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화
다른 자가 말했다면 단지 미친놈으로 치부했을 게다.
그렇지만…… 갈지혁이다.
독에 한해서는 당대 최고라고 불리는 그의 말이니 우습게 볼 수가 없다.
“진담인가, 아니면…….”
“진담이오.”
확신 어린 말투로 갈지혁이 대답했다.
이야기를 멀리서 듣고만 있던 막문환이 울컥했다.
다른 것도 아닌 춘약에 해남파의 무인들이 쓰러질 거라니 우습지도 않다.
그런 저질스러운 독에 당할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소?”
갑작스러운 목소리는 갈지혁의 뒤에서 들려왔다.
막문환이 다가오고 있다.
“무슨 책임을 말하는 거요?”
“춘약으로 우리 모두를 죽일 수 있단 말!”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모두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렸다. 더불어 해남파 무인들의 눈에 흉흉한 살기가 곁들기 시작했다.
다른 것도 아닌 춘약으로 자신들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심히 모욕적으로 들렸던 것이다.
당연하다.
명문 정파의 무인들이다.
그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그들에게 춘약은 정말 저급한 독에 불과했다.
“물론.”
갈지혁이 대답했다. 주변의 살기 어린 태도를 알면서도 그는 태연했다.
허튼 말을 한 게 아니니까.
그는 정말로 춘약 하나로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일 자신이 있는 것이다.
“좋소. 그렇다면 나를 가지고 한번 시험해 보시오. 내가 그 춘약에 중독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말이오.”
막문환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데 갈지혁은 예상외의 말을 내뱉었다.
“싫소.”
“싫다니? 지금 그 말은 당신의 말을 증명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되는데? 하하! 갈지혁이라는 자가 이토록 우스운 자였던가!”
막문환의 웃음에 갈지혁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기분이 좋지 않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중독시키고 나서 다시 해독시키고…… 그런 취미는 없으니까.”
“하, 하하!”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결코 기분이 좋아서 웃는 웃음이 아니다.
그의 기분은 바닥이다.
갈지혁의 말의 의미를 아는 탓이다.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해독을 시켜야 하니 귀찮다 이 말이 아닌가.
모욕적이다.
갈지혁은 지금 막문환을 중독시키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소리다.
“걱정 마시오. 춘약으로 사람을 죽인다? 난 믿지 않으니까. 한번 해 보시오. 해독 따위는 필요 없소. 애초에 중독되지도 않을 테니까.”
막문환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다른 독이라면 몰라도 춘약에 중독되어 죽는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춘약으로 해남파를 모욕하는 것도 들어줄 수 없다.
“아저씨.”
“말리지 마십시오, 아가씨.”
곽소정이 말리려는 듯이 끼어들었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확고했다.
그가 눈을 부릅뜬 채로 갈지혁을 바라봤다. 하독해 보라는 소리다. 갈지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원한다면.”
그가 손가락 하나를 꿈틀대자 소매 속에서 가루가 확하니 쏟아졌다. 그 가루가 막문환을 뒤덮었다.
막문환은 호흡을 멈췄다.
이런 가루는 코나 입, 눈 같은 곳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온다. 그렇지만 갈지혁이 그리 간단하게 하독했을 리가 없다.
갈지혁은 가만히 선 채로 막문환을 바라봤다.
잠시 온몸의 상태를 확인하던 막문환이 이내 씩 웃었다.
“멀쩡하군.”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하는 막문환의 모습을 본 해남파의 무인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해남파의 무인들은 대놓고 갈지혁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토록 당당하게 말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 보니 아무것도 없다. 괜한 헛소리나 지껄여대는 자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웃고 있는 막문환을 보던 갈지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당신들이 독을 모른다는 거야.”
갈지혁이 갑작스럽게 발로 땅을 밟았다. 거대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그 순간이었다.
“욱!”
막문환은 머리를 감싸면서 비틀거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방금 전 웃음을 띤 채 태연하게 서 있던 그가 갑작스럽게 비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막문환은 급히 온몸의 혈도로 퍼지기 시작한 춘약의 기운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비록 몸 안으로 침투했다고는 하지만 춘약 정도라면 내공으로 억눌러 밖으로 배출하는 게 가능하다.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춘약이라면 지금쯤 서서히 기운이 죽어야 하는데…….
“컥! 컥!”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급기야는 땅에 엎어졌다.
더 이상 막문환은 일어서 있을 힘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그저 춘약일 뿐이다.
물론 갈지혁이 약간 손을 본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춘약이 기본이 된 독이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하독하는 방법이 독특했다. 그저 욕정이 치솟는 게 아니라 모든 혈도가 점점 막혀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피가 흐르지 못해 온몸이 터져 버린다.
그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막문환은 땅을 뒹굴기 시작했다.
갈지혁이 태연하게 뒤로 돌아서 놀란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현문에게 말했다.
“독이라는 건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같은 독이라도 천차만별이오. 독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없소.”
“아, 알겠네. 알겠으니 해독 좀 해 주게.”
현문은 막 숨이 넘어가려는 막문환을 보면서 급히 말했다. 그의 어투가 상당히 다급한 것이 혹여 그가 죽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하다.
“미안하지만 약속이오. 애초에 저자는 나에게 해독을 부탁하지 않았소.”
“이보게,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갈지혁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막문환을 내려다봤다.
그의 행동으로 추측컨대 결코 해독을 해 줄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때 곽소정이 나섰다.
“부탁할게요. 해독해 줘요.”
“…….”
“해남파에는 중요한 사람이에요. 갈지혁 당신에게 함부로 행동한 것은 사과하도록 할게요. 그러니까 해독해 줘요. 부탁이에요.”
갈지혁은 곽소정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소매를 흔들었다.
미칠 듯이 꿈틀대던 막문환의 몸이 잠잠해졌다. 그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온몸이 붉게 물들어 버렸다.
갈지혁이 허리를 편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 전까지 갈지혁에게 비웃음을 날리던 자들 중에 아직까지 고개를 들고 있는 자는 없다. 그들 모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갈지혁의 눈을 피했다.
아직도 막문환은 땅을 뒹굴고 있다.
이제는 점점 호흡이 일정해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거동을 하는 것은 불편한 모양이다.
애초부터 갈지혁은 막문환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고통을 받았을 때 해독해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대단하군요. 춘약으로 막문환을 이리 만들 수 있다니.”
“아무것도 모르고 뿌려대는 독은 독이 아니니까.”
기온, 습도에도 영향을 받는 것이 바로 독이다. 미묘한 차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잠시 후 땅에서 뒹굴고 있던 막문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통 흙투성이고 옷은 마치 물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홀딱 젖어 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춘약이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춘약이오.”
“그런데 어찌하여 이같이 다르단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소.”
“무인이 뿌리는 독과 독인이 뿌리는 독이 같을 리가 없으니까.”
그 한마디에 막문환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할 수가 없어져 버렸다.
무인과 독인의 차이가 그리도 크단 말인가.
독을 보다 더 잘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틀렸던 모양이다.
곽소정이 옆에 서 있다가 말했다.
“함부로 하신 것 사과하셔야죠, 아저씨.”
“……미안하오. 해남파의 무인들을 춘약으로 중독시킬 수 있다는 말에 울컥한 모양이오.”
막문환은 정중하게 말했다.
지금 그는 목숨을 구걸 받았다.
무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또한 죽고 싶은 생각도 없는 게 솔직한 막문환의 마음이다.
할 게 많다.
지금같이 해남도가 뒤숭숭할 때 해남파에는 한 명의 힘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다. 막문환이 죽는다면 그만큼 해남파는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오기로 죽어도 좋다고 말했지만 막상 숨이 턱하니 막혀 오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렇지만 살았다.
갈지혁이 해독을 해 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번 독에 당하고 나니 솔직히 말해 갈지혁과 다투고 싶은 생각도 싹하니 사라졌다.
독이라는 건 검에 베이는 것과는 다른 고통을 그에게 줬다. 여태까지 느꼈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고통이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해남파로 곽소정이 돌아온 이 마당에 이토록 우중충한 분위기는 사양이다.
“자자! 식사들 준비하자고!”
현문의 외침에 멈춰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다시금 시작됐다.
해남파는 해남도의 중앙에 있는 여모봉에 위치하고 있지만 백씨세가는 배가 도착한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들은 뱃길을 이용한 장사로 많은 돈을 번 가문이다. 수로를 이용하기 편한 곳에 거처를 두기 마련이다.
해구(海口)라는 해남도에서 알아주는 도시에 백씨세가는 위치하고 있다.
해구는 참으로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더불어 해남도로 들어오는 많은 물자가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다.
백씨세가는 이곳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해구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해남도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백씨세가와 연이 있어야 한다고 할 정도이니 그들이 이곳에서 끼치는 영향력이란 두말할 것도 없다.
해남도에 도착한 백무각 일행은 두 시진가량을 이동하여 백씨세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백무령이 있는 가주의 거처였다.
늦은 오후, 백무령은 방에서 누군가와 한가로이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주변에 울린다.
먼저 시비 하나가 조심스럽게 방 안에 들어가서 백무령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를 말했다.
그러자 웃고만 있던 그의 표정이 잠깐 변했다.
백무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귀하게 모셔놓고 먼저 자리를 뜨게 돼서 죄송할 뿐이오.”
“아닙니다. 이런 자리라면 저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또 불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한 번 초대하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백무령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중년의 사내와 가벼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문밖으로 나가자 백무령이 자리에 털썩 앉았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그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
방금 전 이 방에 함께 있던 자를 생각하니 절로 욕이 쏟아진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 같이 일하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저 재수없는 상판대기를 갈아 버리리라.
자리에 앉고 나서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자 백무각과 화문성이 방에 들어섰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백무각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선 자리에 앉도록 해.”
백무령이 먼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의 건너편에 백무각과 화문성이 자리했다. 기분 좋은 얼굴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고생이 많았다. 일은 어찌 되었느냐?”
“저기, 그게…….”
백무각의 입이 열리면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답을 기다리던 백무령은 말이 이어지지 않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이내 백무각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백무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실패한 게냐?”
백무령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계획에 문제될 거리는 없다.
화문성을 믿는 것도 있지만 분명 곽소정의 옆에는 현문밖에 없다. 그라면 자신이 엄선한 여섯 명이 이기지 못할 수준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