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9화
상대가 독을 쓰기에 더 더욱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가 도를 치켜들면서 소리쳤다.
“감히 내 일을 방해해? 죽여 버리겠다! 쳐랏!”
말을 마친 우콴이 움직였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모구령이 급하게 소리쳤다.
“족장님! 안 됩니다! 그놈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이었다.
“우웩!”
달려들던 자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저 가볍게 손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우콴은 도로 자신의 몸을 지탱한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커흑, 커흑.”
숨을 쉬기가 버겁다.
무엇인가가 코로 침투해 들어오는 듯싶더니 머리를 짓누른다. 다리의 힘도 완전히 쑥 빠져 버리고 말았다. 급기야는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끔직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던 화명은 눈앞에서 일어난 일들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끝내 버티고 있던 우콴이 옆으로 픽 하고 쓰러져 버렸다.
쓰러진 우콴을 차가운 눈동자로 내려다보는 사내를 보며 모구령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왜…… 왜 갈지혁이 여기에 있느냔 말이야!’
그가 해남도에 나타났다는 소문은 들었다.
또한 그가 해남파와 백씨세가의 싸움에 간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말이다.
그 두 곳의 싸움은 오지산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랬는데……
뭔 놈의 일이 이리 꼬이는지 모르겠다. 하필이면 야환을 제거하려고 한 날 갈지혁이 나타났다.
최악이다.
모구령은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을 제하고는 제대로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두리번거리던 그와 갈지혁의 눈이 마주쳤다.
정면 대결을 펼친다면 필사다.
구파일방의 하나인 점창파를 단신으로 쓸어버린 갈지혁이다. 그토록 손속이 잔인하다는 장강수로채를 오히려 도망치게 한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러 버린 자다.
모구령은 그대로 근처에 있던 화명의 목을 손아귀로 움켜쥐었다.
“움직이면 이 계집은 죽어!”
“화명!”
방법은 이것뿐이다.
인질을 가지고 협박을 하지 않는다면 갈지혁의 손아귀에서 도망치지 못한다.
절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야환의 두 눈은 분노로 가득했다. 그렇지만 차마 화명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는 모양이다.
“자자, 비키라고. 비키지 않으면 이 연약한 목이 뚝 하고 부러질 테니까.”
모구령은 영리한 자다.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고, 또 망설이지 않는 판단력도 지녔다.
이를 갈면서도 야환은 물러설 수밖에 없다.
‘좋아, 성공이다!’
모구령은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어 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갈지혁을 너무 얕봤다.
모구령은 계속해서 갈지혁을 보고 있었다. 그가 꿈쩍하기라도 한다면 급히 협박이라도 할 생각인 것이다.
그가 몸을 돌려 조심스럽게 문가로 뒷걸음질 치던 때였다.
“억!”
갑작스러운 고통과 함께 모구령은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는 급히 화명의 목을 움켜쥐려고 했지만 몸은 그런 모구령의 의지를 배신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발뒤꿈치 부분을 바라봤다.
녹색의 뱀이 그곳에 똬리를 튼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배, 뱀에게…….’
털썩.
모구령은 쓰러졌다.
즉사다.
사황의 독은 갈지혁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리는 순간 온몸이 마비되었을 게고,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경련을 일으키는 듯싶더니 모구령은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그토록 리족을 괴롭히던 웅족이 갈지혁이라는 사내의 등장으로 인해 깨끗하게 정리되어 버린 것이다.
야환에게는 꽤나 버거운 상대였거늘 갈지혁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상대였던 모양이다.
모구령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화명은 갑자기 그가 쓰러지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이내 모구령이 정말로 쓰러졌다는 것을 알자 야환을 향해 달려왔다.
“야환! 괜찮아?”
“난 괜찮다. 너는?”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아니.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것뿐이니 네가 미안해할 건 없다.”
비록 발로 짓밟히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버틸 수 있다. 다소 거동이 불편한 것을 제하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 정도로 끝났으니 이건 천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전부 갈지혁 덕분이다.
“신세를 졌다.”
“보답을 한 것뿐이야.”
도와주고도 생색을 내지 않는다.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넘어가지 못한 것이면서 돌려 말한다.
“돌아가지. 이놈들은 다른 자들을 불러서 알아서 처리하고. 밖에 저 여자의 친 오라비가 와 있다.”
길 안내를 하게는 했지만 이 안에까지는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의 경공 실력으로 보아 결단코 도움이 되지 못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야환이 비틀거리면서 걷자 화명이 급히 그를 부축했다.
야환이 픽 하고 웃었다.
“무겁지 않으냐?”
“무겁기는…….”
그녀가 샐쭉하게 야환을 노려본다.
* * *
부락은 분주했다.
길 안내를 해 주었던 족장의 아들이 떠나기 전에 미리 손을 써놓은 탓이다.
리족의 사내들은 모두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채 구하러 가기도 전에 떠났던 네 명 모두가 무사하게 돌아왔다.
더군다나 웅족을 모두 제압했다고 하니…….
리족의 사내들 대부분이 쓰러진 웅족의 인물들을 끌고 오기 위해 떠나자 부락이 한순간에 텅 빈 듯했다.
갈지혁이 죽인 것은 단 두 명이다.
웅족의 족장이었던 우콴과 사황이 물어 버린 모구령.
나머지들은 단지 정신을 잃었을 뿐이다. 그리고 내공을 지니고 있던 자들은 앞으로 무공을 펼치지 못할 게다.
저녁 시간이 되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아 부락은 꽤나 휑했다.
갈지혁은 가만히 앉은 채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점점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거라도 좀 드세요.”
화명이 저녁이라고 가져다준 음식을 갈지혁은 힐끔 바라봤다. 무엇을 먹을 기분은 아니지만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 그는 음식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먹는 식사가 될지도 모른다.
‘나약한 생각은 하지 말자.’
반드시 살 것이다. 그리고 다시 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독왕이 되어서 중원에 우뚝 설 게다.
할 일이 많다. 불가능하다고 말해지는 독인들의 꿈인 독왕이 되고야 말 거다.
갈지혁의 옆에는 야환이 있다. 그 또한 말없이 화명이 가져다준 저녁을 먹었다.
지금 갈지혁은 리족의 부락에서 영웅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걱정거리인 웅족의 야망을 꺾어 주었고, 리족의 사람들을 구해 줬다. 경계의 눈빛이 사라진 것은 당연지사다.
오히려 그들은 경외감 어린 눈으로 갈지혁을 보고 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갈지혁은 운기에 들었다.
수라독공을 운기하자 그의 몸 주변으로 녹색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내 그러한 기색조차 사라졌다. 수라독공이 극성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경지다.
갈지혁을 바라보고 있는 야환으로서는 실로 감탄스러웠다.
그의 몸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이 뿜어져 나온다.
왜 중원이 갈지혁이라는 이름 앞에서 그토록 몸을 사렸는지 이제 알 것도 같았다.
그런 그가 이곳에 와서 찾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그것을 지니게 될 갈지혁은 더 더욱 강해질 터인데…….
한 시진가량을 운기하던 갈지혁이 눈을 떴다.
시간이 다 된 것이다.
마침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을 하려던 야환은 수고를 덜었다.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검을 허리에 찼다.
“가지.”
방 안을 돌아다니던 사황도 갈지혁의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봤을 때는 상당히 놀랐지만 조금 지나니 이 사황이라는 뱀도 익숙해졌다.
어렸을 적부터 뱀을 볼 기회가 많아서인지 그리 낯설지 않았다.
탁.
갈지혁이 문을 열면서 밖으로 나섰다.
리족의 부락은 처음 왔을 때보다 활기에 넘쳤다.
사내들의 대부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걱정거리가 사라져서일 게다.
“따라와.”
뒤따라 나온 야환이 앞장서서 부락을 벗어났다.
몇 번이나 왔던 길을 그는 걷고 있었다. 갈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혹여나 느껴질 독의 기운을 잡으려고 했다.
막 수라독공을 운기한 탓에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야환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수풀을 헤치며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앞장서서 걷던 그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여기다.”
“음.”
갈지혁은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그가 말한 신령석이라는 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곧 나타날 거다.”
갈지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야환이 말했다.
갈지혁은 품속에 있는 혈환액을 꺼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혼자 싸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혈환액이 필요하다.
그때 미세하기는 하지만 무엇인가가 갈지혁의 심기를 건드렸다.
‘음?’
뭔가가 오묘하게 비틀리는 느낌.
그러더니 어른 머리통만한 바위 하나가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갈지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돌로 향했다.
표면이 매끌매끌해 보이는 돌로,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옆에 서 있던 야환이 손가락으로 그 돌을 가리켰다.
“저거다.”
갈지혁이 말없이 돌에 다가갔다.
“그 돌을 움직이려고 하면 자신이 사라진다.”
“그런가.”
손으로 돌 표면을 쓸었다.
흙 냄새가 난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미세하게 느껴지는 음기를 읽어 냈다.
갈지혁이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비켜.”
말을 마친 갈지혁은 혈환액을 꺼내더니 자신의 몸에 뿌렸다.
야환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 그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이만 헤어져야겠군.”
“고마웠다.”
“서로 주고받은 것뿐이니 그런 말 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 연이 닿으면…… 다시 한 번 보면 그만이다.”
“그래, 그것뿐이겠지.”
“잘 지내라.”
말을 마친 갈지혁이 돌에 손을 대더니 그것을 옆으로 비틀었다.
그 순간 갈지혁의 몸이 야환의 눈에서 슉 하니 사라져 버렸다. 마치 애초에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처음 보았다. 과연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그는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돌을 바라봤다.
갈지혁이 살아서 나올지, 아니면 여태까지 사라졌던 다른 모든 이처럼 죽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라면 분명히 살아서 이곳에 다시 나타날 거라고 믿었다.
갈지혁은 야환이 본 그 누구보다 강한 무인이었다.
‘죽지 않겠지. 바로 그 갈지혁이니까.’
갈지혁이 나올 수 없는 곳이라면 중원에 있는 그 누구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곳이라는 소리다.
참 신비한 자였다.
기이하게 나타났다가 유령처럼 사라졌다.
자신과는 전혀 동떨어진 세계에 산다고 생각했던 자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기도 하는 모양이다.
‘네 앞길에 행운이 깃들기를.’
그는 갈지혁이 사라진 쪽을 향해 합장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부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야환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나무 위에서 유령처럼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허공을 밟으며 아주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는 그 모습은 신선을 연상케 했다.
천상제(天上梯)다.
허공에 계단이 있는 것처럼 빈 공간을 밟고 오르내리는 신법. 무공이 신의 경지에 도달해야 사용할 수 있다는 최상의 신법이다. 실제로 지금 전 중원에서 이 경지에 도달한 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내다, 무척이나 젊은.
그가 손으로 땅바닥을 쓸었다. 이곳에 있던 돌이 사라졌거늘 전혀 무엇이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