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18화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걸어가던 현문이 뒤로 몸을 돌렸다.
서 있는 갈지혁을 본 현문은 놀란 듯 하더니 이내 픽 하고 웃었다.
마치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기분이다. 어떻게 용케 알고 있었는지 궁금증이 치밀었다.
“알고 있었는가?”
“물론.”
“어떻게 안 건지 궁금하군.”
“일귀가 전음을 보내는 걸 확인했소.”
“과연. 왜 중원에서 갈지혁이라는 자를 그토록 높게 평가하는지 알 만하군. 자네는 정말 대단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오르지 못한 경지에 자네는 벌써 도달한 지 오래야. 부럽군.”
현문은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일어난 자는 없다.
“가야 하네.”
그의 말투는 간절했다.
그리고 애초에 갈지혁 또한 말릴 생각은 없었다. 해남파의 일에 굳이 끼어들 생각도 없다.
어차피 갈지혁과 해남파는 남남이다.
“말릴 생각은 없소. 다만…….”
갈지혁이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저 소저는 아무래도 할 말이 있는 모양이오. 안 그렇소?”
누워 있던 곽소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문은 놀란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곽소정이 그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깨어 계셨습니까?”
“예.”
“허허, 아가씨에게 걱정을 끼친 모양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저씨, 혼자 가지 마세요.”
곽소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현문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저 혼자 가도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혼자 그렇게 움직이면 나중에 뒷소리를 들을지도 몰라요. 가뜩이나 지금…… 아저씨를 좋지 않게 보는 자도 생겼을 걸요.”
당연하다.
해남파의 인물을 기습한 자와 현문이 아는 사이다.
이런 와중에 단둘이 만난다는 것은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곽소정이 말했다.
“저랑 같이 가요.”
“안 됩니다, 아가씨. 다치실 지도 모릅니다.”
“부탁할게요.”
그녀가 바라본 것은 갈지혁이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까 약속한 것은 그 세 명을 쓰러뜨려 준다는 거였다. 싸움은 미적지근하게 끝났다.
그렇지만 그냥 둔다면 언젠가 다시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라리 더 귀찮게 일을 벌이기 전에 끝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갈지혁이 예상보다 쉽게 수락하자 곽소정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갈 소협이 절 지켜 줄 테니 아저씨는 걱정하지 말아요.”
“하지만…….”
“아저씨, 혼자보다는 둘이 나아요.”
그 말을 끝으로 곽소정이 현문의 옆에 가서 섰다.
이 여인이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한번 마음을 정했으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그녀의 성격을 현문이 왜 모르겠는가.
“알겠습니다. 대신 꼭 옆에 붙어 계셔야 합니다.”
현문이 갈지혁을 쳐다봤다. 분명 이 사내라면 암습이 있다고 해도 곽소정을 지켜 줄 수 있을 게다.
현문은 곽소정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이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까 전 일귀가 말했던 그 장소로.
일귀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해남파의 무인들이 머무는 곳에서 일 각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현문보다 일귀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귀는 돌 위에 몸을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다.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형님.”
“꼬리가 있구나.”
“죄송하오. 부득이 따라온다고 해서.”
“내가 전음을 보낸 걸 말했더냐?”
“아니. 네가 전음을 보내는 걸 알아차렸을 뿐이야.”
갈지혁이 대답했다.
애초부터 일귀는 현문을 따라온 둘 중 하나가 갈지혁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은 싸우려고 만난 게 아니다. 일귀는 갈지혁이 있음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놈은 갈지혁. 그럼 다른 한 놈은 누구냐?”
“안녕하세요? 곽소정이라고 해요.”
“……장문인의 딸이로군.”
일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로서는 곽소정이 이곳에 온 것이 예상외의 일이었던 모양이다.
당연하다.
일귀는 그녀를 죽이려 왔던 자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단한 용기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만용이라고 해야 할까.
“뭐, 좋아.”
일귀가 이곳에 온 것은 곽소정 때문이 아니다.
현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궁금한 게 많을 게다.”
“물론입니다. 왜 신룡검(神龍劍)이라고 불리던 형님이 어느 날 불현듯 사라지시더니 지금 악면삼귀의 일인이 되셨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룡검이라는 말에 곽소정은 움찔했다.
신룡검 노후량(盧厚諒).
곽소정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아마 현재 해남파의 인물 중에 노후량을 직접 본 자는 몇 명 되지 않을 게다.
사십 년 전 해남도를 들뜨게 했던 해남파 역대 최고의 고수라고까지 불리던 자다.
그런 그가 지금 눈앞에 있는 일귀란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곽소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신룡검이라…… 큭큭, 오랜만에 듣는 별호군.”
“형님, 말 돌리지 마시고 제대로 이야기를…….”
“현문, 난…… 해남파를 사랑했다.”
그 한마디에 현문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걸 모를쏘냐.
어렸을 때부터 옆에서 봐온 노후량은 해남파를 위해 태어났고, 해남파를 위해 죽을 그러한 위인이었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이토록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지 현문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째서 해남파를 버리셨습니까, 형님?”
“내가 해남파를 버린 게 아니라, 해남파가 나를 버린 게다.”
* * *
신룡검 노후량.
하늘이 낳은 절세기재로 평가받으며 앞으로 해남파를 이끌어갈 차세대 후기지수로 명망이 높았던 사내다.
그의 검은 기기묘묘하며 변화막측(變化莫測)하여 그의 검이 마치 용이 노니는 듯하다고 하여 신룡검이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고 한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동년배에서는 상대할 자가 없을 정도의 실력을 지니면서 그는 해남도에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 내는 무인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그가 나이 스물셋에 불현듯 모습을 감췄다.
많은 이들은 노후량이 무공을 익히기 위해 면벽 수행에 들어갔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그리고 사십 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노후량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왜 모습을 감췄을까? 호사가들은 떠들어댔지만 그것도 이제 와서는 기억 저 건너에 묻힌 이야기일 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노후량을 잊었다.
어째서? 왜 그가 모습을 감췄을까?
그건 노후량만이 알 뿐이다.
언제나처럼 새벽 일찍 일어난 노후량은 땀을 잔뜩 쏟아 낼 정도로 검을 휘둘렀다.
내일은 그에게 있어 특별한 날이 될 게다.
해남도에서는 오십 년에 한 번씩 검을 겨루는 대회가 열린다. 이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사람에게는 남해제일검(南海第一劍)이라는 칭호가 붙게 된다.
오십 년에 한 번이다 보니 운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재능이 빼어나도 출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대회는 해남도에 있는 무인이라면 모두가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길 정도로 대단한 무인으로서의 꿈이다.
나이가 쉰이 넘은 자들은 관례로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흔이 넘은 중년의 고수들은 많이 이 대회에 참전할 게다.
그 안에서 노후량은 상당히 젊은 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반드시 남해제일검이라는 호칭을 얻기 위해 싸울 게다.
수건으로 땀을 닦아 내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받아랏!”
애초에 알고 있었다는 듯이 노후량은 가볍게 날아드는 목검을 피해 냈다.
재차 목검이 빠르게 그를 노렸다. 그렇지만 한 발만 이용해서 그는 그 모든 공격을 피해 냈다.
장난 같은 그의 행동에 모습을 드러낸 어린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몇 번 더 성을 내면서 달려들었지만 노후량은 검을 피하며 손가락 하나로 아이를 제압했다.
엉덩방아를 찧은 아이는 머리를 움켜쥔 채로 그를 노려봤다.
“녀석, 또냐?”
“형은 비겁해!”
“뭐가 비겁하다는 거냐?”
“형은 나보다 키가 크잖아!”
나이 차가 열 살 이상 나니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후량은 아이를 들어 목마를 태우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그러니 좀 봐줘라, 현문아.”
“뭐, 형이 그리 말한다면 한 번은 봐주지. 헤헷.”
현문은 노후량의 어깨에 매달린 채로 웃음을 흘렸다.
비록 핏줄은 아니지만 남해파 내에서 둘의 사이는 형제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노후량의 어깨에 올라서 있는 현문이 말했다.
“형, 드디어 내일이네?”
“그래, 내일이 바로 이 형이 남해제일검이 되는 날이다.”
“웃기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현문은 자신을 안고 있는 노후량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자신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무에 뜻을 뒀다.
강하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어리지만 안다는 소리다.
“내기할까? 될지 안 될지?”
“좋아. 난 된다에 걸게.”
“뭐야?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날 이기고 싶으면 지든지.”
“하하!”
노후량은 어리지만 말을 당차게 하는 현문이 사랑스러운지 연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문이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어댔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웃으면서 해남파를 걷는 두 명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는 자가 있었다.
그가 획하니 몸을 돌리더니 급하게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해남파의 장로 중 한 명인 구환성의 방에 무인 몇이 모였다. 나이가 지긋한 자부터 해서 삼십대 초반 정도의 인물까지 있었다.
그들은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중년의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까지 노후량을 노려보던 사내다.
그가 거칠게 자리에 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 사내 하나에게로 향했다. 구환성이 분위기를 쇄신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했다.
“봉황검(鳳凰劍)이 어인 일로 그리 심보가 났는가?”
“어르신, 정말로 이대로 있어야 합니까?”
“무슨 말인가, 갑자기?”
“내일이 무슨 날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남해제일검을 뽑는 바로 그날입니다.”
“그렇지.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내일 그놈이 우승을 하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놈, 노후량만큼은 결코 남해제일검이 돼서는 안 되는 놈입니다. 그놈의 아비를 잊으신 겁니까?”
구환성이 허허 웃음을 흘렸다.
그가 슬쩍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한 명에게 손으로 신호를 했다. 그러자 그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구환성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들을 왜 모두 모았겠는가? 자네보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아네.”
“어르신, 그럼…….”
“큭큭, 노후량이 남해제일검? 웃기는 일이야. 그 꼴은 내가 못 보지. 암, 그렇고말고.”
노후량은 지금은 죽었지만 한때는 해남파의 중심에 있던 남해검왕(南海劍王) 노상준(盧上俊)의 아들이다.
만약 노후량이 남해제일검이 돼서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서게 된다면 지금 이들과 마찰을 빚게 될 게 분명하다.
자랄 싹은 애초에 확실하게 잘라 버리는 게 낫다.
더군다나 노상준을 죽게 만든 자와 자신들이 연관된 것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해남파가 시끄러워질 게다.
구환성이 모두를 바짝 모이게 하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 기회에 노가의 피를 완전히 끊어 버릴 생각이야. 더 이상 이 일로 고민하지 않도록 말일세.”
“과연 어르신입니다!”
봉황검이 입가에 절로 미소를 달면서 감탄성을 내뱉었다.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핀 구환성이 말했다.
“거사는 오늘일세. 오늘 부로 노가의 피가 끊길 게야. 껄껄!”
밤이 깊어졌다.
노후량의 발이 향하는 곳은 그의 연인이 있는 곳이다. 밤이 늦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녀를 보고 싶다.
약속된 장소에는 미리 그녀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