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21화
머리에 갑자기 차가운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물수건인 듯하다.
차가운 물수건이 머리에 얹어지자 뜨겁게 달아오르던 몸이 점점 식어가는 느낌이다.
점점 나른해지는 몸.
노후량은 천천히 다시금 정신을 놓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제대로 된 구실을 하기에 상당히 손상된 모양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다시금 정신을 차렸지만 몸이 상당히 무겁다. 그렇지만 죽을힘을 다하자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척추 부근의 감각이 없기에 혹시나 했지만 불구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미세하기는 하지만 온몸의 신경이 미세하게 살아 있다.
내공이 돈다.
막혀 있던 기혈이 하나둘씩 뚫리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막힌 혈도를 뚫기 위해 몇 번이나 내공이 거세게 움직였다. 당연히 몸 안에서 무엇인가 터진 듯이 충격을 받고 꿈틀댔다.
“어어!”
잠시 잊고 있었던 어수룩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렇지만 지금 그 여인의 행동에 신경 쓸 기력은 없다.
몸속에서 꿈틀대는 내공이 사방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 내공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다. 어떻게든 이 내기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울컥!”
피가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온다.
다급하게 쏟아지는 피를 누군가가 닦아 낸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 여인인 게 분명하다.
미칠 듯이 꿈틀대던 노후량의 몸이 천천히 제 상태로 돌아왔다.
“헉헉!”
그의 숨이 거칠다.
내공이 제자리를 잡고는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아직 완벽하게 내공의 운기가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막혀 있던 기혈도 모두 뚫었다.
바로 지금은 무리지만 조만간 예전처럼 움직이는 것도 가능할 게다.
“어, 어째.”
여인의 목소리는 다급함으로 가득 찼다.
그때 노후량이 입을 열었다.
“……고맙소.”
작은 목소리였지만 여인은 노후량의 목소리를 들은 듯하다. 허둥대던 여인이 멈춘 채로 가만히 서 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은혜는 꼭 갚겠소.”
“아아.”
제대로 대답도 못한 채로 여인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연신 내뱉어댔다.
처음이 아닌 탓에 노후량은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그가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요?”
“저기…… 그, 그게…….”
제대로 집중을 하지 않으면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로 어눌하다.
그렇지만 노후량은 웃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이든 상관없다. 그에게 이 여인은 고마운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도중 무엇인가에 걸린 듯하다. 운이 좋아 살게 된 것은 그 때문이리라.
그렇게 반쯤 죽은 그를 데리고 와서 치료해 준 여인이다.
“이름이…….”
“계…… 화.”
“계화라…… 아름다운 이름이오.”
“…….”
여인이 침묵한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숙연하게 변했다.
“난 노후량이라고 하오. 실례지만 혹여 나이가 많으시오? 눈이 보이지 않아서 그러오.”
“아, 아뇨.”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다.
분명 나이가 많은 사람 같지는 않다.
노후량은 애써 누운 자세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어떻게든 몸 상태를 최대한 빠르게 낫게 하고 싶다.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몸 상태가 회복이 돼야 가능한 일이다.
몸은 그렇다고 치지만 눈이 도통 떠지지 않는다.
노후량은 어떻게든 시야를 회복해 보고자 내공을 눈 쪽으로 움직였다.
그렇지만 무엇에 막힌 것처럼 내공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다시금 상기했다.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갔고, 갑자기 사방이 캄캄하게 변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독?’
독이 분명하다.
어떠한 독인지는 그쪽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노후량이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자신이 독에 중독됐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힘들게 되었어.’
독이라면 치료하는 것도 상당히 까다로울 게다.
그때 그의 다리 위로 무엇인가가 올려졌다.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머, 먹어요.”
“고맙소.”
계화라는 여인이 먹을 것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렇지만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다.
거기다가 눈도 보이지 않아 음식이 정확하게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는 음식을 집으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음식을 들어 올리는 게 가능할 턱이 없다. 그때 계화가 그가 잡고 있던 젓가락을 낚아채더니 이내 먹을 것을 들어서 입에 가져다 댔다.
처음엔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그는 입을 벌렸다.
지금은 이런저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몸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식사를 걸러서는 절대 안 된다.
어떠한 것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계화에게 입고야 말았다.
반드시 보답하리라. 노후량은 계속해서 그녀가 떠주는 음식을 먹었다.
그날부터 한 달가량이 지났다.
이제 움직임은 전혀 불편함이 없다. 그리고 아예 보이지 않던 시야도 점점 회복되고 있다.
완전하게 보이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라면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연 시야.
노후량이 검을 뽑았다.
스르릉.
손가락 끝에 걸린 채로 뽑히는 검신이 이내 찬란한 빛을 토해 냈다.
그의 발이 움직인다. 일 보가, 다시금 일 보가.
차라랑!
검신이 부르르 떨리며 사방으로 자신의 위엄을 뽐내는 듯하다.
그때,
“우욱!”
그가 무릎을 꿇었다.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내기가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처럼 거동은 가능하지만 무공은 무리다.
내장이 상해서다.
몸 안에 있는 오장육부가 모두 비틀렸다. 내기가 제대로 움직이기가 힘들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후량은 다시금 일어나 검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주저앉아 있고 싶지는 않다.
미칠 듯이 검을 휘두르려던 그가 멈추어 섰다.
근방에 누군가가 있다.
노후량이 웃으면서 말했다.
“계화, 거기 있는 거 다 아오.”
뒤쪽에서 한 여인이 걸어나온다.
시야가 어느 정도 회복된 후 처음 그녀를 보게 된 날 노후량은 상당히 놀랐다.
얼굴이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일그러진 여인이다.
말도 더듬거리는 것이 한눈에 봐도 그리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당황스러웠지만 노후량은 그녀를 웃으면서 바라봤다. 그에게 그녀는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시, 식사하셔야죠.”
그녀는 말을 할 때 한 번쯤 더듬거리면서 어눌하게 말을 시작한다.
그것도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이다.
노후량은 방으로 들어가서 계화가 준비해 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집은 상당히 초라하다.
반찬 또한 어디서 먹다 버린 듯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해남파의 후기지수로 이름 높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그러한 걸 언제나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 노후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시간을 끌었다.
혼절했던 시간까지 하면 벌써 이십 일이 넘게 흘렀을 게다. 지금 해남파는 자신이 사라진 걸로 인해 발칵 뒤집혔으리라.
“어딜 갔다 와야겠소. 조만간 은혜를 갚으러 돌아오리라.”
“……그, 그래요.”
그는 가볍게 목례로 답한 후, 밖으로 걸어나왔다.
비록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 정도라면 해남파로 가는 데 무리는 없다.
시간이 느지막한 저녁에 다다르고 있다.
일부러 이 시간을 택해 그는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노후량은 힘이 없다.
무공도 되찾지 못했으니 봉황검의 눈에 띄면 죽게 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들에게 시간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무리하게 몸을 이끌고 해남파로 향하기로 마음을 정한 게다.
가장 먼저 장문인을 만나야 한다.
지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장문인뿐이다.
자신이 당한 일을 그에게 말하고 도움을 요청할 생각인 게다. 분명 장문인이라면 어떠한 답이라도 내려줄 게다.
산의 경사는 꽤나 급했다.
내공의 운기가 불가능하고 부상까지 있으니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보다도 움직이는 것이 힘겹다.
“헉헉!”
잠시 나무에 기댄 채로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이라는 걸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내공은 있지만 그 힘을 쓸 수가 없다.
‘큭큭, 나도 참으로 비참해졌구나. 하지만 봉황검 네놈 또한 이제 지옥을 보게 될 거다.’
그가 다시금 힘겹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계속해서 흐른다.
해가 지고, 이제는 날씨마저 선선하다.
거칠게 산을 올라서던 그의 눈에 마침내 해남파가 들어왔다. 그렇지만 그는 정문이 아닌 옆으로 움직였다.
지금은 눈 상태가 엉망이다.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문을 지키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운이 나쁘다면 봉황검 쪽의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면 일은 실패다. 장문인을 만나는 대신 노후량은 검에 찔리고 말게다.
애초에 노후량은 담을 넘을 생각이었다. 그는 해남파를 잘 안다. 그는 능숙하게 몸을 숨기며 이동했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감각은 살아 있다.
혹여 누군가가 다가오지 않을지 주변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그는 해남파의 담에 몸을 기댔다.
노후량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공을 움직여 경공을 펼쳐야 한다. 분명 그 이후에 엄청난 고통이 엄습할 테지만 단 한 번이면 된다. 내공을 천천히 움직여 용천혈 주변으로 향하게끔 했다.
그리고 일순 내공을 폭발시켰다.
그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단숨에 담장이 노후량의 발 아래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발이 지면에 닿았다.
“큭.”
가슴을 움켜쥔 채로 노후량이 무릎을 꿇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급히 땅을 굴러 나무 뒤로 몸을 감췄다.
고통이 온몸을 엄습했다.
그렇지만 노후량은 그 고통에도 끝끝내 신음 소리를 토해 내지 않았다.
그렇게 일 각 정도 호흡을 고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밝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 한다.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능숙하게 움직였다. 이십 년 가까이 살아온 곳이다.
이곳 내부의 지리는 눈을 감아도 선할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문인의 거처는 해남파 중앙 쪽에 있다.
최대한 태연하게 그는 장문인의 거처로 향했다. 새벽이 깊어서인지 해남파 내부에서는 딱히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 몸을 숨기는 것만으로 노후량은 장문인의 거처에 도착했다.
그렇지만 그가 향한 곳은 장문인의 거처가 아닌 바로 그 옆에 있는 자그마한 건물이다.
노후량은 알고 있다.
이 늦은 시간이라고 해도 장문인은 언제나 이 건물에서 많은 책에 빠져 산다는 걸 말이다.
만약 장문인이 거처에 있다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곳은 많은 무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노후량으로서는 잠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저 믿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고서적이 가득한 건물로 다가간 노후량의 안색이 환하게 변했다.
눈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환하게 켜진 건물의 불빛을 못 볼 리가 없다.
분명 이 안에 장문인이 있다.
현재 해남파의 장문인인 곽문이.
그는 조심스럽게 건물 앞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 그가 이르자 안에 있는 사람이 움직임을 멈췄다.
노후량이 입을 열었다.
“노후량입니다.”
“……!”
안에 앉아 있는 자의 몸이 움찔하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는 이내 안에서 인자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노후량이 잘 알고 있는 장문인의 목소리다.
“살아 있었구나.”
“예.”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노후량은 앞에 있는 자에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흐릿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곽문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