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14화
결코 실패할 이유도 없고, 실패했을 리도 없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백무각의 행동은 평소의 당당했던 그의 자식답지 않았다.
“허어, 그럴 리가…… 화문성, 이게 무슨 일인가?”
“예상외의 변수가 나타났습니다.”
“예상외의 변수라니?”
“하필이면 도련님이 탄 배에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백무령은 머리를 감싸 안았다.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자가 갑자기 끼어들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자 하나 때문에 계획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오래된 지병인 두통이 엄습한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화가 난 감정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누구인가, 그 의외의 인물이라는 게?”
“갈지혁입니다.”
“갈지혁? 저 중원에서 독왕이라고도 불린다는 그 갈지혁?”
“맞습니다.”
“젠장!”
쾅!
백무령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하필이면 자신이 계획한 일을 펼치려는 순간 그 배에 갈지혁이 탄단 말인가. 갈지혁이라는 자에 대한 이야기는 백무령 또한 귀가 따갑게 들었다.
실상 그를 섭외해서 백씨세가의 일을 부탁하려고도 했던 적이 있었으니 그에 대해 백무령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조사를 하면서 그는 갈지혁이라는 존재에 점점 감탄했다.
하지만 그가 주변과 타협을 모르는 인물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끊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이곳 해남도에 나타났다. 그것도 백무령의 일을 방해하면서 말이다.
“자세히 그 상황에 대해 이야기 좀 해 보거라.”
“그 상황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버님?”
“갈지혁이 싸움에 끼어들게 된 계기 말이야!”
백무령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백무각은 움츠린 채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이야기를 백무각은 아버지에게 했다. 곽소정에게 시비를 걸었고, 현문과 자신들이 싸우려 했던 과정을. 그리고 그때 갑자기 갈지혁이 나섰던 것도 말이다.
듣는 내내 백무령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가 물었다.
“혹시 갈지혁이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제가 압니다.”
옆에 있던 화문성이 대답했다.
백무령이 그를 바라봤다.
“그는 해남파의 무인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하더군요. 아마도 해남파로 향한 듯싶습니다.”
“해남파라…… 갈수록 태산이군.”
욕설이 절로 나온다.
하필이면 갈지혁이 이 시기에 나타난 것도 뭔가 꺼림칙하다. 더군다나 그가 다른 곳도 아닌 해남파로 갔다고 한다.
해남파와 일전을 벌일 준비를 하던 백무령으로서는 최악의 소식이다. 다른 자도 아닌 갈지혁이라면 단 일 수에 많은 자들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의 독이라면 해독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게다.
“시간이 없거늘 하필이면 왜 지금 그런 놈이 이곳에 나타나느냔 말이다. 혹시 해남파에서 고용이라도 한 것 아니냐?”
“아닙니다. 제가 봤을 땐 어쩌다 보니 만난 듯합니다. 그리고 그게 인연이 되어 조금 신세를 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그가 우리 편이 아닌 것은 확실한 것 아닌가?”
“물론입니다.”
화문성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백무령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기다릴 시간이 없다. 이제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더 이상 시간을 준다면 해남파 또한 다른 구파일방 중 하나의 힘을 빌릴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최근 해남파의 인물들이 중원으로 자주 나가곤 한다.
여기서 다른 힘이 개입된다면 싸움은 더욱 힘들어진다.
어떻게든 단기간에 끝내야 한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어찌하다니?”
“시간을 조금 더 가지시는 건 제가 봤을 때 좋지 않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소리.”
“하지만 갈지혁이 있을 때 해남파에 시비를 거는 것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래서?”
백무령이 되물었다.
화문성은 머리가 영특한 자다. 그렇지 않으면 백무령이 이렇게 측근으로 두고 쓰지도 않았을 게다.
무슨 방법인가가 있으니 이러한 말을 꺼냈으리라.
백무령은 확신했고, 예상은 맞았다.
“아직 갈지혁을 비롯한 그들은 해남파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중간 중간 저희의 세력을 피해 돌아서 갈 게 분명합니다. 서두른다면 그들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갈지혁은 고수인데…….”
“우리 또한 휘하에 절대고수가 몇 명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지금 그 무리에는 갈지혁을 제하고는 뛰어나다고 할 만한 자가 몇 되지 않습니다. 성공한다면 곽소정을 잡는 것도 가능합니다.”
백무령은 망설이고 있다.
갈지혁이라는 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때 화문성이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
“만약 그가 해남파와 힘을 합치게 되면 그때는 늦습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놈이 해남파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그 전에 반드시 죽인다. 큰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화문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계획은 모두 짜였다.
이제부터 백씨세가는 갈지혁을 죽이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 부을 게다.
그때 막 자리에서 일어난 화문성에게 백무령이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자네가 없는 동안 한 사람이 찾아왔었네. 그놈도 독을 쓴다고 하던데 자네가 한번 실험해 봐야겠어.”
“독 말입니까?”
“그래.”
“그건 제가 하는 일이 아닌데…….”
“알아. 아는데 이번 놈은 조금 특별나서 그래.”
백씨세가는 떠돌이 낭인들도 실력이 적합하면 가문의 무사로 받아들인다.
아마 독을 익힌 누군가가 이곳에 온 모양이다.
그렇지만 무사들의 실력을 시험하는 것은 화문성이 아닌 다른 자가 맡아서 한다.
그런데 가주가 특별히 그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
도대체 어떠한 연유일까?
“어떤 놈이기에 그러십니까?”
“보통 놈이 아닌 것 같아. 우리가 섭외한 절대고수 중 하나를 어렵지 않게 이기더군. 오 초 정도 겨루는 듯싶더니 바로 쓰러뜨렸어.”
“정말입니까?”
“그래서 자네가 한번 시험해 보고 좋겠다 싶으면 보다 중요한 요직에 쓸까 싶어서 그래. 조만간 해남파와 싸워야 하는데 그런 고수가 있으면 좋은 일이지. 더군다나 독을 쓰는 자라면 더 더욱. 흐흐흐.”
최근 들어 독에 연관된 자들이 무림에 자주 등장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화문성은 흔쾌히 수락했다.
독만큼 간단한 방법으로 많은 자를 제압하는 수단도 드물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그자의 이름이 뭡니까?”
“꽤나 젊은 놈이었어. 서른 정도?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 단리문! 그놈 이름이 단리문이라고 하더군.”
“단리문이라…… 생소한 이름인데. 뭐,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문성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해남도에 그가 나타났다.
정체불명의 인물로, 얼마 전 무당파에서 백여 명에 달하는 이들을 모두 죽인 단리문이.
그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 * *
백씨세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해남도의 장사는 대부분이 백씨세가를 거쳐야 가능하다. 거기다가 무역까지 독점하다시피 하니 백씨세가에 들르게 되는 사람은 하루에도 몇 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당연히 건물들은 커다랗고 머무는 사람들의 숫자도 엄청나다.
백씨세가는 크게 네 곳으로 나뉜다.
외관은 그날 당일로 손님들이 머무는 일외관(一外館)과 백씨세가의 고위층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이외관(二外館)이.
그리고 내관(內館)도 두 개로 나뉜다.
상내관(上內館)과 하내관(下內館)이 바로 그러하다.
상내관은 백씨세가의 인물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리고 하내관이 바로 백씨세가 내에서도 중요한 인물들이 묵는 곳이다.
이곳 백씨세가의 상내관에 한 사내가 있다.
그는 나무를 등지고 앉아 나뭇잎은 든 채로 연신 싱글벙글이다. 무엇이 그리도 기분이 좋은지 나뭇잎을 빙글빙글 돌리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나뭇잎이 푸르다.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해남도의 날씨가 좋다더니.”
그는 유쾌하다는 듯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동안 해남도로 오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렸다. 그의 측근들이 미리미리 마을마다 말을 준비해 두지 않았다면 지금 해남도에 도착하는 것은 무리였을 게다.
“참으로 좋은 곳이야. 날씨가 덥지도 춥지도 않은 게 사람 살기도 좋고.”
그의 시선이 다시금 손가락에 들린 나뭇잎으로 향했다.
나뭇잎이 미약하게 흔들거린다.
기분 좋은 바람이 연신 볼을 간질인다.
나무에 기댄 채로 웃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앞으로 다섯에 달하는 자들이 다가오고 있다. 그들은 사내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그들이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사내는 계속해서 웃고만 있다.
그런 사내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머리가 까진 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고, 얼굴은 굉장히 험악했으며 덩치는 거대했다.
그런 자가 거의 밀듯이 다가와서 사내를 내려다보니 마치 어른과 아이가 함께 있는 것 같다.
그가 말했다.
“뭐 하는 거냐?”
“보면 모르겠습니까? 나뭇잎을 가지고 놀고 있었지요.”
“하하!”
그가 우악스럽게 손을 내뻗더니 사내가 쥐고 있는 나뭇잎을 손으로 잡았다.
강하게 나뭇잎을 짓눌러 찢어 버린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하군. 어떻게 하나, 네 장난감을 내가 망가뜨렸는데?”
그러자 사내도 따라 웃었다.
“신경 안 써 줘도 됩니다. 어차피 땅에 널린 게 장난감이니까요. 그리고…… 이제 장난감이 더 늘었으니 화를 낼 이유가 없지요.”
빙그레 웃는 사내의 모습에 대머리사내의 머리에 힘줄이 솟았다.
지금 그는 은근히 자신들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용기가 있구나.”
“호랑이가 어찌 앞에 고양이가 있다고 무서워하겠습니까.”
“이놈이!”
사내가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지만 채 주먹이 닿기도 전에 웃음만 흘리던 사내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런 주먹으로 뭘 잡겠다는 거냐?”
말투가 급변했다. 그렇지만 표정은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웃음으로 가득하다.
다섯 명의 인물이 갑자기 자신들의 병기를 뽑아냈다. 비록 이들이 건달처럼 다가오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 다섯은 백씨세가 내에서도 고수로 꼽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어떠한 명령 때문에 이 사내에게 이렇게 접근한 것이다.
“명년,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이다.”
“킥킥, 곧 죽을 놈이 내 제삿날까지 챙겨 주려는 게냐? 우습기 그지없구나.”
“놈!”
도가 마치 팽이처럼 돌기 시작했다.
미칠 듯한 회전력과 함께 날아드는 도는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싹 돋을 지경이다.
그때 사내의 몸이 환영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던 자의 손이 비틀렸다.
“크아악!”
으드드득!
팔이 완전히 비틀렸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린다.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나와 버렸다.
도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도를 놓친 그가 자신의 팔을 부여잡은 채로 고통을 호소했다.
그렇지만 정작 사내는 웃음만 지은 채로 그를 위에서 내려다봤다.
그의 손이 양팔을 순식간에 잃은 사내의 머리에 얹어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사내의 얼굴이 급격히 변했다. 그가 급히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하네. 제발…….”
퍽!
손이 머리통을 파고들면서 더 이상 사내는 말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피가 줄줄 흘러나와 손을 적셨지만 여전히 그 정체불명의 사내는 웃고만 있다.
무엇이 그토록 즐겁단 말인가.
“이, 이 악마 같은 놈!”
“악마?”
사내가 픽 하고 웃는다.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연신 웃기만 한다.
이토록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 자가 짓는 미소치고는 너무나 해맑아 보인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피가 줄줄 흘러내려 옷을 적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
“시비를 걸었으니 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