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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145화 (145/200)

# 145

20화

등 뒤로 절벽 아래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바람이 느껴진다.

진퇴양난(進退兩難).

눈은 보이지 않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살길이다.

모든 신경이 앞에 서 있을 봉황검에게 쏟아졌다.

노후량이 검을 든 채로 서 있는 걸 보면서 봉황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습다.

죽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거리는 모습이 가련하게 느껴질 정도다.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말이 많구나.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넌 날 못 죽여. 너에게 나를 이길 기회는 평생 없을 테니까.”

“그런 게 싫었어. 언제나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턱도 없는 너의 그 자신감.”

나이는 열 살가량 차이가 나지만 같은 검을 드는 무인인 이상 동료가 아니면 적이다.

터벅.

봉황검이 한 걸음 다가왔다.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노후량은 상대가 점점 거리를 좁히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제대로 싸운다면 승산이 없다. 그리고 그걸 모를 노후량이 아니다.

단 한 번으로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하는 게다. 방심을 하고 있는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단 한 번의 공격 기회이다.

필살초다.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

해남파의 절기이자 노후량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무공이다.

남해삼십육검이 없었다면 해남파도 없다.

중원이 해남파를 두려워하는 것도 남해삼십육검 때문이다.

노후량이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마주 서 있던 봉황검 또한 마찬가지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노후량이 검을 든 채로 가만히 있자 봉황검이 움직였다.

탁.

첫 걸음이 땅에 닿는 순간 노후량의 머릿속에는 지금의 상황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다가오는 봉황검. 차가운 검의 예기까지도.

피한다.

그리고 검을 펼친다.

평소였다면 그리도 당연했던 일이거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완벽하게 피하려고 하면 무리다.

눈이 보이지 않는 지금 검을 피한다고 해도 재차 날아드는 공격을 막아 낼 자신이 없다.

차라리,

살을 주고 뼈를 친다!

노후량은 검을 피하려 들지 않고 어깨를 들이밀었다.

대담한 담력이다.

만약 약간이라도 그의 직감이 틀렸다면 심장이 관통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엄청날 정도의 고도의 집중력은 그를 살렸다.

어깨에 찌릿한 감각이 인다. 더불어 불쾌한 느낌이 치밀어 오른다. 검이 어깨에 박혔다.

노후량은 그대로 발을 앞으로 내질렀다.

앞에 서 있던 봉황검이 그 발길질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순간,

바다의 절대자라는 해룡(海龍)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봉황검의 안색이 확 변했다.

‘남해삼십육검이다!’

같은 남해삼십육검이라고 해도 펼치는 이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극쾌.

그리고 한 번, 한 번이 살을 베는 날카로움을 지닌다.

봉황검 또한 남해삼십육검을 잘 안다. 그렇지만 그가 펼치는 남해삼십육검은 이만한 위력을 담고 있지 않다.

신룡검 노후량의 남해삼십육검이 빼어나다는 건 안다. 그가 남해삼십육검을 펼치는 걸 숨어서 지켜본 적도 있다.

그때는 이렇지 않았다.

성난 파도처럼 쏟아지는 검세.

실력을 숨겼던 거다.

얼마 전 보았던 남해삼십육검이 지금과는 천지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간신히 피해 내는 봉황검은 온몸이 쭈뼛거렸다. 일격, 일격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만약 두 눈이 멀쩡했다면? 아니, 시야가 대충 보이기라도 했다면 봉황검은 이미 죽었다.

‘이놈은…… 지금 반드시 죽여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기회는 없어!’

카캉! 캉!

눈이 보이지 않는 자의 검이 무엇이 이리도 날카롭단 말인가.

보는 눈은 최대한 없는 게 낫다는 생각에 수하 둘만 데리고 노후량을 끌고 온 것이 실수였다.

다른 자들도 모두 데리고 왔다면 보다 쉽게 그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할 때가 아니다.

막 검이 봉황검의 턱을 가볍게 베고 지나갔다.

‘이놈이!’

더욱 화가 솟구쳤다.

이렇게 반쯤 제압한 상대에게 수세에 몰린다는 게 참 우습지 아니한가. 하지만 한 번 펼쳐진 노후량의 남해삼십육검은 멈추려 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눈이 보이지 않아서 날카로움이 없다는 거다. 절묘한 기회를 잡아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다.

봉황검은 막기만 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는 이상 결국은 허점이 드러날 게다.

그 기다림은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왔다.

‘옳거니!’

크게 휘두르면서 비어 버린 가슴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것을 놓칠 정도로 무능력한 자가 아니다. 봉황검은 그대로 가슴 쪽으로 검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 순간 노후량의 감긴 눈이 꿈틀했다.

기다렸다, 봉황검의 검이 자신에게 파고드는 그 순간을.

번쩍.

노후량의 검이 움직였다.

극쾌라는 말이 아니면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다.

반쯤 검을 밀어 넣었던 봉황검은 그제야 자신이 속았음을 알아차렸다.

남해삼십육검 중 마지막 초식인 해저발침(海底發針)이다.

피할 수 없다.

‘끝…… 이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피잉!

질풍이다. 그런데…….

스르륵.

봉황검은 믿기 어려웠다.

자신이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옆에 길게 늘어뜨렸던 봉황검의 머리카락이 떨어져 내린다.

그렇다.

노후량의 검이 빗나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미세한 차이로 옆 머리카락을 베었을 뿐이다.

놀라움도 잠깐, 비어 있는 노후량의 가슴을 향해 재차 검을 휘둘렀다.

급히 뒤로 물러서기는 하였지만 너무나 가까웠다.

그의 가슴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노후량은 가슴을 손으로 움켜쥔 채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입가에 허무한 미소가 걸렸다.

가슴을 베고도 봉황검은 잔뜩 굳은 상태다. 방금 그 일격이 아직도 머릿속을 맴돈다.

눈만 멀쩡했다면 머리카락이 아닌 머리가 떨어져 나갔을 게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봉황검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 이 쥐새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봉황검이 발로 다시금 상처를 걷어찼다.

“우욱!”

가슴에서 더욱 많은 양의 피가 쏟아져 내렸다.

싸움은 끝났다.

이제는 손을 들 힘도 남지 않았다.

뒷걸음질 치던 노후량이 멈추어 섰다. 발뒤꿈치에 아무런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절벽이다.

다시금 이곳까지 밀려오게 된 거다.

쨍그랑!

검을 놓쳤다. 그것은 곧 싸움이 끝났음을 이야기했다.

가슴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피가 손을 타고 흘러내려 땅을 적신다.

귀가 멍해진다.

앞에서 봉황검이 뭐라고 떠들기는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들리지 않는다.

아니, 지금 그러한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참 우습다.

그토록 강해지려고 악을 썼다.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곧 있을 대회에서도 우승해 남해제일검이라고 불릴 꿈까지 꿨다.

꿈이었다.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헛된 꿈을 이십 년가량 꾸었던 게다. 이렇게 죽게 될 거면서 참 우습지 아니한가.

노후량은 봉황검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날카로운 살기도 느껴진다.

진득한 살기. 그는 이번 공격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고 하는 거다.

찰나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오간다.

피한다고 해도 결국 답은 하나다.

서서히 다가오는 검.

이런 놈의 손에 죽을 바에는…….

‘행복하시오, 영영. 남해제일검이 될 거라 큰소리만 치고 이렇게 가게 된 나를 용서하시오. 미안하구나, 문아. 네가 크는 걸 보지 못하겠구나.’

모든 걸 포기한 게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다른 자도 아닌 봉황검에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 죽을 바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게다.

그의 발이 땅을 박찼다.

몸이 허공을 난다.

붕 뜬 몸이 점점 뒤로 눕혀진다.

천천히, 그리고 끝없이 떨어져 내려간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의 몸이 끝없는 나락으로 사라져 간다.

그렇게 떨어져 내리던 와중에 그는 엄청난 충격을 등으로 느끼며 그대로 혼절했다.

부글부글.

귓가로 무엇인가를 끓이는 소리가 들린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다. 뭔가 기억이 날 듯도 한데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닌데 몸은 꼼짝도 안 한다.

‘오늘은 남해제일검을 뽑는 날인데…….’

마음은 조급하거늘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토록 기다리던 오늘을 이렇게 버리나 하는 마음에 노후량은 가슴이 답답했다.

악몽이라도 꾼 걸까?

기분이 좋지 않다.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힘에 겨워 그는 포기하고야 말았다.

점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가만히 굳어 있던 노후량의 머리가 갑작스럽게 엄청난 충격에 의해 흔들렸다.

“커, 커억!”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머리통은 깨질 것처럼 아파 온다.

고통을 못 이기고 신음 소리를 토해 내던 노후량의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그렇다. 지금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깨질 듯하던 고통이 사라졌지만 그의 머리는 잠시 잊고 있다가 기억해 낸 사실들 때문에 더욱 달아올랐다.

잠시 충격으로 잊고 있었다.

노후량은 봉황검에게 당해서 스스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런데 지금은 대체 죽은 것일까, 아니면…….

‘엄청난 높이였을 게야. 봉황검이 나를 던지려 했던 걸 보면 그건 분명해.’

살기 힘들었을 높이였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 그는 죽은 것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감각이라는 게 남아 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깨, 깨어났나, 나요?”

더듬거리는 목소리.

여인이라는 것도 간신히 알 정도로 심하게 갈라진 목소리다.

“으, 으으…….”

대답을 하고 싶지만 나오는 것은 목소리가 아닌 신음 소리다.

죽은 건 아닌 모양이다.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대체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모르겠다. 그리고 그건 지금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그러한 문제도 아니다.

어떻게든 눈을 떠야 앞이 보이련만 아직 시야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만 하는 신세인 것이다.

남해제일검을 뽑는 대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영과 문이가 걱정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분명 그들은 자신이 죽은 줄 알게다.

남해제일검을 뽑는 그날을 그토록 오래 기다려 왔거늘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아니, 아니다.

이렇게 산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봉황검에게 복수를 할 기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분노로 머릿속이 차갑게 변했다.

다시 돌아가는 그날, 결코 참지 않을 게다.

지금의 이 수모, 배 이상으로 갚아주기 전에는 결코 이 화가 식을 것 같지 않다.

몸이 움직이지 않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고 그는 믿었다.

옆에서 다시금 여인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를 먹은 노파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눌하면서도 뭔가 부정확한 발음을 보아하니 몸이 불편한 여인 같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는 게 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 여인의 심성이 무척이나 고울 거라는 것 정도는 말이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대답 대신 노후량은 신음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큭, 크윽.”

“어, 어어.”

여인은 당황스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로 허둥지둥 거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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