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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142화 (142/200)

# 142

17화

갈지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예상대로다.

그는 인면지주의 독과 꼭두각시의 독을 적절하게 조합했다.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험은 성공적이다.

인면지주의 독은 독성을 빠르게 퍼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무서운 독이지만 배합에도 어울리는 것이다. 그 덕분에 독을 뿌린 순간 채 방비를 하기도 전에 이귀의 몸은 갈지혁의 것이 되었다.

날아드는 살금을 이귀가 몸으로 막아 낸 것은 꼭두각시의 독에 중독되어서다.

“너도…… 내 꼭두각시가 되어 보겠느냐?”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갈지혁의 눈빛을 보는 순간 삼귀는 움찔하고 뒤로 물러서 버렸다.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아 버렸다.

상대가 안 된다.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이들 또한 해남도에서 고수로 알려져 있고 해남파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는 자들인데 갈지혁 앞에서는 너무나 무기력하다.

그때였다.

“물러서거라.”

가만히 있던 일귀가 마침내 움직였다.

“할아버지…….”

“저놈을 데리고 당장 물러서라. 네 상대가 아니다.”

일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걸었다. 그가 갈지혁과 삼 장 정도 되는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삼귀의 얼굴에서 장난기 어린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할아버지인 일귀가 나섰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건 삼귀뿐이리라.

스르릉.

일귀가 검을 뽑았다.

“갈지혁.”

“…….”

“재미있겠군.”

일귀는 눈을 감고 있다.

정말로 맹인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문제는 몸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라는 거다.

상대가 맹인이든 그렇지 않든 이제 신경 쓸 여력은 없다.

‘이자는 강하다.’

갈지혁은 긴장됨을 느꼈다.

흑풍에게 당했던 부상이 이제는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만약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다면 다소 버거웠을지도 모르는 상대다. 그렇지만 운하연 덕분에 빠르게 나은 몸은 갈지혁의 의지를 배신하지 않을 게다.

눈을 감고는 있지만 모든 것이 보이는 것처럼 일귀의 행동은 거리낌이 없다.

천천히 움직이지만 검은 어느 때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비스듬히 내려져 있다.

양쪽 모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돈다.

해남파의 무인들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둘의 대결을 바라봤다.

이 같은 수준을 지닌 무인들의 싸움을 실제로 보는 경우는 많지 않다.

더군다나 비무도 아닌 생사를 건 싸움이다.

종종 이러한 대전 관람이 자신이 싸우는 것보다 더 많은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들의 눈이 둘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박혔다.

막문환은 내심 갈지혁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그의 무위는 자신들은 상대도 되지 않는 악면삼귀와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지만 막문환도 알고 있다.

비록 독이라는 것이 검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노력 없이 저 정도의 경지에 이른 건 아닐 게다.

질투심과 함께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기에 저 나이에 이 같은 경지에 올랐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갈지혁이 먼저 선공을 날렸다.

그의 몸에서 수라독공의 운기로 인한 독기가 주변으로 풀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날린 그의 지공은 일귀의 눈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지공은 공격 중에서 가장 은밀하다.

일귀는 눈을 감은 채로 검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아 냈다.

마치 두 눈을 뜨고 공격을 본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비록 눈을 감고 있지만 일귀는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움직인다. 지공을 막아 내자마자 그의 검이 움직였다.

빠르고 은밀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의 검이 비스듬하다는 거다.

해남파의 검법이 바로 그러하다.

그리고 전 중원을 통틀어 검날을 비스듬하게 휘두르는 건 해남파뿐이다. 그러한 것을 해남파의 무인들이 모를 리 없다.

현문이 중얼거렸다.

“맙소사……!”

아직 다른 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현문만큼은 지금 일귀의 검이 해남파의 것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무나 빠르기에 아직 다른 이들은 그 검을 읽지 못하는 듯했다.

갈지혁은 엄청난 쾌검에 연신 피하기 바빴다.

현문은 떨리는 눈으로 어떻게든 일귀의 검을 쫓았다. 비록 그도 제대로 검을 잡지는 못했지만 은연중에 묻어나는 해남파의 검을 현문은 보고야 말았다.

그것도 주워 익힌 무공이 아니다.

그의 검은 날카롭고, 해남파의 그 어떠한 검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제대로 해남파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

그 말은 곧 일귀가 해남파의 무인이었다는 소리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지금 해남도에서 그토록 악행을 벌이는 그가 실상은 해남파의 문도였다는 사실이 말이다.

현문은 일귀를 계속해서 바라봤다.

그러던 현문의 머리에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항상 자상하던 남자였다. 언제나 앞에서 등만 보여 주며 걸어가던 한 사내가 있었다.

해남파의 자랑이었고, 현문에게는 반드시 좇고 싶었던 한 사내가.

현문이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갈지혁이 검의 속도를 대충 몸으로 익혔는지 반격을 하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갈지혁의 손이 일귀의 검을 피하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퍼엉!

일귀의 입에서 검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렇지만 일귀 또한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갈지혁은 급히 피했지만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갈지혁은 그대로 일귀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쥐어뜯어 버렸다. 그대로 내려치는 검을 갈지혁은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일귀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갈지혁이 일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일귀 또한 갈지혁의 움직임에 맞춰 천천히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갈지혁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독을 하독하려는 게 분명하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현문이 소리쳤다.

“그만! 그만 하십시오!”

갈지혁이 갑작스러운 현문의 외침에 자세를 풀고 그를 바라봤다.

그런 갈지혁의 기세를 알아차렸는지 일귀는 바로 기습을 하려고 했다.

그때 현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요! 형님, 날 잊으셨소? 나 현문이오!”

갈지혁에게 검을 움직이려던 일귀의 몸이 일순 멈칫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의 몸이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검에 내기가 모이면서 환한 빛을 쏟아 냈다.

해남파 무인의 시선이 모두 현문에게 쏠렸다.

지금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다른 자도 아닌 일귀에게 형님이라고 외쳤다.

갈지혁의 주변으로 흩어졌던 독기가 점점 그의 손에 모였다. 격돌하려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현문은 계속해서 소리쳤다.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소! 시치미 떼도 난 알 수 있으니까! 왜 형님이 이곳에 있으시오?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있으시오.”

마지막 그의 목소리에는 흐느낌이 묻어 있다. 그때 검을 들어 휘두르려던 일귀가 천천히 검을 내렸다.

하얗게 모여들던 검기도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가 뽑았던 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소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스러운 것은 해남파의 무인들이다.

처음엔 현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를 듣던 일귀가 갑자기 검을 거두었다.

무엇인가 인연이 있다는 소리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있던 일귀가 입을 열었다.

“……가거라.”

“형님!”

“가래도!”

일귀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현문이 곽소정에게서 떨어져서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걸어오자 일귀는 몸을 돌려 나타났던 곳으로 사라지려고 했다.

현문이 다시금 그를 불렀다.

“이야기를 들어야겠소, 형님. 왜 형님이 이곳에 있는지 그 이유를 반드시 들어야만 돌아갈 수 있겠소.”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왜 모르겠소. 사십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어찌 형님을 잊겠소.”

“우습구나, 우스워.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거늘…… 네가 날 어찌 아느냐?”

말을 마친 일귀는 멍하니 서 있는 삼귀에게 소리쳤다.

“어서 따라오거라!”

삼귀는 이귀를 부축한 채로 일귀의 뒤를 쫓아 걸었다. 해남파의 무인 중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등을 보였지만 뭔가 싸움을 할 분위기도 아니다.

막문환이 나서면서 뭐라고 하려 했지만 곽소정이 그런 그를 막았다.

막문환은 곽소정을 바라봤다. 그녀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치잇.”

그로서는 참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일귀를 바라만 보던 현문이 입을 꽉 깨물더니 크게 소리쳤다.

“난 언제나 당신의 아래에서 바라만 보았소! 이제는 그러지 않을 게요! 형님이 어디를 가든 내가 반드시 알아내고 말 거요! 말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알아낼 거요. 지금의 난 그때처럼 울기만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악에 받친 목소리다.

걸어가던 일귀는 등도 돌리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멀어지는 일귀가 아닌 현문을 바라봤다.

일순 그의 표정이 변하는 걸 갈지혁은 놓치지 않았다.

‘전음이로군.’

일귀가 현문에게 전음을 보냈을 게다.

그리고 그걸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갈지혁은 그러한 걸 알아차렸다.

악면삼귀가 사라졌지만 해남파의 무인들은 조용했다.

분위기가 뭔가 묘하다.

그때 가만히 있는 현문을 대신해서 막문환이 나섰다.

“자자, 죽은 자들의 시신을 수습해라. 그리고 부상자들도 어서 치료를 시작해!”

막문환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해남파의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곽소정이 가만히 서 있는 현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현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현문이 곽소정을 바라봤다.

그제야 그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니에요.”

어찌 묻고 싶은 게 없으랴.

그렇지만 곽소정은 현문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다른 건 다 그렇지만 곽소정은 단 한 가지만은 알고 싶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방금 그 일귀라는 사람, 해남파의 문도였나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주변에 있던 무인들 대부분이 뒤처리를 하기 위해 움직였기에 그 이야기를 들은 건 곽소정을 제하고 둘밖에 되지 않았다.

갈지혁과 막문환이다.

갈지혁은 애초에 검을 겨눌 때 비스듬히 세우는 것을 보고 혹시나 하던 입장이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막문환이 지니는 놀람은 상상 이상이다.

현문이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가 했는데 해남파의 문도였단다. 놀라서 할 말조차 잃어버렸다.

“우선은 이곳에서 조금 쉬도록 하죠. 어차피 바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 보이니까요.”

곽소정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반수 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것도 그나마 갈지혁이 있었기에 이 정도에서 그친 거다. 만약 갈지혁이 없었다면…… 아마도 모두 죽었을 게다.

곽소정이 수투를 벗는 갈지혁에게 다가갔다.

“고마워요.”

“어차피 필요한 걸 받기로 하고 도와준 거요.”

“어쨌든요.”

곽소정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슬쩍 미소로 마음을 대신했다.

주변의 정리를 모두 끝내고 일행은 급히 대충 자리를 준비했다.

또 있을지도 모를 암습에 대비해서 해남파의 무인들은 주변의 경계도 신경 썼다.

그냥 도망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타고 갈 말도 없이 그냥 도망치는 것도 무리다.

혹여 백씨세가에서 먼저 손을 쓸까 봐 두 명이 미리 말을 구입하러 떠났다.

나머지 인원은 시신을 수습하고 바로 이곳을 떠날 생각이다.

순번을 정해 놓고 해남파의 무인들은 모두 잠에 빠졌다.

시간이 꽤 깊어졌을 때 누군가가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모두가 잠에 빠져들었을 이 무렵에 일어난 자는 바로 현문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한번 살피더니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문이 앞을 지나가자 마차 옆에 기대어 잠에 들어 있던 갈지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애초부터 현문이 움직일 거라는 걸 알고 있던 그다. 전음을 받았다는 것을 눈치 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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