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153화 (153/200)

# 153

3화

노후량이 말했다.

“내게 원하는 거라도 있었던 것이냐?”

“너 같은 자에게 받을 게 뭐가 있다고.”

“그것도 아니라면…… 이유가 없잖아.”

지금의 노후량에게 있는 거라고는 이 질긴 생명 하나뿐이다.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돈이 있는 건 더 더욱 아니다. 그저 몸뚱이 하나밖에는 믿을 게 없는 그다.

갈지혁은 그대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이젠 볼일 없으니 나가줬으면 하는군. 이 이후의 일은 다른 자들과 이야기하고.”

“……정말 나에게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귓구멍을 뚫어 줄까?”

갈지혁의 목소리에는 짜증까지 묻어났다.

혹시나 하고 있었건만 정말로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믿어지지 않지만 이유도 없이 노후량 자신을 치료해 준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죽이려 하던 자를 말이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형님, 저와 이야기 좀 하십시다.”

노후량은 현문을 바라봤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는 대충 알고 있다. 아직 시야가 제대로 잡히지 않고 뿌옇기는 하지만 며칠 정도 지나면 예전처럼 사물을 확실하게 분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해남파로 돌아오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제가 한 번 장문인께도 사정을 말씀드리고…….”

“불가(不可).”

이야기를 채 다 듣기도 전에 노후량은 딱 부러지게 말했다.

다른 이야기라면 몰라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전에는 해남파를 위해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해남파가 자신을 원해도 이제는 돌아가지 않는다.

더는 해남파의 신룡검이 아니다.

“혹여 뭔가 부담이 돼서 그러시는 거라면 제가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부담스러울 리가 없지. 이쪽에서 사양한다.”

담담한 어투다.

그는 더 이상 해남파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이 보였다.

현문은 갈지혁이 말한 대로 상황이 돌아가자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형님은 계속해서 악면삼귀라는 이름을 달고 살겠다는 거요?”

“해남파의 신룡검이 될 바에는 그게 낫지.”

예상하지 못했던 노후량의 대답에 현문은 놀란 눈치였다.

곽소정 또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노후량을 바라봤지만 유독 갈지혁만은 무덤덤해 보였다.

애초에 이 같은 대답을 예상한 것은 그뿐이리라.

“대체 왜…….”

“돌아간다고 해서 지나간 시간이 바뀌지는 않으니까.”

대꾸한 것은 노후량이 아닌 갈지혁이다. 그 한마디에 모든 시선이 갈지혁에게로 쏠렸다.

노후량이 픽 하고 웃었다.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대답이군.”

신선처럼 인자한 얼굴을 한 노후량이지만 그 일들만 생각한다면 당장이라도 악귀처럼 변한다.

그러한 일은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것도, 용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내 생각을 네가 가장 잘 이해하는지 모르겠군.”

“비슷하니까.”

“비슷하다?”

“나도 당신처럼 버림받았거든.”

갈지혁은 그대로 윗옷을 벗었다.

그의 행동에 놀란 곽소정은 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갈지혁은 태연하게 자신의 등을 다른 이들에게 보였다.

파문(破門).

살이 문드러져 있지만 그 두 글자는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 파문이라는 두 글자가 갈지혁의 등 뒤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아 있다.

“파, 파문?”

현문은 갈지혁의 등 뒤에 새겨진 글씨를 중얼거리듯이 읽어 냈다. 무엇인가 상처가 있는 듯했지만 정확하게 판별하지 못하고 있던 노후량의 표정에도 일말의 변화가 보였다.

그는 윗옷을 다시 내리면서 말했다.

“지울 수 없지. 그리고 이 가슴에도 이 두 글자가 남아 버렸어.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그것뿐일 거요.”

“……재미있는 놈이다, 너는.”

비슷하다.

그 이후에 걸어온 길이 다소 다르니 완벽하게 같은 생각을 가지는 건 무리다. 하지만 갈지혁의 말은 분명 노후량의 것과 같다.

솔직히 말해 노후량은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강하다.

듣기로 아직 채 서른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소 뿌연 시야이긴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갈지혁은 분명 젊었다.

그런 자가 지금 무림을 진동시키는 인물이 되어 있다.

무인 갈지혁이라면 몰라도 독인 갈지혁은 상대하기 버겁다. 노후량 본인이 이길 승산은 채 이 할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해남파 최고의 기재였다던 자신보다 뛰어난 자질을 지닌 자다.

이런 자를 파문시키다니…….

“널 파문시킨 자들의 낯짝을 한 번 보고 싶군. 어떠한 놈들이기에 너 같은 괴물을 이렇게 내 버릴 수 있는지 말이야. 크큭. 아마 지금 그놈들은 네놈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지금 중원의 그 어떤 문파가 갈지혁과 등을 지고 살려고 하겠는가. 그는 무림에서 그러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갈지혁과 싸운다면 최소한 몇 백에 달하는 인원이 죽을 게다. 그것도 운이 좋을 때의 이야기고, 잘못하면 그 많은 인원이 죽고도 갈지혁을 제압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가 단순히 무인이 아닌 독을 쓰는 독인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의 독은 독왕이라는 칭호까지 불릴 정도로 강력하다고 한다.

갈지혁이라는 인물에게 큰 관심이 없던 노후량이다.

어차피 섬 밖의 이야기였다.

음지로 사라지게 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갈지혁이라는 자와 조우할 일은 결단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렇게 만났다.

그토록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노후량은 갈지혁의 이야기를 몇 가지 들은 것이 있다. 그만큼 그가 무림에서 벌인 일들은 이야깃거리가 되기 충분했던 것이다.

갈지혁은 웃고 있는 노후량을 슬쩍 바라만 봤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솔직히 지금 와서는 복수라는 것은 그리 생각하지도 않게 되어 버렸다.

그 당시에는 그토록 분노로만 가득했지만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그러한 분노는 퇴색되어 가고 있었다.

오로지 독왕이 되겠다는 그 일념만은 꺾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독왕이 된 후에 독황독립문을 부수겠다는 생각도 없다. 그저 어머니를 구하고, 갈지혁에게 미래라는 것을 준 일악천을 사곡에서 꺼낼 것이다.

물론 지대익과 지운경에게는 나름대로 본때를 보여 줄 게다.

적어도 당한 만큼은 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당하고 사는 건 갈지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갈지혁은 노후량을 이해했지만 현문은 달랐다.

막 그가 다시금 말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그만 좀 하고 나가줬으면 하는데.”

“아.”

갈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로서는 더 이상 이 자리에서 논쟁이 일어나는 것을 듣고 싶지 않다.

곽소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문의 옆에 가서 섰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 이후의 일은 해남파의 일이다. 더 이상 갈지혁이 얽힐 일은 없다고 본다.

그런 곽소정의 마음을 알았는지 현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노후량을 보면서 말했다.

“형님, 나가서 이야기 좀 합시다.”

“이야기만이라면.”

현문과 노후량이 밖으로 걸어나가자 곽소정도 급히 그 뒤를 좇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갈지혁에게 가볍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마워요, 저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줘서.”

“약속이라서 지킨 것뿐이오.”

“그럼 방해는 그만 할게요. 푹 쉬도록 하세요.”

곽소정은 문을 닫고 모습을 감췄다.

갈지혁은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다른 누구와도 얽히지 않으려고 했거늘 해남도에 오자마자 가장 커다란 두 세력의 일에 얽혔다.

해남파와 백씨세가.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슬슬…… 떠날 때가 됐군.”

준비해야 할 것은 모두 끝났다. 이제 단화초를 찾는 일만이 남은 것이다.

* * *

아침에 눈을 뜬 갈지혁은 가지고 온 몇 안 되는 짐을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남파에서 만들어 낸 혈환액(血渙液)을 챙기는 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깃발이 어디에…….”

자신도 모르게 깃발을 찾으러 시선을 돌리던 갈지혁은 멈칫해 버렸다.

잠시 그 깃발을 진검백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들고 다녔던 깃발인지라 손에 없으니 왠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미련은 없다.

해남도로 오면서 이미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에서 나가는 그때 갈지혁은 독왕이 되어 있거나 죽어 있을 게다. 극단적이지만 그것이 지금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더는 시간이 갈지혁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을 게다. 그가 얼마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어떠한 연유로 자신을 쫓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힘들다는 것만큼은 굳이 부딪쳐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단 한 번도 직접 조우해 본 적은 없지만 흑풍을 조종하고, 그전부터 연신 갈지혁의 뒤를 쫓던 정체불명의 인물은 독황독립문 이상의 힘을 지녔을 게 분명했다.

그 정체불명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갈지혁은 독왕이 되어야 했다.

‘시간을 더 끌면 안 된다.’

지금 움직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해남파의 일에 더 얽히는 것이 싫어서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정체불명의 인물들 때문이다.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들이라면 갈지혁의 위치를 파악하고도 남았다.

더 많은 자들이 해남도로 넘어오기 전에 모든 일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하는 것이다.

짐을 전부 챙기고서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가려던 그는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이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냈다.

더 얽히는 것은 싫지만 최소한 나름대로 받은 것이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마 곽소정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혈환액을 만드는 덴 지금보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을 게다.

그는 책상 위에 서찰을 올려 두고는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십니까?”

곽소정이 갈지혁에게 붙여 준 시비다.

식사를 준비해 주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모두 이 시비에게 말하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이는 아직 이십이 되지 않았지만 행동은 조심스럽다.

“이만 떠나려고 한다.”

“아가씨께서는 모르시는 듯 하던데…….”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냥 책상 위에 서찰 하나 두었으니 가져가거라.”

잠시 망설이던 시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내가 누구인지 잘 안다. 그 누구도 얽맬 수 없다는 갈지혁이 아니던가. 그는 이미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그리고 애초에 곽소정 또한 갈지혁이 언젠가 떠날 거라고 그녀에게 언급해 두기까지 했다.

그때는 잡지 말라고 하면서 말이다.

“잠시지만 고마웠다.”

“아닙니다.”

“그럼.”

갈지혁은 앞만 보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는 볼 이유도, 봐서도 안 된다.

앞을 보고 걷기 시작한 지금부터는 아무런 것도 신경 쓰지 않으련다.

오지산(五指山).

해남파가 있는 여모봉과 멀지 않은 곳이다. 말을 타고 달리면 사나흘 정도 걸리는 거리. 오지산은 두 개의 강을 끼고 있다.

남도강과 만천하가 바로 그것이다. 그 두 개의 물줄기는 북동으로 흘러 바다에까지 이른다.

안개가 많은 편이며 그 높이도 높은 편이다.

쉬지 않고 달리던 갈지혁이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푸르릉!

말이 앞다리를 높게 쳐들며 등 위에 있는 갈지혁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려는 듯했지만 그는 어렵지 않게 중심을 잡았다.

미친 듯이 달린 탓인지 말은 상당히 지친 모습이다.

갈지혁은 말 등에서 뛰어내리더니 등에 매달아 놓은 짐들을 꺼내어 들었다. 그는 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호흡을 고르던 말은 번개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잘 가거라.”

많이 지치기도 했고 이제부터는 말을 이용해서 오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지산이 목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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