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147화 (147/200)

# 147

22화

“죽은 줄 알았다.”

“운이 좋았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밤을 틈타 나에게 찾아온 이유가 있을 법하구나.”

과연 장문인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단번에 그는 지금 노후량이 당당하게 해남파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장문인께 고할 말이 있습니다.”

“말하거라.”

“제가 사라진 그날 저는 봉황검과 그의 수하들에게 암습을 당했습니다.”

“봉황검이?”

사뭇 놀란 어조다.

당연하다.

얼마 전에 갑작스럽게 신룡검 노후량이 사라진 일은 해남파를 시끄럽게 했다.

그러한 일의 원흉이 해남파 내부의 인물이자 꽤나 이름이 알려진 봉황검이라는 말에 놀랄 만도 하다.

“그가 독을 하독해 제 눈을 못 쓰게 한 후 저를 제압했습니다. 봉황검의 손에 죽기 싫었던 저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지요. 그리고 운이 좋아 이토록 살게 되었습니다.”

“천운이야.”

하늘이 보살펴 주지 않았으면 절대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곽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머리는 꽤나 복잡한 상태다.

그때 노후량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벌하여 주십시오.”

“……량아.”

“예.”

“미안하구나.”

“무슨……?”

장문인만 만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고 믿은 노후량이다. 그렇지만 그의 반응은 예상외로 담담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장문인 곽문이 말했다.

“그를 벌하기 힘들 듯하구나.”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노후량은 당황했다.

비겁하게 같은 사문의 인물을 암습한 자다.

엄벌을 내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벌을 하기 힘들다니? 도대체 장문인이 왜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 지금 내공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태고, 눈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같은 사문의 인물을 이리 만든 자입니다, 장문인!”

“목소리를 낮추거라. 잘못하면 네가 이곳에 온 것이 발각될지도 모르니까.”

“이유를……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왜 그를 벌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

장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분노보다는 허탈함이 밀려온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봤다. 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혹시 해남파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이곳을 떠나거라.”

“그 말씀은……?”

“이제 넌 더 이상 해남파의 무인이 아니다. 난 널 못 본 것으로 할 터이니 어서 떠나거라.”

“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일투성이다.

왜 해남파를 떠나야 한다는 것인가? 이 같은 일을 바라고 해남파로 돌아온 게 아니다.

“왜 제가 떠나야 합니까? 잘못을 저지른 건 제가 아니라 바로 봉황검 그자란 말입니다!”

“알아. 너한테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아시면서 대체 왜……?”

“너무 늦었어. 나타날 거면 보다 빨리 나타났어야지. 지금은 이미 모든 게 끝났어.”

곽문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아직 해가 뜨려면 한 시진가량 시간이 남아 있다.

“서둘러라. 해가 뜨면 도망치기 더 힘들 테니까.”

“제가 왜 갑니까? 전 해남파로 돌아온 겁니다. 결코 외부인이 아닙니다.”

“……영영이 시집을 갔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영영이 시집을 가다니요?”

“말 그대로야.”

노후량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의 연인이자 평생을 지켜 주기로 약속했던 여인이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떠났다.

“어디로……?”

“백씨세가. 자네가 죽었다고 생각한 영영의 아비가 급하게 백씨세가와 혼인시켰지.”

평소 영영의 아버지인 영진적은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노후량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급하게 백씨세가와 혼인을 시킨 모양이다.

“자네가 죽었기에 백씨세가 또한 영영을 받아들였지. 자네와 영영의 사이를 모르는 이는 해남도에 없으니. 누가 사내가 있는 여인을 좋아하겠는가. 이런 마당에 자네가 나타나면…… 그녀의 인생도 우습게 돼. 그러니 네가 양보하거라. 어차피 넌 해남파가 아니라도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 여인은 달라.”

다른 이도 아닌 영영의 일이 얽히자 노후량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이 감돌았다. 엄청난 충격에 입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의 여인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다른 남자의 아 내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노후량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끝끝내 참아 냈다.

“그게 다입니까?”

“……무슨 소리인가?”

“정말로 제가 죽은 걸로 하려는 것은 그게 답니까?”

“허허.”

공허한 웃음.

더 이상 노후량은 이곳에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했고 사랑했던 해남파가 이제는 그에게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자신은 해남파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해남파는 그를 버리려고 한다.

더 이상 노후량은 해남파의 무인이 아니다.

밖으로 걸어나온 그가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그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게 또렷하다.

웃고 있던 영영의 모습.

아름다웠던 그녀의 미소.

그리고 다시금 어둠이 찾아온다.

그가 멀어지고 있다.

해남파의 기재였고, 또한 해남도의 이야깃거리였던 한 인물이.

곽문은 착잡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고 있다. 사실 곽문은 노후량에게 몇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다.

아직 영영이 시집을 가지 않았다는 게 바로 그 첫째다.

그녀는 삼 일 후에 백씨세가와 혼약을 맺기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지금 해남파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게 그 혼약을 파기하기도 힘든 것이다. 더군다나 영진적은 노후량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빼어난 무공을 지닌 그이지만 그걸 제하고는 아무런 것도 내세울 게 없다.

지금 해남파는 두 개의 패로 나누어진 상태다.

장문인을 따르는 패거리와 구환성을 위시한 자들이다.

봉황검은 구환성의 수하 중 하나다.

지금 잘못해서 봉황검을 건드렸다가는 큰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지금 두 패거리는 한 사람을 자신들의 편으로 영입하기 위해 암중으로 혈투를 벌이고 있다.

그게 바로 영진적이다.

그의 힘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이 두 세력의 싸움도 결판이 날 거다.

그런 지금 영진적을 적으로 돌린다면?

해남파의 장문인인 곽문은 자리에서 밀려나고야 만다.

그랬기에 거짓을 말했다.

미안하고, 분명히 후에 후회할 거라는 걸 알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의 선택이다.

‘어쩔 수 없구나.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킨 것에 네가 그 소가 된 것을.’

곽문은 고개를 돌리며 창문을 닫았다.

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

노후량은 정처 없이 걸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영영이 떠났고, 자신이 다시 해남파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

그건 곧 자신의 모든 걸 잃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쏴아아!

아, 이게 무슨 처량한 일이란 말인가.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이 소나기가 쏟아져 내린다. 흠뻑 젖으면서 노후량은 계속해서 걷기만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봉황검에게 복수는 해야겠는데, 지금 와서 복수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계속해서 걷기만 하던 노후량은 앞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낯이 익은 곳이다.

초라한 건물,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여인의 모습.

“우, 우우.”

그렇다. 노후량은 자신도 모르게 계화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흘리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노후량은 웃는다. 그의 입이 열렸다.

“돌아왔소.”

* * *

“참으로 우스운 일이야.”

“…….”

현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노후량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만 알았지 그 배후에 있었던 일은 전혀 모르는 그다.

해남파가 그 같은 일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난 이야기지. 그리고 지금 난 너의 눈앞에 악면삼귀의 하나인 일귀로 서 있는 거지.”

“하지만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해야 했소? 형님이라면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하려고 했지. 내가 속았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속다니 뭘 말이오?”

“내가 장문인을 찾아간 그날 그녀는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더군. 아마 백씨세가와 해남파의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두려워했던 거겠지. 그 외에 그녀의 아버지 일도 있었고.”

그 사실을 안 것은 계화와 혼인을 한 지 무려 오 년이 지나서다.

그때 노후량이 느꼈던 분노는 보통이 아니었다. 장문인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도 치밀었다. 봉황검과 모두가 한패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노후량은 놓았던 검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악면삼귀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차가운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는 이게 끝이다. 왜 내가 악면삼귀가 되었는지 이제 알겠느냐?”

더 들을 것도 없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가 느꼈던 분노를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곽소정은 침울한 표정으로 노후량을 바라보았다.

곽문이라면 그녀의 할아버지다.

곽소정이 태어나기 무섭게 죽어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핏줄은 핏줄이다.

마치 그녀 자신이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다.

“형님, 그렇다면 십 년 전 봉황검이 죽었던 건…….”

“원한 때문이지.”

악면삼귀를 대대적으로 잡으려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해남파의 고수 중 하나를 죽이면서부터 시작됐다.

그게 바로 봉황검이었다.

단순히 청부 살인이거나 싸움이 붙었다고 판단을 내렸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몇 십 년을 내려오는 원한이었던 게다.

해남파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놈, 죽기 직전에 날 알아보고 살려달라고 막 빌더군.”

회상이라도 하는 듯한 어조다.

“그런 멍청한 놈 하나 때문에 내 인생이 이리 되다니…… 우습지 않으냐.”

“형님…….”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이제 그까짓 일로 괴로워하지 않으니까. 이제 당하고만 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해남파에게 버려진 자의 무서움을 보여 주겠다.”

그의 시선이 곽소정에게 박혔다. 눈도 감고 있어서 정말로 그녀를 바라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곽소정은 노후량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소름이 오싹 돋는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갈지혁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크크크.”

낮게 웃음을 흘린 그는 현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또 궁금한 게 있더냐?”

“없소, 형님.”

“그럼 난 가도록 하지. 앞으로 내 앞을 막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구나.”

“형님!”

아무리 잔인해지려고 마음먹었지만 현문에게만큼은 그러기 힘든 모양이다.

해남파에 그가 남긴 마지막 인연이 바로 현문이기 때문이다.

현문은 어떻게든 노후량을 잡고 싶었다.하지만 도대체 지금 어떠한 말을 내뱉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어떠한 말이 이처럼 딱딱하게 얼어 버린 노후량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네 눈, 아직도 보이지 않나?”

그때 현문의 발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갈지혁이다. 그의 목소리가 노후량을 멈칫하게 했다.

“아직도 눈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더 이상은 눈이 없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원한다면 한번 봐주지.”

“……무슨 속셈이냐?”

“별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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