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149화 (149/200)

# 149

24화

“무슨 짓이죠? 제 손님에게 무례를 끼치는 건가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손님입니다! 제가 모시고 온!”

곽소정의 호통에 그는 천천히 검을 내렸다.

갈지혁은 말없이 무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중얼거렸다.

“함부로 검을 뽑지 마라. 다음에도 이 같은 일을 벌이면…… 그땐 죽는다.”

그 순간 무인이 가슴을 움켜쥔 채로 땅에 주저앉았다.

“컥컥!”

모두의 눈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담겼다.

곽소정이 자신을 바라보자 갈지혁이 가볍게 대꾸했다.

“반 각 정도 고통스럽다가 곧 괜찮아지니 걱정할 필요 없소.”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상당히 모욕적인 일일 수도 있다.

장문인의 거처에 있는 자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어떻게 본다면 명백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먼저 실례를 범한 것이 이쪽이기도 하고 곽소정은 그리 막힌 인물이 아니었다.

“보살펴 줘요.”

가볍게 말한 그녀는 앞장서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만나는 아버지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딸을 기다리는 한 아비가 있었다.

“오! 이거 못 알아볼 정도로 컸구나!”

“아버지는 여전하시네요.”

“껄껄! 그나저나 방금 전에 네 언성이 높아지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아, 그거요? 들으셨나 봐요.”

“못 들을 턱이 있나. 건물 안을 쩌렁쩌렁 울리던데. 평소 조용한 네가 그토록 고함을 지를 일이라도 있던 게냐?”

곽소정은 뒤를 힐끔 바라봤다.

그제야 딸에 정신이 팔렸던 해남파의 장문인 곽생의 눈에 다른 이들이 들어왔다.

한 명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딸을 맡겼던 현문.

그런데 다른 한 사내는 누구인지 도통 모르겠다. 생전 처음 보는 사내인 데다가 분위기도 뭔가 묘하다.

“저 사내의 정체를 듣고 제 손님인데도 불구하고 검을 들기에 잠시 목청을 높였어요.”

“허어, 그래? 그 녀석들은 제법 훈련이 돼서 여간해서는 그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뭐 하는 청년인지 궁금하군.”

웃으면서 말하지만 눈빛이 날카롭다.

정체를 알아내려는 속셈인 것이다. 그리고 갈지혁 또한 속일 생각은 전혀 없다.

방금 전 수문위사들에게 했던 행동처럼 말이다.

“갈지혁이라고 합니다.”

“……허허.”

이 사내가 누구일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상상했던 그 누구보다 그 이름의 파급 효과가 크다. 다른 자도 아닌 갈지혁이라니…….

“자네, 독인인가?”

“그렇습니다.”

확실하다.

혹여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현재 무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가 틀림없다.

곽생의 표정이 슬쩍 변했다.

바로 어제 무림맹에서 받은 서찰 때문이다.

그 서찰에서 앞으로 독을 쓰는 모든 이들을 강하게 탄압할 것이고, 갈지혁은 점창파의 장로들을 밤에 암습해 죽인 대가로 무림공적으로 지정한다고 했다.

그런 그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어째서 자네가 이곳에……?”

“제 은인이에요. 두 번이나 제 목숨을 구해 주셨죠.”

그 말을 듣는 순간 곽생은 고민을 접었다.

다른 이도 아닌 딸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준 은인이라고 한다. 그런 자에게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나쁜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못내 부끄럽기까지 하다.

곽소정은 자신의 목숨보다 아끼는 딸이 아니던가.

곽생의 얼굴에 그제야 자연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러한가? 허허, 이거야 원. 유명인을 이리 갑작스럽게 만나니 당황해서 혹여 실례되는 반응을 보인 게 아닌가 걱정되는구먼.”

“아닙니다.”

“우선 자리에 앉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시비를 불러들였다. 곽생이 자신의 딸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식사는 당연히 안 했겠지?”

“물론이죠.”

곽생은 옆에서 기다리던 시비에게 말했다.

“그럼 식사 준비 좀 하거라. 네 명 모두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푸짐하게. 아, 그리고 술 한 병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가볍게 대답한 시비의 모습이 방에서 사라졌다.

오랜만에 딸과 마주하니 곽생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의 입에서 미소가 걷히지 않았다.

그렇게 둘의 담소는 시작되었다.

만나지 못한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곽소정은 기분 좋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곽생은 그러한 딸의 이야기에 이런저런 반응을 보이며 흥을 돋웠다.

보기 좋은 부녀지간이다.

갈지혁은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러한 광경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된 듯이 식사는 금방 들어왔다. 꽤나 많은 양의 음식이 그들의 앞에 놓여졌다.

“그럼 식사들 들지.”

가벼운 말과 함께 곽생은 술병을 들어 올렸다. 술병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갈지혁에게였다.

“고맙네.”

“…….”

“내 딸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한잔 주려고 하니 사양치 말게.”

갈지혁은 잔을 들어 올렸다.

모두에게 잔이 돌았다. 그리고 나온 음식과 함께 몇 차례 술이 오갔다.

크게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지만 곽생은 기분이 좋았다.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오랜만에 본 딸 때문이리라.

그렇게 술을 마시던 곽생이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런데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 주었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게냐?”

“아, 오는 내내 백씨세가에서 저를 노려서요.”

“뭐야?”

곽생의 언성이 다소 높아졌다.

그들이 설마 곽소정에게까지 손을 뻗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이 맘을 먹고 움직였다면 지금 곽소정은 이곳에 없었어야 한다.

“저를 마중 나왔던 인원 중에 반이 죽었어요. 저도 죽을 뻔했는데…… 갈 소협 덕분에 살았죠.”

“후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할 게 참으로 많다.

백씨세가는 최근 들어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온다. 그렇지만 곽생은 가능하면 싸움을 피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곽소정까지 노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금은 갈지혁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겼다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운이 계속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언젠가 백씨세가의 암계에 곽소정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참지 못할 게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사단을 내야 한다.

벌어지고 나서 수습하는 건 늦다.

그 전에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싸운다면 어마어마한 피를 흘릴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망설이는 거다.

“가만히 보고만 있다간 후회할 일이 생길 겁니다.”

침묵하고 있던 곽생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갈지혁의 한마디다.

그 말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갈지혁을 바라봤다.

“전 후회할 짓은 하지 않습니다. 외지인의 헛소리라 들어도 상관은 없지만.”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갈지혁은 입을 닫았다.

곽생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말이 없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할 말은 그래도 하는 사내로군. 맘에 드네.”

곽생은 갈지혁을 하나씩 뜯어봤다.

얼굴은 가리고 있지만 이야기 들은 대로 꽤나 젊은 게 분명하다. 그나마 드러난 입은 굳게 다물어진 것이 심지가 곧고 의지가 강한 사내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무림맹에서 날아온 서찰의 내용은 그를 천하의 악당처럼 묘사했다.

점창파의 장문인을 모욕했고, 싸움에서 패함을 시인한 장로들을 그날 밤에 독살까지 시킨 자라고 말이다.

물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로 갈지혁이 어떠한 인물인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마음에 든다.

정말로 그가 무림맹에서 그렇게 말한 악당일 거라는 확신이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견고한 의지를 지닌 자가 비겁하게 밤을 틈타 누군가를 죽였다는 말도 믿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그 어떠한 부끄러운 짓도 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자신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그리고 곽생에게는 그걸로 족했다.

자신이 그리 생각했거늘 다른 누가 뭐라고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적어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그다.

“좋아, 기분이 좋으니 한잔 더 하지.”

곽생은 유쾌하다는 듯이 술잔을 돌렸다.

그렇게 해남파의 밤이 깊어져 갔다.

모두가 자신의 방으로 떠났다.

방에는 해남파의 장문인인 곽생만이 남아 침묵하고 있다. 아까의 즐거웠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백씨세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모양이다.

최근 해남파 내부에서도 이 일로 인해 화가 쌓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왜 싸우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크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참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해남파의 많은 자들이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싸우기에는 백씨세가 또한 사방에서 긁어모은 힘이 너무 강하다.

긴 역사를 자랑하고 해남도와 함께 커온 해남파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그렇지만 더 시간을 주어 봤자 강해지는 건 돈을 주고 무인을 데려오는 백씨세가 쪽이다.

빠르게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

속전속결.

백씨세가는 해남파를 잘 모른다.

그들은 해남파를 얕보고 있다.

해남파의 검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날카로운지 전혀 모른다.

그것이 바로 백씨세가에게는 패배의 요인이, 해남파에게는 승리의 요소가 될 게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치는 수밖에.’

비록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곽생이지만 무엇인가 정하는 그 순간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마음을 정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해남파는 백씨세가의 행패에 참지 않을 게다.

그때 누군가가 문에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인, 접니다.”

“왔는가? 들어오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곽생의 동생이자 해남파의 머리라고 불리는 곽무현이다.

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곽생은 손을 내저었다.

“둘뿐이니 형이라고 불러라.”

“형님,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가 찾아온다는 건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래, 무엇 때문에 날 찾아온 게냐?”

“갈지혁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흠, 소문이 그새 퍼졌나.”

장문인의 거처를 지키던 수문위사에게 대놓고 정체를 밝혔다. 소문이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가만히 곽생을 바라보던 곽무현이 말했다.

“하실 말씀은 그게 다입니까?”

“왜?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한데.”

“그자는……무림공적입니다.”

“누가 그리 정했더냐? 아직 우리 해남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건 이 섬 바깥에서 정한 자기들대로의 답 아니더냐?”

“하지만 해남파가 그를 지켜준다면…….”

“그만.”

곽생은 말을 잘랐다.

곽무현이 하고 싶은 말을 그가 모를 리 없다. 지금 그는 해남파에 혹여 피해가 오지 않을까 하고 고심하는 것이다.

그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나 해남파만 생각하는 자신의 동생이 기특하다.

“그자가 곽소정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줬어.”

“소정이의 목숨을 말입니까?”

“그래.”

곽무현은 곽생이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안다.

더군다나 곽무현 또한 갈지혁이 곽소정을 구해 줬다면 굳이 죄를 논할 생각이 없었다.

은혜를 입은 셈이 되는 탓이다.

곽생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본 그놈…… 좋은 놈이더군. 결코 비겁한 짓을 할 사내는 아니었어.”

“형님, 그렇다면 무림맹에서 이 일에 대해 추궁해 온다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잠시 고민하던 곽생이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섬 밖에 있는 놈들의 억양이 이상해서 알아 처먹지 못했다고 할까?”

“하하!”

곽무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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