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144화 (144/200)

# 144

19화

“오셨군요.”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해남파 장로 중 한 명의 딸로 얼굴도 얼굴이지만 이런저런 재주가 많아 문파 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여인이다.

“영영, 오래 기다렸소?”

“아뇨. 저도 금방 왔어요.”

“거참,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늦어서 미안하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내일이 대회인데 쉬지 않으셔도 되는지요.”

배려심 깊은 여인이다.

이러한 세심한 부분까지 먼저 이야기하는 영영의 모습에 노후량은 반한 것이다.

그가 손을 내밀어 영영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내 반드시 남해제일검이 되겠소.”

“전 그저 몸 성히 돌아오시길 바랄 뿐입니다.”

“하하, 적어도 영영의 배필이 되려면 남해제일검 정도는 되어야 어울릴 것 아니오.”

“가가께서는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 말해 주니 힘이 나는군.”

그가 잡았던 손을 놓았다.

더 함께하고 싶지만 시간이 시간이다.

여인의 몸으로 너무 늦게까지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을 부모가 좋아할 리 없다.

더군다나 내일이 대회이다 보니 노후량 또한 최고의 몸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데려다 주리라.”

“아니요. 전 어차피 이곳에서 모퉁이만 돌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근처에 제 시비도 와 있고요. 걱정 마시고 먼저 가시지요.”

억지로라도 데려다 줄까 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잘 아는 노후량은 자신이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먼저 가겠소. 담에 만났을 때는 남해제일검이 되어 있을 게요.”

“꼭 그리 되시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그럼.”

가볍게 인사를 한 노후량은 몸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영영이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걸 알았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약속했다.

다음에 봤을 때는 남해제일검으로 그녀의 앞에 서겠다고.

그 전까지는 절대 뒤도 돌아보지 않으리라.

늦은 밤, 거처로 돌아오던 와중에 노후량은 누군가를 만났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자를 본 노후량은 반갑게 웃었다.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이냐?”

“내일 대회에 나가신다고 해서 잠시 왔습니다.”

두 살 아래의 사제로 평소에도 노후량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자다.

그는 반갑게 사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늦은 밤에 애써 찾아와 주고, 정말 고맙다.”

“저기…… 그런데 사형.”

사제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왔다.

그가 머뭇거리는 듯하자 노후량이 웃으며 재촉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말해 봐라. 나에게 말하기 어려운 게 어디 있느냐.”

“저와 잠시 대화 좀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요즘 고민거리가 있어서…….”

“지금?”

“예.”

“좋아, 그럼 조용한 곳으로 갈까?”

“제가 모시죠.”

비록 밤이 늦기는 했지만 노후량은 약간의 시간을 그의 사제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이렇게 늦은 밤 조심스럽게 찾아와서 꺼낸 이야기인 걸 보니 중요한 일이 분명하다.

어차피 잠 정도야 안 자도 그만 아닌가.

노후량은 사제와 가벼운 담소를 나누면서 걸었다. 그렇지만 해남파를 벗어나자 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무 많이 나오는 거 아냐?”

“사실 사형께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해남파 밖에 살고 있습니다.”

“호오! 설마 네 녀석, 여자라도 생긴 게냐?”

“하하! 보시면 압니다. 그 전까지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오냐. 대충 알겠다만 내가 모르는 척해 주마.”

웃으면서 노후량이 대답했다.

평소에 여인과 담을 쌓고 지냈던 사제가 이렇게 소개시켜 주는 사람이라면 분명 마음을 다 준 사람이 분명하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으슥하고 사람의 인적이 거의 닿지 않는 곳에 이르자 사제가 멈추어 섰다.

“사형,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제가 데리고 올 테니.”

“알겠다. 어서 갔다 오너라.”

“그럼.”

사제의 모습이 노후량의 눈에서 사라졌다.

노후량은 나무에 기댄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참 아름다운 하늘이다.

내일, 아니, 이제는 오늘이 몇 년간 기다려 왔던 바로 그날이다.

남해제일검이 되는 바로 그날이 눈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많은 고수들이 있지만 노후량은 자신을 믿는다.

그렇게 자신만의 상념에 잠겨 있던 노후량은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가깝게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웃고 있던 노후량의 표정이 점점 진지하게 변했다.

한둘이 아니다. 더군다나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좋은 목적은 아닌 것 같은데…….’

노후량은 나무를 등진 채로 자신의 검을 뽑았다.

그런데 막상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그의 사제였다. 노후량은 그제야 안심을 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주변에 이상한 자들이 나타나는군. 서둘러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사형, 죄송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가 갑자기 무엇인가를 확 뿌렸다.

가만히 서 있던 노후량의 눈에 그대로 알 수 없는 것이 들어가 버렸다.

“아악!”

눈이 타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엄습했다.

두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이 정체불명의 자들에게 둘러싸였음을 알았다.

“왜, 왜 네가……?”

“사형, 사형은 용이면 안 됩니다. 차라리 뱀이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터인데…….”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시끄럽군, 노후량.”

눈이 점점 가물가물해진다. 그렇지만 이 목소리는 그도 아는 것이다.

“……봉황검, 네놈이로구나.”

노후량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안다. 평소 노후량을 벌레 보듯 하던 봉황검이 틀림없다.

“하하, 이러한 상황에서도 나에게 덤비다니 용기가 넘치는구나.”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 당장 물러나라! 그러면 오늘 일은 말하지 않겠다!”

비록 나이 차는 조금 나는 편이지만 노후량 또한 봉황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음을 아는 탓이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노후량은 대충 아버지가 죽게 된 뒷배경에 대해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좋아할 수 없는 자다.

“말하지 않는다? 하하하! 가장 확실한 건 아예 그자의 입을 막아 버리는 거야. 이렇게 말이야.”

갑자기 무엇인가가 날아든다.

직감적으로 피해 냈지만 이내 주먹이 얼굴에 틀어박혔다. 눈이 아예 보이지 않으니 제대로 공격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는 그대로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얻어맞아야 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피한다고 피하긴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노후량이 쓰러지자 봉황검은 씩 웃었다.

기분이 좋다.

그토록 건방지던 놈이 지금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다.

머리를 발로 짓밟으며 침을 뱉은 봉황검은 옆에 있는 수하들에게 말했다.

“끌고 가.”

혼절했던 노후량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질질 끌려가고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반항도 하지 않았다.

아직 기절한 척하면서 그는 머리를 굴렸다.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지 말이다. 그렇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지금 도망치는 것도 무리다.

다리가 연신 바닥에 쓸리면서 고통스럽다.

미칠 듯한 고통이 점점 몸을 엄습해 온다.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오늘이 그토록 기다리던 바로 그날이다.

남해제일검이 되는 꿈을 꿨다. 그 꿈을 이루려는 날에 오히려 이 같은 일을 당했다.

많은 사람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개중에 둘의 모습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영영, 그리고 현문.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 주고 싶은 그러한 사람들이다.

어떻게든 이 난관을 타계하려고 하던 찰나에 갑자기 노후량을 끌고 가던 자가 그를 집어던졌다.

땅에 처박힌 노후량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토해 냈다.

“노후량.”

“…….”

“노후량!”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한다면 마지막 희망까지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계속 기절한 척하며 노후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몇 번 발로 걷어찼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봉황검은 입을 열었다.

“네놈이 지금 깨어 있든, 아니면 기절해 있든 상관없다. 잘 들어라. 네놈은 이제 죽을 거다. 이곳이 어디인지 네놈에게 보여 주고 싶은데…… 눈을 멀게 한 것이 안타깝구나. 이 공포를 직접 보여 주고 싶은데. 저놈을 일으켜 세워!”

봉황검의 명령에 두 명이 노후량의 양 어깨를 부축하고 일으켜 세웠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차가운 바람이 몸으로 느껴진다. 그제야 노후량은 이곳이 어디인지 대충 짐작을 했다.

천장단애(千丈斷崖).

높은 절벽이다.

차가운 바람이 직접 느껴지는 것은 분명 그 때문이리라.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바람을 느끼는 순간 노후량은 절망에 빠졌다.

떨어지면 죽는다.

운이 좋든 나쁘든 그건 정해진 답이다.

노후량의 귀에 봉황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이다, 건방진 애송아.”

지독하도록 잔인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가 노후량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죽은 척하면서 기회를 노리려고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끄는 순간 그의 몸은 이 높은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칠 게 분명하다.

단 한 번이다.

이 일격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노후량은 죽는다.

모든 힘이 손가락으로 모여들었다.

대체 무엇에 당하였는지 모르겠지만 눈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감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믿을 거라고는 날카로운 칼처럼 벼리어진 무인의 감각뿐이다.

‘난 남해제일검이 될 놈이다. 겨우 이런 일에 죽을 수는 없다.’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자들 모두 녹록한 상대가 아니다.

봉황검만 해도 해남파에서 알아주는 고수가 아니던가.

그렇지만 노후량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

끝났다는 생각에서 자신도 모르게 지닐 수 있는 방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 봉황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던져 버려.”

말을 마친 봉황검이 약간 멀어졌다.

‘지금!’

봉황검과의 거리가 약간 벌어진 지금이 노후량에게 오는 마지막 기회였다.

죽은 듯이 처져 있던 그의 몸이 갑자기 생기를 되찾았다.

“어?”

그를 잡고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이상한 징후를 느꼈는지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려 했다. 하지만 미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노후량의 일격은 매서웠다.

퍼억!

손가락이 양 옆에서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자들의 가슴에 박혔다. 손가락 끝에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잔혹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 노후량은 상대방에 대해 생각해 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다급했다.

죽여야 한다.

조금의 연민이 마지막 기회마저 영영 사라지게 할 게다.

움켜쥔 심장이 터져 버렸다.

아무리 강한 자도 심장이 없다면 살 수 없다. 둘은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봉황검!”

노후량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래, 쉽게 죽지 않는다 이거지? 하기야 이렇게 우습게 죽는다면 신룡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탕!

검이 뽑히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지금 노후량에게는 검이 없다.

사로잡힌 채로 두들겨 맞을 때 검을 빼앗겼다. 그는 방금 전 쓰러뜨린 자의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정겹게 느껴진다.

노후량은 검을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에 든 검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고, 오로지 여태까지 해왔던 걸 믿을 뿐이다.

“큭큭, 안 보이는 눈을 가지고 나와 상대라도 하겠다는 게냐?”

“시끄럽다, 봉황검! 내 눈이 비록 보이지 않는다 해도 너 따위에게 질 노후량이 아니다!”

분에 찬 목소리다. 갑작스럽게 끌려와 개처럼 당했다.

이렇게는 억울해서라도 못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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