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15화
그가 한 걸음 다가갔다.
기겁한 자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다시금 한 발 앞으로 다가온다. 이제는 대놓고 뒤로 몸을 돌린 채로 그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막상 손을 섞어 본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전혀 무공을 모르는 자라면 모를까 이들 또한 나름대로 알려진 무인들이다.
상대의 실력을 알 정도는 된다는 소리다.
이자는 자신들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다.
우선은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다.
돈을 받고 왔다.
그런데 목숨을 잃는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받는다고 해도 쓸모없는 일 아닌가.
급히 네 명의 사내가 몸을 돌려 도망쳤지만 사내는 웃으며 발을 굴렸다.
그의 몸이 매처럼 하늘로 솟구치더니 번개처럼 떨어졌다.
사내의 몸이 떨어지면서 그대로 손을 내리그었다.
손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이 쏟아졌다.
검기를 연상케 하는 기가 등을 내비친 네 명의 온몸을 난자했다.
사방으로 피가 터져 나왔다.
땅에 발이 닿자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건물을 바라봤다.
“이제 시험은 끝입니까?”
“……대단하군.”
화문성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죽어 버린 다섯 또한 잃기에 아까운 인재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이 사내의 무위를 보고 나니 이 다섯의 죽음 따위는 완전히 뒤편이 되어 버렸다.
애초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실험하고 있음을.
“자네 같은 고수는 본 적이 없어. 설령 해남파의 장문인이라고 할지라도 이 네 명을 이토록 가볍게 제압할 수는 없을 걸세.”
완전히 난자하다시피 해 시신은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이토록 잔혹한 장면을 보고도 화문성은 너무나 태연해 보였다. 대단한 담력을 지녔다는 소리다.
“이 정도면 합격입니까?”
“물론. 하지만 그 전에…… 왜 자네 같은 고수가 우리에게 오려는지 묻고 싶군.”
“이유라…….”
픽 하고 사내가 웃었다.
사내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화문성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가 슬쩍 고개를 뒤로 빼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사내는 말했다.
“그 이유를 알면…… 당신은 죽어야 할 텐데?”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눈에는 살기가 넘친다. 화문성이 손을 저으면서 대꾸했다.
“그럼 됐어. 사양하지. 그럼 한 가지만 묻지. 자네는 우리에게 득인가, 실인가? 그것만 대답하게.”
“물론 득이지.”
“좋아, 그럼 자네를 고용하도록 하겠네.”
“당신…… 꽤나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 같은데? 내 이름은 화문성이라고 하네. 자네의 이름이 단…….”
“단리문.”
“아, 그래. 단리문이었지.”
화문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지 않던 복이 굴러 들어왔다. 솔직히 이 정도의 자라면 갈지혁과도 싸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을 쓸 줄 안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직 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무공만으로도 이미 단리문은 화문성의 마음을 모두 빼앗아가 버렸다.
화문성이 단리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해 보자고. 그럼 내일 다시 연락을 줄 테니 이곳에서 하루만 기다려 주게.”
말을 마친 화문성이 사라졌다.
가만히 선 채로 멀어지는 화문성을 바라보던 단리문이 손으로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가 웃음을 흘렸다.
그의 입이 열리며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몸에 손을 대고 산 놈은 네가 처음이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단리문은 어깨를 툭툭 털었다.
마차는 최대한 빠르게 해남파로 가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였다.
현문과 막문환이 대화를 해서 나온 답이 있다.
분명 화문성은 쉽게 물러나지 않을 자라는 거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화문성이라면 곽소정이 해남파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기회를 노릴 거라는 거다.
최대한 빠르게 해남파로 가야 한다.
해남파에만 들어가게 되면 그 후부터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게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마음먹고 백씨세가가 달려든다면 막아 낼 힘이 이들에게는 없다.
그렇지만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더욱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급한 마음만큼 그들은 주변에 신경을 쏟으며 이동했다.
해남도에서 백씨세가가 가지는 힘은 보통을 넘어선다. 어떠한 마을이든 백씨세가와 연이 있는 자들이 있고, 그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정도로 해남도에서 만큼은 백씨세가의 힘이 어마어마하다.
그랬기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어디를 가든 백씨세가의 눈이 있다는 소리도 되니까.
객잔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기 위해 마차를 멈춘 일행은 몇 명을 제하고는 전부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탁자 몇 개에 해남파의 인물들이 자리했다.
최대한 빠르게 나오는 음식들로 가볍게 시킨 이후 가벼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곽소정이 있는 탁자는 마차를 타는 인원과 똑같이 자리했다.
분위기는 조용했다.
갈지혁이야 원래 겉도는 입장이고, 현문과 막문환은 그의 눈치를 본다.
아무래도 갈지혁이라는 존재가 그들에게는 쉽지 않은 듯하다.
곽소정이 나온 음식을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여전하시죠?”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이요.”
“아! 하하, 장문인께서야 여전하시지요. 아직도 남해삼십육검의 정수를 깨닫지 못했다 하시면서 하루 종일 매달려 계십니다.”
곽소정의 아버지이자 현 해남파의 장문인인 곽생은 무골(無骨)이다.
그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무광(武狂)이다.
무공에 미쳤고, 무공을 위해서만 산다.
곽생은 서른다섯이 넘어서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의 무공에만 파고들었다.
바로 남해삼십육검이다.
무려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무공에만 몰두했다. 다른 무공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곽소정은 문득 기억났던 모양이다.
그렇게 하나에 미친 탓인지 곽생은 역대 해남파의 장문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남해삼십육검을 펼치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다만 싸움을 싫어하고 온화한 성격이라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뿐이다.
간단한 음식인 만큼 식사도 간단했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마차로 움직였다.
마차가 대로를 달려 빠르게 마을을 벗어났다.
아직도 해남파까지는 삼 일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직선으로 쭉 타고 간다면 시간을 조금 더 단축시킬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백씨세가의 세력권에 너무 들어가기도 뭐한 노릇이다.
빠르게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한 행로를 타고 움직이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갈지혁은 턱을 괸 채로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의 눈이 스쳐 지나가는 모든 주변의 경관을 담으려고 하고 있다.
중원과는 다른 이국적인 모습이 갈지혁의 시선을 끈다. 이곳은 중원이면서도 중원이 아니다.
참으로 신기한 곳이다.
마차는 이제 사람의 인적이 닿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길은 정리되어 있지 않고, 주변에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마차 다섯 대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 창밖을 바라보던 갈지혁이 고개를 홱하니 돌렸다.
핑!
무엇인가가 갈지혁의 얼굴이 있던 자리를 가르면서 그대로 마차 바닥에 박혔다.
모두가 날아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박히는 것까지 모를 리 없다.
마차 안에 있던 나머지 셋이 동시에 바닥을 쳐다봤다.
얇지만 뾰족한 침 하나가 마차 바닥에 박힌 채로 부르르 떨리고 있다.
암습이다.
“마차를 멈……!”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히이잉!
갑작스럽게 말이 펄쩍 뛰는 듯싶더니 마차가 뒤집혔다.
현문이 급히 곽소정은 보호했다. 그렇지만 마차가 뒤집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차가 옆으로 쓰러지고 나서 현문이 급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아아, 전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서둘러 나가죠.”
다행히 이 마차에 타고 있던 네 명은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모양이다.
막문환은 발로 마차 문을 걷어찼다.
문이 박살나면서 공중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그는 마차 밖으로 몸을 날렸다.
마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막문환은 주변을 살폈다.
“젠장!”
그의 욕설을 들으며 곽소정과 그녀를 호위하는 현문이 함께 마차에서 빠져나왔다.
주변을 둘러본 현문 또한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차 다섯 대 모두 뒤집혀 버렸다.
마부들은 큰 부상을 입었거나 죽었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자 중 일부도 마부와 마찬가지 신세가 되어 버렸다.
말들을 둘러보니 더욱 가관이다.
다리가 모두 잘려 나갔다.
마차에서 해남파의 무인들이 하나씩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했다.
그리고 이내 주변의 광경을 보고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죽은 동료들, 그리고 완전히 뒤집혀 버린 마차들.
누군가가 손을 쓴 것이 확실한 주변 상황에 분노를 숨기기가 어려웠다.
“누구냐!”
막문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에서 살기가 터져 나왔다. 그는 검을 든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나무속에서 몇 명의 무인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해남파의 무인들은 모두 병기를 뽑아 들었다.
차르릉!
쇳소리가 이공간을 뒤덮었다.
나타난 인물의 숫자는 셋이다.
흑색의 무복, 청색의 무복, 흰색의 무복.
옷만큼이나 생긴 것도 특징도 제각기, 너무나 다르다.
흑색의 무복을 입은 자는 무척 젊다. 얼굴은 화화공자요, 몸은 호리호리하다.
싸움보다는 글로 먹고 사는 자와 같은 느낌이다.
청색의 무복을 입은 자는 무척 뚱뚱하다.
마치 산을 연상케 할 정도로 뚱뚱한 그는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나이는 얼추 사십이 조금 안 된 듯하다.
마지막으로 흰색의 무복을 입은 자는 노인이다.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마치 신선 같은 외향을 지닌 자다.
그렇지만 두 눈을 감고 있다. 맹인인가 하는 착각이 드는 모습이다.
단지 세 명이라는 사실에 해남파 무인들은 자신 있게 검을 겨누었다.
“네놈들이냐! 감히 어떤 분이 가는 길이거늘……!”
막 검을 든 채로 달려들려는 막문환의 귀에 막 마차에서 기어 나오는 갈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움직였다가는 다리가 잘려 나갈 거요.”
검을 든 채로 몇 발자국 달려 나가던 막문환이 갑작스럽게 멈췄다.
그는 그제야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뭔가 별로 특이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인의 감각이 무엇인가가 있음을 말해 줬다.
“아! 이런, 아깝네. 한 놈 바로 보낼 수 있었는데 말이야.”
흑색 무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막문환은 이를 으드득 갈면서 동시에 갈지혁을 향해 고개를 꾸벅했다.
젊은 사내가 웃으면서 갈지혁을 가리켰다.
“네가 갈지혁?”
“역시 백씨세가로구나.”
“그건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지 않나?”
사내가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사내의 눈에는 처음부터 갈지혁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 놈들은 잔챙이다.
막문환은 지금 눈앞에 나타난 세 명의 자신감 있는 태도에 화가 솟구쳤다.
가뜩이나 해남파의 무인들이 죽었다. 거기다가 말과 마부들도 죽었다.
“우리 해남파를 우습게 보는구나.”
“흐흐.”
뚱뚱한 중년의 사내가 웃었다.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갑작스럽게 사방으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검을 든 손이 저릿저릿하다.
막문환의 표정이 확 변했다.
단순한 분노로 가득했던 그의 머리가 일순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