 자들의 머릿속에 박힌 관념이었다.

그런데 그런 춘약 하나로 이곳에 있는 일류 이상의 해남파의 고수들을 전부 죽이면 어쩌겠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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