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23화
노후량의 이야기가 마치 자신의 과거를 듣는 듯해서 마음이 동했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그러한 말을 하지 않았다.
내심 그의 말에 혹하기는 했지만 그런 속내를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갈지혁은 지금 노후량에게는 적이다. 적에게 이런 호의를 받는다는 게 꺼려지는 것이다.
“너무 오래됐어. 네가 아무리 독에 능해도 치료할 수 없을 게다.”
“독이었다면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 한들 문제없다.”
“만약 네가 손을 봐줘서 내 눈이 낫는다면…… 넌 더 최악의 상대와 싸워야 할 거다, 진정한 남해제일검과.”
“네가 눈이 멀쩡하든 아니든 넌 내 상대가 아니야.”
담담한 어조.
무뚝뚝하지만 그 안에는 강인함이 숨겨져 있다.
‘대단한 놈이로군.’
노후량은 내심 감탄했다.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결코 자신의 말을 쉽게 어길 자는 아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노후량이 갈지혁에게 다가갔다.
곽소연이 그의 소매를 급히 잡았다. 잠시 시선을 돌리던 갈지혁이 이내 소매를 잡아 뺐다.
“이봐요, 조심해요.”
가까이 다가서는 갈지혁에게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근히 그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 갈지혁은 손을 뻗어 노후량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가만히 선 채로 있던 노후량이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네놈의 심장을 뚫어 버릴 수도 있다.”
“말하지 마라. 말을 하니까 얼굴 형태가 자꾸 변하잖아.”
협박 어린 말을 내뱉던 노후량이 오히려 면박을 당했다. 그는 입을 다문 채로 갈지혁의 손이 움직이는 그대로 몸을 맡겼다.
이리저리 눈을 살피던 갈지혁이 물었다.
“햇빛은 보이지 않나?”
“조금. 밝은 빛이 쏟아지는 것 정도는 느껴진다.”
“그렇군.”
말을 마친 갈지혁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검게 물든 것이 죽어 있는 생선의 눈알을 본 기분이다.
“안룡액(眼龍液)에 당했군.”
“안룡액?”
생소한 이름이다.
물론 독에 대해 공부를 한다고 해 봤지만 겉핥기 식의 지식밖에 얻지 못했다.
“기능을 마비시키는 독이다. 네 눈은 그 독에 당했어. 치료가 불가능한 극독은 아니지.”
“……치료가 가능하다는 소리인가?”
“물론.”
비록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이 독은 치료가 가능하다.
병이 아닌 독이다.
신경이 완전히 마비된 것이 아니니 눈을 살리는 건 가능하다. 갈지혁이 말했다.
“문제는 지금 당장 치료가 가능한 건 아니야. 약을 만들어야 하니까. 보름 후, 그때 내 앞에 와. 그럼 약을 건네줄 테니.”
“해남파로 들어갈 시간을 벌려는 속셈인 게냐? 그 안이라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 또한 해남파의 인물이라 그곳의 지리는…….”
“헛소리하고 앉아 있군. 너는 지금이라도 마음먹으면 죽일 수 있어. 못 믿겠나?”
“큭큭큭.”
이놈은 지금 농담을 하고 있지 않다. 솔직히 말해 아까 손을 겨루어 봤을 때 내심 당황했다.
독을 쓰는 자라고 해서 다가가 승부를 보려 들면 금방 끝날 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용케 모든 공격을 피해 낸다. 그리고 공격 한 번 한 번이 만만치 않다.
거기다가 독까지……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인 건 분명하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마. 하지만 지금 내가 너에게 이런 약속을 해서 시간을 벌 필요가 없다는 것만 알면 된다.”
“…….”
“그럼 이만 가보지.”
말을 마친 갈지혁이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돌리자 곽소연이 현문과 갈지혁을 번갈아 바라봤다.
현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선은 시간이 생긴 것이다.
보름 후 해남파를 찾아올 때까지 많은 걸 생각해 둘 수 있다. 어떻게든 그를 해남파로 돌아올 수 있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머뭇거리던 곽소정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
“너무 미안해요. 그러니까…….”
말을 마치지 못하고 그녀는 고개를 꾸벅하더니 갈지혁의 뒤를 쫓았다.
곽소정이 어떠한 행동을 취했는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알고 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더니 사라졌다.
“형님, 이야기는 그때 다시 했으면 하오. 그렇지만 전…… 형님이 이렇게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형님은 예나 지금이나 해남도의 전설이니까. 기다릴 거요. 그럼.”
말을 마친 현문 또한 사라져 간다.
노후량은 멍하니 선 채로 멀어져 가는 그들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오랜만에 들었던 한마디가 아직도 노후량의 마음을 찌르르하게 울린다.
해남도의 전설.
‘그래, 사람들은 나를…… 그리 불렀지.’
이튿날, 아침이 조금 지나 말을 빌리러 갔던 자들이 나타났다. 운이 좋아 그들은 말 몇 필을 빌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열 명가량.
거기에 갈지혁을 비롯한 수뇌부까지 해도 채 열다섯이 안 되는 숫자다.
거기에 부상자는 멀리까지 이동시킬 수도 없는 처지다.
부상자를 옮길 세 명가량을 두고 간다고 계산하면 움직이는 인원은 대략 열 명 정도에 불과하다.
마부석까지 모두 채운 두 대의 마차만 움직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제는 멈추지 않고 해남파로 곧장 달릴 생각인 것이다.
또 어떠한 방해가 있을지 모르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 정비를 할 시간은 없다. 막문환이 소리쳤다.
“두 대의 마차는 해남도로 직진한다! 남은 세 명은 부상자를 모두 치료받게끔 하고 서둘러 해남파로 복귀하도록! 이상이다!”
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이 마차는 여전히 같은 인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현문뿐만이 아니라 곽소정 또한 그리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
어제의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이리된 것이다.
막문환은 답답했다.
대체 현문이 악면삼귀의 일귀와 어떤 사이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그렇지만 입장이 입장이다 보니 그는 침묵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그때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있던 현문이 입을 열었다.
“정말…… 치료할 수 있는가?”
“거짓말은 하지 않소.”
“하지만 무려 몇 십 년이나 보이지 않았던 눈일세. 혹여 기대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게 깨지기라도 한다면…….”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기대를 가졌다가 깨졌을 때의 상실감은 보통이 아닐 게다. 예전에도 그러한 경험을 가졌던 노후량에게 다시금 그런 일을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 정도로 무너진다면 그게 한계인 자겠지.”
“너무한 것 아닌가?”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오?”
“그건 아니지만…….”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불안한 모양이다.
갈지혁은 관심 없다는 듯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해남파에 도달할 것 같은 기분이지만 아직 거리가 남았다.
갈지혁과 일귀는 거래를 했다.
물론 일방적인 통보를 한 것이고, 상대편은 듣기만 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다.
“올 거라 생각하는가?”
“물론. 그자는 눈을 가지고 싶어했거든.”
“자네 말대로 됐으면 좋겠군. 어쨌든…… 고마우이.”
현문이 감사의 뜻을 내비치자 갈지혁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어차피 현문이 부탁해서 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감사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마차는 계속해서 달린다.
해남파는 멀다.
해남파(海南派).
해남도(海南島) 여모봉(轝母峰)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해남도에 뿌리박은 문파이기도 하다.
해남파 무공의 정수는 쾌(快)와 일반 무공의 상리에서 벗어난 기이함에 있다.
그들의 무공은 기이하면서도 강인하다.
마차에서 내린 열 명의 인원은 산을 타고 움직이고 있다.
익숙한 길을 걷는 그들의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이 역력하다.
이곳은 여모봉이다.
한마디로 해남파의 힘이 미치는 구역이라는 것이다. 이곳까지 온 이상 그날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게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해남파요.”
막문환은 잠시 쉬던 중에 위를 바라보는 갈지혁에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면삼귀의 기습 이후 딱히 백씨세가의 움직임은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악면삼귀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판단에 그 이후의 것을 준비하지 않은 듯했다.
악면삼귀가 그들을 놔두었으니 해남파까지는 일사천리로 달려왔다.
여태까지 노후량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곧 그가 눈을 치료하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소리다.
며칠 후면 노후량이 해남파에 은밀하게 찾아올 게다.
그 전까지 갈지혁은 안룡액이라는 독을 해독할 것을 만들어 낼 것이고, 현문은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리려 들 게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현문은 생각했다.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니까. 평생을 뒤쫓고 싶었던 그런 사내니까 말이다.
“그만 움직이죠.”
자리에 앉아 쉬고 있던 곽소정이 말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남파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 길을 계속 올라가니 커다란 건물이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감회에 가득한 얼굴로, 갈지혁은 관찰하듯이 그 건물을 바라봤다.
건물은 정교했다.
그리고 웅장했다.
해남도에서 뿌리 깊게 박힌 문파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건물에서조차 강대한 위엄이 느껴진다.
문 위에 걸린 해남파라는 글씨는 흡사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댄다.
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근시일 내로 장문인의 딸인 곽소정이 돌아온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데리러 갔던 막문환이 나타났다. 나타난 여인이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다.
여섯 명에 달하는 무인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었다.
모두가 서둘러 해남파 안으로 들어갔고, 갈지혁은 맨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그런 그를 문을 지키던 수문위사들이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곽소정과 함께 온 자다.
그들이 함부로 할 자는 아니라는 소리다.
뒤처져 걷는 갈지혁의 옆으로 곽소정이 다가왔다.
그녀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것이 기쁜지 평소보다 더 밝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우선 아버님을 봬요. 그 후에 방을 정하고 약속한 걸 지원해 드리죠. 그리고 그분의 눈을 치료할 것도 저희 쪽에서 준비할게요.”
그녀가 지칭한 그는 일귀인 노후량인 게 분명하다.
아마도 해남파 안에서 그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것이 다소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다.
“해남파의 장문인을?”
“당연하죠. 당신 정도의 인물이라면 반드시 만나시려고 할 걸요?”
갈지혁이라면 섬 바깥 땅에서 최고로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그런 자가 해남파에 왔으면 가장 먼저 장문인을 만나는 건 당연하다.
갈지혁은 귀찮았지만 어차피 이곳에 있으려면 한 번쯤은 만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더불어 해남파의 무공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다른 인물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남은 것은 셋이다.
갈지혁과 곽소정, 그리고 현문. 현문이 앞장섰고 그 뒤로 둘이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장문인의 거처가 가까워지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 또한 이쪽을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더니 이내 그들 중 한 명이 무엇인가 알아차렸는지 급히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인들은 검도 뽑지 않은 채 양 옆으로 도열했다. 장문인이 기거하는 곳 근처에 다다른 곽소정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오랜만이야, 이곳은.”
일 년이 넘게 이곳에 오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갔던 무인이 허겁지겁 달려나오더니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곽소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건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 갈지혁을 예의 주시하던 무인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실례지만 신분을 말해 주시지요.”
“그분은 내 손님이니…….”
곽소정이 대충 말하려고 했지만 그때 갈지혁이 입을 열었다.
“갈지혁.”
“……!”
무인은 급히 검을 뽑아서 갈지혁에게 겨누었다. 이곳 해남도에 있는 어린아이도 갈지혁에 대해서는 안다. 그만큼 그가 유명인이 되었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