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4화
전 마을에 들르면서 최소한의 필요한 것들도 모두 샀다. 말린 육포나 건량 같은 것은 오 일 치 이상이나 준비해 뒀다.
단화초의 위치를 알기는 하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다. 우선 어떠한 장소를 찾아야만 그 이후부터는 일악천에게 들었던 단화초가 있는 장소에 접근할 수 있을 게다.
갈지혁은 오지산을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어물거릴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그의 발은 바쁘게 움직였다.
오지산은 습기가 많다. 산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갈지혁은 다소 후덥지근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어릴 적부터 남만에서 살아온 탓에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갈지혁은 주변을 살피면서 산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최소 산중턱 이상은 올라가야 한다. 그 후부터는 산을 이 잡듯이 해서 단화초가 있을 거라는 그곳을 찾아내야 한다.
사람의 발자국이 많던 길을 따라 오르던 갈지혁은 점점 나무들이 무성한 곳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인적이 사라졌다.
길이 점점 가파르게 변하기 시작했고 주변의 나무들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태고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갈지혁은 손으로 나무들을 젖히면서 목표한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갈지혁은 부지런히 움직이던 발을 멈췄다.
산의 밤은 평지에 비해 월등하게 빠르다. 해가 지는 듯싶다가 금세 모습을 감추고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인다.
종종 느껴지던 산짐승들의 기척도 모두 사라질 정도로 시간이 흘러 버렸다.
해가 지고도 한참을 걷던 갈지혁이 멈췄다. 그는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준비해 온 육포를 꺼내 씹었다. 간단한 음식이지만 휴대하기 편하고 허기를 달래는 데도 그만이다.
갈지혁은 육포를 씹으며 일전에 일악천이 보여 주었던 조그마한 종이에 적혀 있던 문구를 떠올렸다.
‘다섯 개의 돌이 오문진(五門陣)을 형성하고, 독의 기운이 독문(毒門)을 만든다. 그 가운데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찌르니 그 아래에는 심해의 깊고 깊은 길이 있을지니.’
해남파의 오지산에 있다는 그 장소를 갈지혁은 찾고 있는 것이다.
다소 난해한 문구일지도 모르지만 깊게 생각하면 대충 답은 나온다. 다섯 개의 돌, 오문진이라면 갈지혁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 기운을 갈지혁은 뒤쫓고 있다.
오문진은 드러나는 진법이 아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무엇인가 일을 당하지도 않는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것이 바로 오문진이다.
전혀 다른 것이 없고, 아무런 변화도 없다. 진 안에 들어갔다 나온 자도 그러한 사실을 모를 정도다. 그것은 진에 능통한 자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오문진은 위력적인 진법은 아니나 그 무엇보다 자연과 동화가 되는 진법이다.
많은 자들이 단화초를 찾았지만 찾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것 오문진 탓이다.
물론 해남파의 오지산에 단화초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도 없지만 말이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몇 가지 언급을 적어 놓은 것은 봤다.
산중턱에 이르면 오지산에 산다는 리족이라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곳을 기점으로 해서 산을 타다 보면 알 수 있을 거라는 말이 일악천에게 전해들은 전부다.
육포를 다 씹어 먹은 갈지혁은 그대로 땅에 드러누웠다. 시간이 급하기는 하지만 지금 그가 가야 할 곳은 사독문의 유일한 길이었던 사로와 견주기도 힘들 정도로 위험천만한 곳이다.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 두지 않으면 통과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날 밤도 이러했지.’
문득 사로를 처음 걸어나갔던 날이 생각났다.
일악천이 풍토병에 걸렸고 대황이라는 사소한 약재를 구하기 위해 갈지혁은 목숨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향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잘 계십니까.’
독황독립문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어렸을 때의 일, 유일한 지기였다고 생각했던 지운경과의 일들.
그런데 유독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 가는 것은 일악천의 모습이다.
아마 잘 지낼 게다. 자신이 나갔으니 귀찮을 일도 없으니 말이다.
문득 그가 보고 싶어져 버렸다.
독왕이 된다면…… 독황독립문에 돌아가 일악천의 앞에 설게다. 그때는 이 답답한 앞머리를 들어 올리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누워 있던 갈지혁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동시에 소매 속에 있던 사황이 기어 나와 갈지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갈지혁이 알아차린 것을 사황 또한 알아챈 모양이다.
“쉿.”
갈지혁은 기척을 죽였다.
숨소리도 사라졌고, 몸에서 풍기는 냄새나 열도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췄다.
부스럭.
부스럭.
사방에서 나뭇잎 소리가 난다.
발걸음을 숨기고 걷는 게 분명했지만 갈지혁의 귀에 그러한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그는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수투를 꺼냈다. 언제든지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다.
‘벌써?’
정체불명의 자들이 벌써 뒤를 잡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탓이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앞으로 단화초를 찾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릴 게다.
그런데,
“이상하군. 분명 사람 냄새가 났는데…….”
“잘못 맡은 것 아니야?”
“아니야. 분명했단 말이지.”
다소 억양이 다르긴 했지만 갈지혁은 어렵지 않게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다.
어눌한 억양.
리족이다.
그들은 원주민이면서 바깥세상과 교류가 많은 자들이다.
갈지혁은 손에 끼었던 수투를 다시금 품속에 집어넣었다. 괜히 싸울 의사를 보여서 리족과 다툼이라도 일어나면 귀찮아진다.
리족은 난폭하지 않다. 먼저 싸움을 걸지 않으면 문제가 벌어지지 않는다.
갈지혁은 입을 열었다.
“누구냐?”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던 리족들은 갑작스러운 갈지혁의 목소리에 손에 들린 창을 급히 방향을 틀었다.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 뒤에서 나타난 갈지혁은 두 명의 리족이 자신을 향해 창을 겨누고 있는 것을 봤다.
‘한 놈은 무공을 익혔군.’
갈지혁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두 명의 리족 사내들은 그를 향해 창을 겨누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극히 대조적이었다. 한 명은 다소 엉거주춤하고 당황한 듯했지만 다른 자는 달랐다.
그는 눈은 호랑이처럼 빛났고, 창을 잡은 손은 꼿꼿했다.
“정체가 뭐냐.”
그 리족 사내가 말했다. 갈지혁이 간단하게 대꾸했다.
“싸우거나 문제를 일으키러 온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그걸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
갈지혁의 겉모습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다. 흑의에 얼굴도 앞머리로 가리고 있다.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며 리족 사내는 꽉 잡은 창을 내리지 않았다.
“받아.”
갈지혁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그에게 던졌다.
리족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리족의 사내였지만 무공을 익힌 무인이기도 했다.
무인이라면…… 자신의 검을 이렇게 남에게 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정말 상대는 이쪽에 살의를 가지지 않은 듯했다. 애초에 자신들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이었다면 기척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게다.
하지만 리족 사내는 갈지혁이 자신의 이목을 속였던 것도 잊지 않았다.
창은 내렸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검을 주었지만 넌 분명히 무공을 익혔다.”
“그래, 나는 무인이다.”
속일 필요도 없고, 속일 수도 없음을 갈지혁은 잘 안다. 그렇게 기척을 숨기고 있었거늘 모를 리가 없다.
“원하는 것은?”
“잠자리. 그것만 주면 고맙지.”
갈지혁의 말에 리족 사내가 잠시 경계의 빛을 띠다가 이내 말했다.
“좋아. 날 따라와.”
“야환!”
옆에 있던 다른 리족이 당황스럽다는 듯이 외쳤다. 야환이라고 불린 리족 사내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저자가 마음먹었다면 우리 둘은 아까 죽었을걸.”
갈지혁이 몸을 감추었을 때 야환은 그의 위치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자신들 정도를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 자가 우리 부락의 거처 하나 못 찾을 것 같아?”
“그건 그렇지만…….”
불안한 표정으로 리족 사내는 야환을 바라봤다.
다른 부류라면 몰라도 무인이라면 아무래도 경계심을 지니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리족 사내는 야환이 마음을 굳힌 것을 이미 알았다.
야환의 고집은 부락 내에서도 알아주는 똥고집이다. 괜히 이곳에서 실랑이를 벌여 봤자 그의 행동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안다는 소리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난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해라.”
야환은 갈지혁을 향해 따라오라는 듯이 손짓하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야환과 다른 리족 사내가 앞장서서 걷자 갈지혁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 뒤를 쫓아갔다.
굳이 사람들과 얽히지 않으려는 갈지혁이 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리족의 거처에서 시작해서 단화초를 찾는 것이 보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갈지혁이다.
리족의 부락은 멀지 않았다.
두 명의 사내의 뒤를 좇은 지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갈지혁은 평평한 공간에 오십여 채 이상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락을 볼 수 있었다.
리족의 부락이리라.
야환은 부락을 바라보는 갈지혁에게 말했다.
“저기다. 저곳이 우리가 사는 곳이다.”
“그렇군.”
“넌 날 따라와라.”
다소 거친 말투지만 갈지혁은 어렵지 않게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다. 야환과 함께 있던 사내는 가벼운 인사만 건네고 모습을 감췄다.
갈지혁은 야환과 함께 걸어야만 했다.
늦은 밤이지만 부락은 아직 잠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갈지혁에게로 향했다.
그들과 확연하게 다른 외모에 생전 처음 보는 자다.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우선 경계심을 품었지만 이내 야환을 보고는 적잖이 안심을 하는 듯했다.
그만큼 이 야환이라는 사내가 이 부락에서 지닌 비중은 꽤나 커 보였다.
야환은 성큼성큼 부락 안으로 걸어 들어가 어떠한 집 앞에 섰다. 다른 곳들과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는 건물이었다.
그가 문을 열면서 말했다.
“들어와.”
“그러지.”
방 안으로 들어선 갈지혁은 그 안에 거의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차렸다. 방 안은 꽤나 깜깜했다.
“별건 없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성격이 간소한 탓인지 사치품은커녕 생필품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대충 자리에 앉아.”
갈지혁은 그가 말하기가 무섭게 방구석에 짐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야환은 윗옷을 벗더니 가벼운 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창을 손이 닿을 수 있는 적당한 거리에 두는 걸 잊지 않았다.
“먹을 것 같은 걸 바라지는 마. 네가 원한 건 잠자리였으니까.”
애초에 이 리족의 부락으로 온 것 자체가 보다 빠르게 단화초를 찾기 위해서였다.
간단하기는 하지만 이미 육포로도 식사를 때운 상태다. 음식 같은 것을 원할 리가 없다.
“혼자 사나?”
“그래.”
대꾸를 하며 야환은 자리에 드러누웠다. 더는 이야기할 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다. 그리고 그건 갈지혁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갈지혁은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밖에서 노숙을 하려던 차에 운이 좋았다. 그것도 만난 자들이 다름 아닌 리족의 인물들이라 더 더욱 그러하다.
일악천에게 들은 것처럼 이 부락을 기준으로 해서 산을 타다 보면 답이 나올 게다. 가능하면 최대한 단기간에 단화초를 찾아내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
기묘한 만남이기는 했지만 갈지혁은 뭔가 이 자리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야환이라는 사내는 꽤나 신비한 자였다.
갈지혁은 계속되려는 상념을 접으며 잠을 청했다.
야환은 언제나 처럼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아직 채 해가 뜨지도 않은 시간이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는 엉겁결에 옆에 있는 창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자리에 앉아 있는 갈지혁 때문이다.
가볍게 눈을 감은 채로 명상에 잠긴 듯이 앉아 있는 그를 보고 야환은 일순 움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