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8화
그때 옆에 서 있던 모구령이 우콴의 앞을 막아섰다.
“나를 이기고 나서 덤벼라, 풋내기.”
“모구령! 날 막으면 너도 죽는다!”
“웃기는 소리. 예전의 내가 아니다, 야환.”
야환과 마찬가지로 모구령 또한 창을 뽑아 들었다. 그가 창을 붕붕 돌리면서 기수식을 취했다.
그런데 둘의 자세가 많이 흡사하다.
그렇다.
비록 지금은 다르지만 한때 같은 스승 밑에서 무공을 배운 적이 있는 사형제였던 것이다.
무공을 배우던 중 모구령의 검은 야심을 알아챈 스승은 그에게 참회(懺悔)의 시간을 가지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참회의 시간을 가지라는 스승의 말에 뒤도 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끼릭.
창을 꽉 움켜쥐었다.
“언젠가 네놈을 죽이려고 했지.”
“비켯!”
야환은 그대로 창을 내질렀다.
연환구련창법(連環九聯槍法)은 빠른 회전을 기본으로 한다. 야환의 창에 마주하는 모구령 또한 연환구련창법을 펼쳤다.
타라랑!
똑같은 초식이 부딪쳤다.
초식의 완숙도 면에서는 야환이 앞섰다. 하지만 모구령 또한 스승을 떠나 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스승을 만나 암기술을 배웠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다.
창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소매에서 짧은 비도 하나가 빗살처럼 쏘아졌다.
그리고 그 한 번의 공격은 야환의 자세를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예상했던 바였다. 야환 또한 그대로 몸을 돌리면서 창을 움직였다.
창!
두 개의 창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호오.”
재미있다는 듯한 우콴의 표정을 보는 순간 살심이 인다. 당장 저 커다랗다 못해 비대한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려야 분이 풀릴 듯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콴은 야환조차도 쉽사리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그런 자에게 살수를 펼치겠다고 움직이면 모구령에게 등을 보이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모구령의 공격을 받아 낼 수 없다.
솔직히 지금 이 상태에서 우콴이 싸움에 낀다면 전세는 완벽하게 기울어 버린다.
창창!
창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야환도, 모구령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고, 연환구련창법의 장단점도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싸움은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망할!’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화명의 눈빛에 야환은 더욱 속이 타올랐다. 거기다가 이 건물을 점점 많은 자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도 그를 더욱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퇴로는 없다.
다 죽이거나, 야환이 죽어야 한다.
‘어떻게든 화명만은 살려야 한다!’
죽어도 좋다. 물론 자신이 죽으면 리족은 더 이상 웅족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안다. 그래도 화명만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휙!
창이 아슬아슬하게 모구령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피가 흘러내리자 그는 급히 뒤로 물러섰다.
역시 창법만으로 본다면 모구령보다는 야환이 한 수 위다.
그렇지만 모구령은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곳은 다름 아닌 웅족의 거처다. 이곳에서는 야환이 아무리 강해도 자신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정 안 되면 여러 명이 협공을 하면 그만 아닌가.
비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살아야지 비겁하다 어쩐다 하는 거지, 죽은 후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뒤로 물러선다고 물러섰지만 야환 또한 한 번 잡은 기회를 놓치려 들지 않았다.
야환은 늑대다.
한 번 물면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의 동물적 감각은 지금이 기회라고 소리쳤다.
창이 다시금 모구령을 노렸다.
하늘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창은 매섭도록 빨랐다.
그가 가장 즐겨 쓰는 초식인 비연십팔련이다.
비연십팔련은 빠르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것이 장점인 초식으로, 다소 파괴력이 약한 것을 제하고는 딱히 흠 잡을 곳이 없는 초식인 것이다.
그리고 모구령은 야환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그가 비연십팔련을 펼칠 거라는 걸 알았다.
야환의 비연십팔련이 위력적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무조건 막는다!’
암기를 뿌렸다.
그만큼 비연십팔련의 창의 잔영이 줄어들게 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연환구련창법을 잘 아는 자의 생각답게 그의 판단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모구령 또한 비연십팔련을 펼쳤다.
암기에 의해 그 숫자가 줄어든 비연십팔련이다. 모구령 자신의 비연십팔련이라면 승부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큭!’
막상 창이 부딪치는 순간 모구령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실수를 한 것이다.
모르는 사이에 야환의 비연십팔련은 더욱 정교하고, 그나마 부족했던 파괴력까지 충족시켜 버린 것이다.
허공에서 모구령의 창의 잔영이 사라져 버렸다.
‘이런!’
창날이 자신을 향해 짓쳐 들어온다. 피한다고 해도 최소한 중상은 피할 수 없었다.
싸움이 끝났다고 야환이 생각했을 찰나였다.
“꺅!”
탁.
창이 멈췄다. 거짓말처럼 모구령의 가슴 바로 앞에서 야환의 창이 멈춘 것이다.
그것은 한 여인의 비명 소리 때문이었다.
우콴은 화명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로 웃음을 흘렸다.
“움직이면 이 계집이 죽는다.”
“이이!”
야환은 분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콴의 손에 잡힌 화명 때문이었다.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놀랐던 모구령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는 주먹으로 야환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 새끼가!”
쓰러진 그를 모구령은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야환은 몸을 움츠린 채로 방어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반격을 하려고 해도 화명이 붙잡혀 있는 이상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퍽퍽!
야환을 마구 밟던 모구령이 숨을 씩씩 몰아쉬며 발을 멈췄다. 그가 시선을 돌려 우콴을 바라봤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죽여.”
화명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녀가 급하게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우콴의 다리를 잡았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저 사람을 제발…….”
“시끄럽다.”
퍽!
우콴은 다리에 매달려서 사정하는 화명을 그대로 발로 차버렸다. 그녀는 힘도 쓰지 못하고 땅에 쓰러졌다.
“화명!”
으드득.
이를 갈았지만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야환은 분하다는 듯이 우콴을 노려봤다. 야환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네놈 때문에 내 계획이 얼마나 늦어졌는지 아느냐?”
겨우 야환이라는 놈 하나 때문에 리족을 집어삼키지 못했다. 만약 야환이 계속해서 리족과 함께 움직였다면 설령 이긴다고 해도 웅족 또한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했어야 한다.
그런데 운이 좋았다.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와 죽음을 맞이해 주니 이만큼 고마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애초에 화명이라는 여인을 잡기 위해 인원을 동원했던 것도 모두 야환 때문이다.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늘 이놈도 꽤나 멍청한 놈인 듯하다. 죽을 줄 알면서도 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이곳으로 온 것을 보면 말이다.
오래 살 수 있는 놈이 아니다.
모구령이 창을 치켜 올렸다.
“마지막 가는 길 사형제였던 걸 생각해서 깨끗하게 보내 주지.”
“그만둬요!”
화명을 힐끔 쳐다본 모구령이 피식 하고 웃는다. 들어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죽어라, 야환!”
“죽어야 할 놈은 바로 네놈이다.”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구령은 화들짝 놀랐다. 급히 고개를 돌리자 생전 처음 보는 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머리카락을 앞으로 내린 탓에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모구령의 온몸에 순식간에 소름이 돋아 버렸다는 거다.
“누구냐!”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네놈들이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다.”
“뭐, 뭐라고 떠드는 거냐!”
모구령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콴 또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분명 바로 옆까지 다가왔는데도 말이다.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우콴이 소리쳤다.
“모두 안으로 들어와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웅족의 사내들이 쏟아지듯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익숙한 듯이 둥그렇게 에워쌌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쇳소리가 사람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할 정도였다.
그때 쓰러져 있던 야환이 반쯤 고개를 든 채로 중얼거렸다.
“네가 왜…….”
“약속은 지켜야지. 넌 날 신령석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기로 했잖아. 그러려면 살아야지.”
“신령석의 위치는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네가 어제 준 술. 그걸로 네 목숨을 한 번 구해 주도록 하지.”
“푸하하! 내 목숨이 겨우 술 항아리 하나 값인가?”
그는 유쾌하다는 듯이 웃어 젖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토록 통쾌하게 웃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죽을 거라고 생각하며 달려온 길인데…….
갈지혁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독왕 갈지혁이다.
점창파를 단신으로 쓸어버린 그를 웅족이라는 작은 부락 하나가 막아 낼 리가 없다.
모구령은 야환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냉정한 사내다.
분명 강한 자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승산은 이쪽에 있다. 머릿수만 해도 몇 십 배의 차이다. 더군다나 지금 상태의 야환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또 이쪽에는 인질도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웅족이 이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 여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맘에 들지 않아.’
눈앞에 나타난 이 사내도, 그리고 저 야환의 즐거운 듯한 미소도 말이다.
언제나 졌다.
같은 스승 밑에서 같은 것을 배웠건만 언제나 모구령은 야환보다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그게 분했다. 그랬기에 창술에만 전념하지 않고 암기술도 익혔다.
그리고 웅족이라는 힘도 얻었다.
이제 그 질긴 인연을 끊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방해자가 나타났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죽여!”
우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외침이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아 있던 화명은 눈을 감아 버렸다.
사방에서 갈지혁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때 갈지혁이 오른쪽 손바닥을 쭉 편 채로 입가까지 들어 올렸다. 손바닥이 하늘을 바라보게 뒤집혔다.
그의 입이 오물거렸다.
후우.
입으로 가볍게 바람을 분 것뿐이다.
한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털썩.
사방에서 달려들던 자들이 채 두어 걸음을 더 옮기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갈지혁은 손바닥에 입을 가져다 댄 채로 몸을 빙글 돌렸다. 다른 쪽에 서 있던 무인들의 얼굴색이 눈에 보일 정도로 변해 버렸다.
“도, 독이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가볍게 숨을 한 번 분 것뿐인데 안으로 뛰어든 자들의 반 수 이상이 쓰러졌다. 아마도 손바닥 위에 독분을 올려놓고 그것을 숨으로 퍼뜨린 모양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우콴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모든 일은 성공적이었다.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웬 알지도 못하는 놈이 나타나서 초를 치는 격이다.
우콴과 다르게 모구령은 최대한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눈앞에 있는 자가 독을 쓴다.
독이라면 상대하기 까다롭다.
오지산에는 많은 독을 지닌 생물들이 있어 해독에 한해서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 본 독은 어떠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독을 쓰는 놈이 갑자기 어디서…….’
뭔가 틀어졌다는 생각에 답답해하던 모구령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확 변해 버렸다.
가만히 있던 우콴이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자신의 병기인 도를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