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0화
갈지혁이 돌을 건드리는 순간 돌과 함께 그의 몸이 사라졌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픽 하고 웃으며 가볍게 사내는 묶은 머리를 풀어 헤쳤다.
단리문. 그가 이곳에 왔다.
“드디어 내 염원이 이루어지겠군. 큭, 크크크!”
갈지혁이 갑작스럽게 해남도로 향한 것이 단화초 때문일 거라고 판단했다.
해남도까지 쫓아와 백씨세가에 몸을 담았지만 정작 갈지혁은 해남파를 떠났다.
갈지혁은 은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남파 전역으로 퍼진 단리문의 정보망을 모두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결국 갈지혁이 오지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단리문은 그의 뒤를 은밀히 쫓았다.
갈지혁은 단화초의 위치를 정확하게 모르는지 며칠 동안 오지산에 있는 리족의 부락에서 시간도 끌었다.
쫓아오는 시간은 넉넉했던 게다.
단화초를 찾으러 들어간 갈지혁이 곧 나타날 게다. 그리고 그때는 더 이상 그를 살려 둬야 할 필요도 없었다.
단화초는 바로 단리문의 것이 될 것이다.
그의 입에 미소가 걸린다.
너무나 즐거운 밤이 될 것 같다.
돌을 옆으로 미는 순간 갈지혁의 눈앞이 갑자기 일렁이더니 이내 다른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변한 건 없어 보이지만 이곳은 분명 다른 곳이었다.
진법의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음기는 분명 오문진의 것이었다.
갈지혁은 오문진의 중심을 찾기 위해 발을 옮겼다.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단화초가 있는 공간이 있을 게 분명하다.
몇 발자국 걷지 않아 사방에서 독기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미약한 독기지만 무공을 모르는 자들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즉사할 게다. 그리고 그러한 갈지혁의 판단에 대답이라도 해 주듯 주변에는 썩어 버린 시체 몇 구가 보였다.
어린아이로 보이는 것도, 그리고 여인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독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더 더욱 두려워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무공을 모르는 이들에게 치명적인 독이기는 하지만 만독불침지체인 갈지혁에게 이 정도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가 없었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문진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처음엔 가벼웠던 독기가 점점 치명적으로 변해 갔다.
오문진은 독기를 품고 있는 진법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오문진 안에 있는 물건이었다.
갈지혁은 이미 확신했다.
이곳에 단화초가 있다.
단화초는 주변에 있는 모든 생물의 생명력을 빼앗아 먹는다. 그 탓에 단화초가 자라는 곳에는 다른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못한다. 지독한 독기는 천천히 퍼져 나가 사방을 뒤덮는다.
아무리 강한 독성을 지닌 생물이라고 해도 단화초에 가까워지면 그것조차 죽어 버리고 만다.
그만큼 단화초는 무시무시한 독성을 지닌 풀이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독기로 채운 것만 봐도 단화초가 얼마나 지독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게다.
오문진 안을 걸어가던 갈지혁의 눈앞에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지옥의 입구처럼 안에서는 스산한 기운이 피어오른다.
‘죽음의 기운.’
생명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로지 죽은 자들의 사념 같은 음울한 기운만이 동굴 안에서 쏟아져 나온다.
“저곳이군.”
갈지혁은 나지막이 중얼거린 후에 발걸음을 옮겼다.
등이 쭈뼛거리는 것이 긴장되는 모양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갈지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혈환액의 효능은 길지 않다.
‘단숨에 간다.’
갈지혁은 동굴 안으로 성큼 몸을 들이밀었다.
“큭, 지독하군.”
손으로 코를 막을 정도로 지독한 악취. 아니, 독의 냄새다. 얼마나 지독하면 머리가 흔들거릴 정도인지.
겨우 입구에 이르렀을 뿐인데도 이 정도라면, 정작 단화초가 얼마만한 독성을 지녔을지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동굴 안은 어두웠다.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 스산한 분위기와 묘하게 어울린다.
부스럭.
발아래 무엇인가 밟히는 것이 있었다. 시선을 돌린 갈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의 시체다.
형체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 밟으면서 부서진 것은 사람의 뼈였다. 독기에 버티지 못한 뼈가 속이 다 녹아 버렸던 거다.
만약 갈지혁도 버텨 내지 못하면 여기 쓰러져 있는 다른 자들처럼 될 게다.
누구의 시신인지는 모른다.
얼마나 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신령석에 손을 대서 이곳으로 온 자일 확률이 컸다. 물론 개중에 무공을 익히지 못한 자였다면 초입에서 죽었을 게고, 그나마 이 동굴까지 온 것을 보아하면 꽤나 강한 무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죽으면 같다.
사람은 죽으면 돈이 많든 적든 한 줌의 가루가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갈지혁은 그렇게 되는 건 사양이다.
갈지혁은 계속해서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도 이제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을 무렵에서야 그는 발을 멈췄다.
동굴의 길이 끊겼다. 계속해서 가려면 아래로 뛰어내려야 한다. 아래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반대편에는 눈에 간신히 보일 정도의 통로가 하나 있었다.
꽤나 먼 거리라 도약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이곳을 내려가서 건너가야 한다는 것인데…….
갈지혁은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배짱 좋은 자라도 지금 이 구덩이를 보면 기겁하고 주저앉고야 말 거다.
이 거대한 공간에 우글거리는 뱀과 전갈, 지네들을 본다면.
뱀들이 꿈틀댄다.
지네들은 무리를 지어서 다닌다.
전갈들도 날카로운 집게를 탁탁 부딪치면서 먹잇감을 찾는 듯하다.
먹이도 없는데 대체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살아 있나 의문을 품을 무렵 답이 나왔다.
비실거리는 뱀 하나를 바라보던 전갈이 갑작스럽게 덮치더니 집게발로 숨통을 끊어 버렸다. 그리고 마구 몰려드는 갖가지 독사와 독충들…….
독성이 점점 강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놈들이 먹는 것 자체가 독이니까 몸속에 내재된 독성은 점점 강해질 게다.
그리고 갈지혁은 그러한 독을 품은 것들이 가득한 저곳을 걸어서 건너야 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실수로라도 이놈들을 자극한다면 사방에서 갈지혁을 향해 달려들 것이다.
땅에 발이 닿자 갈지혁은 한 걸음씩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발등을 타고 뱀 한 마리가 스르륵 지나간다.
소름이 돋을 만도 하련만 갈지혁은 개의치도 않는다. 그저 계속해서 앞으로만 걸어갈 뿐이다.
독사가 발을 타고 올라오고, 전갈들도 길을 막는다. 지네들 또한 갈지혁의 옷 속으로 들어오려는 듯이 꿈틀댄다.
‘이 정도쯤이야.’
지독한 독을 지닌 놈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절대극독과 비견할 정도는 아니다. 더군다나 갈지혁은 이러한 곳을 건넌 경험이 전에도 있었다.
사로다.
갈지혁은 사로를 두 번 걸었기에 이곳을 건너는 것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익숙하니 마음이 편하고, 움직이는 데 망설임이 없어진다.
느리게 걷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데 그 어떠한 독을 지닌 것들도 갈지혁에게 달려들지 않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독기가 자신들보다 강해서다.
갈지혁이 혈환액을 바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갈지혁이 약해 보였다면 독충들은 언제라도 그를 잡아먹기 위해 달려들었을 게다. 더군다나 소매 속에서 나타난 사황, 인면지주의 독기 또한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터벅터벅.
갈지혁은 그 수많은 독사와 독충들을 뚫고 이어지는 통로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에 서는 순간 갈지혁은 다시 한 번 엄청난 독기에 부르르 떨었다.
‘단화초가 가까이 있다.’
입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독기가 안에서 풀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사황조차도 그 독기에 기겁을 했는지 어느새 갈지혁의 어깨까지 타고 올라와 있었다.
갈지혁은 그런 사황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무섭냐?”
뱀이 대답을 할 리가 없다.
그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이 길은 죽음의 길이다. 살아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는 그러한 길 말이다.
갈지혁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솔직히 나도 좀 무섭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사람인 이상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또한 가야 할 길이라는 걸 알기에 두려움을 이겨 내야 하는 것이다.
갈지혁은 통로 안으로 쑥 들어갔다.
거침없이 그는 계속해서 걸었다.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으려는 듯이 앞만 바라봤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통로가 갑자기 점점 넓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음?”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통로가 끝나고 넓은 공간이 갈지혁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는 화사하게 핀 꽃 한 송이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붉은색 잎은 사람의 피를 머금은 듯이 요사스럽다.
쭉 뻗은 줄기는 꽃에 어울리지 않게 검은색이다. 잎사귀의 색깔도 마찬가지다.
단화초다.
그런데 이 햇빛은 대체…….
갈지혁은 고개를 들었다.
동굴의 윗부분이 커다랗게 뚫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통해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단화초를 비추고 있다.
‘저것이 단화초다.’
망설일 틈은 없다.
이 해남도에 온 목적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갈지혁은 조금 더 단화초에 다가가기 위해 몇 발자국을 더 나아갔다. 그리고 햇살이 쏟아지는 곳에 이르는 순간,
“컥!”
짧은 찰나였지만 갈지혁은 정신을 잃을 뻔했다.
휘청 하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했다.
이상하게도 주변의 독기가 퍼지지 않아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늘 햇빛이 닿는 곳에 이르자마자 엄청난 독기가 몸속에 침투해 버렸다.
‘이걸 내 힘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예전에 절대극독을 먹고 나서 죽을 뻔했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고통이 몰아칠 게다.
갈지혁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는 단화초를 뽑아내기 위해 땅속에 손을 박아 넣었다.
손가락 끝이 찌릿거린다.
주변의 모든 생명을 먹고산다는 단화초답게 근방의 땅속도 독기로 가득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곳에서는 단화초의 독기를 흡수하려고 들면 안 된다.
이 오문진 안 자체가 단화초가 토해 낸 독기로 가득하다. 이런 곳에서 운기를 한다면 속에서 터져 나올 독기에 힘을 실어 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가뜩이나 단화초의 독성을 흡수하다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독기까지 같이 받아들이면 그럴 위험성은 더 커진다.
이 단화초를 가지고 오문진을 빠져나가 좋은 장소를 찾아야 한다.
음기가 아닌 양기가 가득한 곳 말이다. 그곳에서 운기를 하면서 단화초의 독성을 몸 안에 받아 넣어야 한다.
단화초는 꽃잎과 잎이 다르게 쓰인다.
갈지혁은 뿌리가 상하지 않게 단화초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뿌리까지 나오자 쏟아지는 독기는 더욱 심해졌지만 다행히 그는 만독불침지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다가가지도 못하는 것을 손으로 뽑고도 멀쩡한 것은 갈지혁이 엄청난 경지에 오른 독인이기 때문이었다.
‘서둘러야겠어.’
점점 단화초를 든 손이 쿡쿡거리며 쑤시기 시작한다. 단화초와 오래 몸을 붙이고 있으면 그리 좋지 않을 것 같다. 더군다나 혈환액의 효능이 얼마 지나지 않으면 끝날 게다.
그전에 방금 전에 건너왔던 독사와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을 지나야 한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기이한 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끼이. 끼이.
작은 소리지만 갈지혁의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구멍을 통해 무엇인가가 날아 들어오고 있는데…….
‘독접(毒蝶)!’
나비다.
하지만 이런 곳에 있다는 것은 바로 독을 지닌 나비라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일악천에게 들었던 게 있었다.
바로 저 독접에 관해서였다.
저 나비는 단화초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 단화초의 생명을 빨아먹고 사는 독접으로 단접(斷蝶)이라고도 불린다.
단접을 쫓으면 단화초가 있다.
아주 오래전 단화초를 찾던 자들이 항상 하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단접을 쫓는다는 건 바로 죽는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이다.
단화초에 붙어 사는 나비답게 단접의 날개에서 떨어지는 가루는 사람을 녹여 버렸다.
극독!
그것은 당문의 그 어떠한 독보다도 매서웠다.